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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서한”에 대한 노먼 가이슬러와 론 로우즈의 변증과 ‘크리스천 리서치 저널’(Christian Research Journal)의 지방 교회들 재평가에 대한 그들의 비평에 답변함 [영어 사이트] 이 글을 PDF 로도 읽을 수 있음 이 문서에 다음의 글들이 인용되었다 해서 그것들이 각 항목의 해석에 있어서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의 가르침과 전적으로 일치한다거나, 지방 교회들 안에 있는 우리가 진리의 각 방면에서 그들에게 […]

주님께서 그영이심을 확증하는 학자들과 성경 교사들

“공개서한”에 대한 노먼 가이슬러와 론 로우즈의 변증과 ‘크리스천 리서치 저널’(Christian Research Journal)의 지방 교회들 재평가에 대한 그들의 비평에 답변함 [영어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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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에 다음의 글들이 인용되었다 해서 그것들이 각 항목의 해석에 있어서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의 가르침과 전적으로 일치한다거나, 지방 교회들 안에 있는 우리가 진리의 각 방면에서 그들에게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출처들은 참으로 주 예수님을 그 영과 동일시하고 있다.

문맥과 아울러 ‘주님께로 돌아가면’ 이제 ‘주님은 그영이십니다’ 라는 부분도 연구하라. 그러면 당신은 언급된 이 분이 아들이심을 볼 것이다.
Athanasius, “Against the Arians, I, 4:11,” A Select Library of the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Series 2, Vol. IV,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eds.,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891), p. 312

어떤 의미에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신데, 이분은 눈에 보이시지 않는 그리스도, 내면에 계신 그리스도로서 영혼과 대화하시고, 이런 것들을 가르치시며, 이해력을 주시는 그런 분이시다…
Marius Victorinus, quoted in Henry Barclay Swete, The Holy Spirit in the Ancient Church (London, Macmillan and Co., Ltd., 1912), pp. 306-307

17. 이제 주님은 그 영이십니다—(그들이 돌아갈 분인, 16절)주님은(회심때 영접된, 롬8: 9-11과 비교)그 영이십니다. 돌이킴은 그영이신 주님께 대한 것이다. 주님이신 그영께서 계신 곳–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계신다. 그리스도의 영이 계신 곳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롬8:9-10.
John Albert Bengel, New Testament Word Studies (Grand Rapids, MI: Kregel Publications, 1971), p. 288

여기서 주님은 그리스도를 의미함이 분명하다. 이것은 신약의 일반적인 관례에 따라 주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가리키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이 경우 앞뒤 문맥을 살펴볼 때 주님이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4절에서 너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졌다고 하고, 16절에서는 마음을 주님께로 돌이킬 때 너울이 벗겨진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주님은 그영이시다.
Charles Hodge, An Exposition of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859, 1980), p. 73

“주님은 그영이시다.” 즉 그리스도는 성령이시다. 그분들은 하나이시며 같은 분이시다.
Charles Hodge, An Exposition of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859, 1980), p. 74

17.주님– 그리스도(14, 16절, 4장 5절)는 그영(that Spirit)-즉 그 영(THE Spirit)이시다. 이 영(that Spirit)은 6절에서 언급되고, 삽입부분인 7절부터 16절까지의 말씀이 있은 후 여기 17절에서 다시 언급된다…
Robert Jamieson, A. R. Fausset, and David Brown, A Commentary on the Old and New Testaments, vol. 3 (Peabody, MA: Hendrickson Publishers, 2002), p. 345

초기 크리스천 저술가들에 의해 우리 주님께서 종종 ‘그 영’과 ‘하나님의 영’으로 불리셨다는 것은, 그런 일이 있었다고 지적하는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뭔가 의미가 있는 사실이다. “아들께서 성령이시다”(The Son is the Holy Spirit)라는 말은 흔한 표현이다. 이그나티우스는 “그리스도는 흠이 없으신 영이시다(the Immaculate Spirit)”라고 말했다. 터툴리안도 “하나님의 영이시자 하나님의 이성(the Reason of God)-이성의 말씀이시자 말씀의 이성과 영-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곧 전자와 후자 모두이신 분” 이라고 썼다. 키프리안과 이레니우스도 “그분은 성령이시다”(He is the Holy Spirit)라고 말했다.
Joseph Cook, The Boston Monday Lectures, vol. 1 (London: Richard D. Dickinson, 1881), p. 78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와 그영을 동일시한다(고린도 후서3장 17절). 그리고 로마서 8장 9-10절에서,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는 서로 바꿔 쓸 수 있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Marvin R. Vincent, Word Studies in the New Testament, vol. IV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1887, 1980), p. 243; see also vol. III, pp. 308 and 423

우리의 주 예수님께서 그 영의 생명 안으로 높여지셨을 때, 그분은 비로소 ‘주 영’(the Lord the Spirit)이 되시고, 신약의 영을 주시며, 그분 자신이 그 영 안에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오실 수 있었다.
Andrew Murray, The Spirit of Christ (Fort Washington, PA: Christian Literature Crusade, 1963, 1978), p. 167; see also p. 168

일부 단락에서 바울이 쉽게 그영과 그리스도를 동일시 한 것은 틀림없이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고전 15:45. 6장 17절과 고후 3장 17절을 보라). 이러한 구절들에 의하면, 그영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오신다기보다는 그리스도 자신이 이 영이심을 알 수 있다.
Hermann Gunkel, The Influence of the Holy Spirit: The Popular View of the Apostolic Age and the Teaching of the Apostle Paul, translated by Roy A. Harrisville and Philip A. Quanbeck II (Philadelphia, PA: Fortress Press, 1979), p. 113

성령께서는 자신을 주 예수님과 동일시 하시고, 보혜사의 오심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우리 마음에 오심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자.
A. B. Simpson, When the Comforter Comes, 2nd day (Harrisburg, PA: Christian Publishers, c1911)

주님은 물론 그리스도이시며, 그영은 바울이 이미 6절에서 말한 그분이다. 그분은 성령이시고, 주님이시자 새 언약 아래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사람은 그영을 받는다… 그러므로 그 두 분은 사실상 동일시 되실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실제적인 체험에 관한 한 그리스도의 영과 그리스도 자신 사이에는 전혀 구별이 없다….
James Denney,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London: Hodder and Stroughton, 1894), pp. 133-134

따라서 “주님은 그영이십니다.” 라는 문장과 ‘주 영’(The Lord the Spirit)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그 영과 그리스도는 가끔씩 동일시 되신다. 주관적인 체험의 방면에서, 주님과 그 영의 내주는 구별할 수 없다. 우리의 의식에서 그분들은 하나이시다. 그 영은 주님의 ‘또 다른 자아’(alter ego)이시다.
Alexander Balmain Bruce, St. Paul’s Conception of Christianity (Edinburgh: T&T Clark, 1896), p. 254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영을 그리스도의 영과 동일시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 모두를 그리스도의 인격과도 동일시하고 있다. 우리는 “주님은 그영이십니다”라는 말씀을 본다. 또한 “우리는 그영이신 주님에 의해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고 있다”… 사도가 생각할 때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은 사실상 동의어이다. 부활하실 때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
David Somerville, St. Paul’s Conception of Christ (Edinburgh: T&T Clark, 1897), pp. 117-118; see also pp. 121, 122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돌아가야 할 곳인 주님은 그영이시다.” 이 말씀에 대해 여러 인위적인 설명들이 제시되어 왔다. 말씀의 의미와 직접적으로 모순되고 앞뒤 문맥의 범위를 확연히 벗어나는 해석들을 신경쓰지 않고…여기서 우리는, 마음이 돌아가야 할 분인 주님과 우리가 회심시에 영접했던 성령은 실제적인 점에서 전혀 차이가 없을 정도로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동일시 되시는 것을 본다.
John Peter Lange, Commentary on the Holy Scriptures: Critical, Doctrinal and Homiletical, translated and edited by Philip Schaff, Volume 10, “The Second Epistle of Paul to the Corinthian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60), p. 58

그 영의 일하심은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과 같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성 바울은 이렇게 적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죽은 것이지만, 영은…생명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것은 분명히 그리스도 자신의 내주와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같은 논지가 다음과 같은 말로 이어지는 것 같다. 주님은 그영이십니다. 주님이신 그 영께서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주 영에 의해…변화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the Spirit of the Lord)과 ‘주 영’(the Lord the Spirit)(문자적으로, 영광을 얻은 생명의 능력 안에 계신 그리스도)은 사실상 같은 분으로 간주된다.
Henry Barclay Swete, The Holy Spirit i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10), pp. 300-301; see also pp. 301-304

퓨뉴마, 즉 영이신 살아계신 그리스도는 저 멀리 구름과 별들 위에 계시지 않고, 그분이 거하시면서 그분 자신의 사람들 안에서 다스리시는 이 비천한 땅 위에 현존하며 가까이 계신다. 여기에서 다시70인 역이 이 방향으로 제시하는 바가 결코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볼 수 있고, 바울 자신도 다음과 같은 중요한 도식을 창안해 내었다:

주님은 그영이시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한영이다.

Adolf Deissmann, Paul: A Study in Social and Religious History, translated by William E. Wilson (Gloucester, MA: Peter Smith, 1912, 1972), p. 138; see also p. 140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관련하여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그리스도와 그영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은 없다(No line of demarcation). “더구나 주님은 그 영이십니다”라고 말한 고린도 후서 3장 17절은 위대한 구절이다. 두 분 사이의 연관성이 얼마나 밀접하던지 부루스([A. B.] Bruce)는 “그 영은 주님의 또 다른 자아(the Alter Ego)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W. H. Griffith Thomas, The Holy Spirit (Grand Rapids, MI: Kregel Publications, 1986), p. 34

그리스도와 그영은 다르시면서도 같으시고, 같으시면서도 다르시다.
W. H. Griffith Thomas, The Holy Spirit (Grand Rapids, MI: Kregel Publications, 1986), p. 144

바울의 사상의 핵심, 즉 바울 자신의 가장 독창적인 사고가 펼쳐지는 곳에서 그리스도와 그 영은 실제적이고 본질적으로 하나이시다. 그러나 그 사상의 외변에서, 즉 그의 사상이 당시의 언어를 통해 표출될 때는 두 분이 공식적으로 구별되신다.
Thomas Rees, The Holy Spirit in Thought and Experience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15), p. 101

이 은혜, 이 평화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만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있고 여러분 안에 온다. 이 분이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아니시라면 어떤 분이시란 말인가?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영 안에서 또 영으로서가 아니시라면 어떻게 여러분 안에 계신단 말인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 혹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 이들은 다른 실재들이 아니시다. 대신에 한 분은 다른 분의 방식(method)이시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인성안에서 사람에게 계시되신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이다. 육체되신 그리스도께서 여러 각 사람의 영과 함께 인격적으로 현존하시는 것은 그분의 영의 인격 안에서이다. 성령께서는 주로 육체되신 분(the Incarnate)의 영으로 우리에게 계시되신다.
Robert C. Moberly, Atonement and Personality (London, John Murray, 1917), p. 194

그분은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으십시오”—(λάβετε πνεῦμα ἅγιον). 이것은 그분 자신에 속한 것, 혹은 그분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어떤 영(a Spirit)이 그들 위에 임하기를 기도로 호소하는 분의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스스로를 살아있게 하시는–존재하게(be)하는 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바로 그 영을 그들에게 이전시키려는 분의 상징적인 표현이다.
Robert C. Moberly, Atonement and Personality (London, John Murray, 1917), pp. 196-197

주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됐다는 너무나도 깊은 확신이 든 나머지 그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고 성령에 대하여 사용하는 용어는 때때로 거의 구분이 어려운 경우가 있다.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은 하나이시고 동일하시다(롬8:9). 그리스도와 성령은 다음과 같이 병행하여 말해지고 있다(ix. i. 주님[문자적으로 그리스도]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한영입니다. 고전6:17). ‘그분의 아들의 영’(갈4:6). 속 사람 안에 있는 그분의 영이 믿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는 그리스도와 같으심(엡3:16, 17). ‘그리스도 예수의 영의 공급’(빌 1:19). 그리고 가장 명백하게는 ‘주님은 그영이심’(고후3:17). ‘주 영’(18절).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나니’(고전 15:45).

따라서 하나님의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시므로, 성령 또는 그리스도, 그중 어느 분이 그리스도인들 안에 계시고, 그들은 그분 안에 계신다고 말하더라도 똑같이 진리이다.
Alan H. McNeile, St. Paul: His Life, Letters, and Christian Doctrin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20), pp. 283-284

그 밖의 다른 곳에서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더구나 주님은 그 영이십니다. 주님이신 그 영께서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 영과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사실상 구별이 안 된다- 새 생명의 근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의 증거(the earnest), 영광의 소망,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그 밖의 은혜의 근원.
Terrot R. Glover, Paul of Tarsus (London: Student Christian Movement, 1925), p. 219

17절에 있는 ‘큐리오스’(Kyrios)는 16절에서 언급된 분과 동일한 분이시며 더 앞의 말씀14절에 있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문맥을 살펴보면 그것은 주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결과적으로 ‘영광’이 그분의 얼굴 위에 있는 셈이 된다(18절과 6절).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주님은 그 영이십니다”라는 말을 할 때 “주님(즉 부활하신 그리스도)은 그 영이심”을 뜻하는 의미로 그렇게 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R. Birch Hoyle, The Holy Spirit in St. Paul (Garden City, NY: Doubleday, Doran, & Company, 1928), p. 143

해방자 즉 예수 그리스도(‘주 영’ 고린도 후서 3장 17-18절)에게 ‘믿음-복종’은 이 속 사람을, 율법처럼 영적이시기는 하지만 율법과는 달리 오직 유죄 판결을 내릴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건져내실 수 있는 분께 연결시킨다. 신학 용어를 사용하자면 ‘의롭게 됨’과 ‘거룩하게 됨’ 모두에서 ‘믿음-연합’은 주 영, 즉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갖는 영적인 연합이다.
H. Wheeler Robinson, The Christian Experience of the Holy Spirit (New York: Harper & Brothers, 1928), p. 230

그것은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으로 언급된다.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시는 생명의 영(롬8:2)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한 단락 안에서, 주님-그리스도-그영은 동일시 된다(고후3:17).
W. F. Lofthouse, The Father and the Son (London: Student Christian Movement Press, 1934), p. 179

적어도 사람들의 체험 안에서는 주님은 그영을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예수님과 그 영이 동일시 된다. 주님은 부활하시고 높여지신 예수님이시고, 하나님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에게 주셨다(빌2:9참조). 더 나아가 유대인들은 여호와께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고 주장될 법도 하다. 로마서 8장 9-11에서 그리스도인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그 영의 생명과 동일시 된다.
R. H. Strachan, The Second Epistle of Paul to the Corinthians (London: Hodder & Stoughton, 1935), p. 88

따라서 ‘성령의 교통’은 또한 ‘하나님의 아들의 교통’이었다(고전1:9). 하나님의 우편으로 높여지신 분인 그리스도께서 그영을 ‘부어주셨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교회 안에 있는 그영의 임재는 주님의 임재이다(is). “주님은 그영이십니다”(고후3:17).
C. H. Dodd, 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s (London: Hodder & Stoughton (1936, 1944), p. 62

그러나 로마서 8장 10절의 구절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에서 보듯이 위대한 비밀의 또다른 부분이 여기 우리 앞에 제시되어 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분은 그분의 영에 의해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리 안에 계신 분은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영께서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계시도록 하실 수 있으시므로, 우리는 고린도 후서 3장 17, 18절의 아름다운 말씀 안에서 다음 사실을 볼 수 있다. “더구나 주님은 그영이십니다… 우리는..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릅니다. 이것은 주 영께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는 고린도 후서 13장 5절에서, “어떻게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라고 한 바울의 엄중한 말을 본다.
William R. Newell, Romans: Verse by Verse (Grand Rapids, MI: Kregel Classics, 1994), p. 302

여기서 영 앞에 정관사가 있기 때문에(το πνεῦμα), 우리는 성 바울이 이 말로 성령을 의미했다고 짐작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갈 때, 그 너울이 벗어질 것입니다.”(3:16, 이어서 출애굽기 34:34). 바울은 그리스도를 뜻하는 ‘주님’을 언급하고 있으며, 다음 소견을 추가한다: 성령이신 분 주님.
Lucien Cerfaux, Christ in the Theology of St. Paul, translated by Geoffrey Webb and Adrian Walker (New York: Herder and Herder, 1952, 1959), p. 293

이 단락에서 바울은 많은 이들에게 신학적인 논란거리가 될 문제 하나를 제기했다. 그는 “주님은 그영이십니다.” 라고 말한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을 동일시하는 것같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이 신학에 관한 글을 서술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체험을 적고 있었다. 그리고 그영의 역사와 부활하신 주님의 역사가 하나이고 동일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체험 안에서 그렇다. 우리가 받은 힘과 빛과 인도는 똑같이 그영에게서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비롯된다. 우리가 그것을 체험하는 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William Barclay, The Letters to the Corinthians (Philadelphia, PA: Westminster Press, 1954, 1956), p. 216

여기에서 우리는 고린도 후서 3장 17절에 대한 가장 개연성 있는 해석이라고 볼만한 주석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17절 상반절의 주제는 ‘큐리오스’(Kyrios)이다. 큐리오스가 16 절에 있는 큐리오스와 동일한 반면, 푸뉴마(Pneuma)는 복된 삼일성의 세번째 위격인 성령이시다…

17절은 독립된 구절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논지의 시작이 아니라 16절의 사상의 연속이다. 이행을 의미하는 접속어인 헬라어 de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또 다른 논지를 다루는 독립된 구절이었다면 ‘큐리오스’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해도 무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17절은 앞 문장의 논지가 계속 연결되는 문장이므로 독자들의 생각은 그들의 관심을 또 다른 논지로 옮겨갈 만한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갖지 못한다. 따라서 17절의 ‘큐리오스’는 16절의 ‘큐리오스’와 같다.

17절 상반절이 16절의 의미가 연속되게 이어지는 문장이므로, 그렇게 되면 이 문장의 동사 ‘에스틴’(estin)은 해설의 의미가 담긴 서술어이며, 17절은 16절의 주석적 설명이 된다. 즉 16절에서 언급된 ‘큐리오스’는 그 영이시다. 그렇다면 그 영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17절 하반절은 그영께서 자유를 주신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제 로마서 8장으로부터 노예되게 하는 율법의 문자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자유케 하시는 영이 성령임을 알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다루는 절이 담긴 고린도 후서 2장과 3장의 전체 맥락을 살펴보면 확증된다. 여기서 성 바울이 푸뉴마(Pneuma)를 언급할 때마다 항상 성령을 가리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거의 없다.
Prosper Grech, “2 Corinthians 3:17 and the Pauline Doctrine of Conversion to the Holy Spirit,” Catholic Bible Quarterly, XVII (Washington, DC: Catholic Bible Association of America, 1955), pp. 421-422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사상과 관련해서 우리가 살펴본 바를 고려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된 ‘되심’(becoming), 곧 그분께서 그 영과 동일시되는 결과를 가져온 ‘되심’은 그분께서 부활하실 때 일어났던 일을 가리킬 뿐임을 알 수 있다. 고린도 후서 3장 17절에서 우리는 그영께서 주님(즉 부활하시고 높여지신 그리스도)과 동일시 되셨다는 것을 보았다.
Neill Q. Hamilton, The Holy Spirit and Eschatology in Paul,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Occasional Papers, No. 6 (Edinburgh: Oliver and Boyd, 1957), p. 14

…그 분 [그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현존이요 활동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내뻗은 팔이시다. 부활 능력 안에 계신 그분 자신이시다. 곧 그분의 나타내보이심이 그분의 부활 능력 안에서 또 그분의 부활 능력과 함께 시작하고 그 때로부터 그 일을 계속해 나가면서 이루어질 때, 그 나타내 보이심의 능력 안에 계신 그분 자신이다.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V:2: The Doctrine of Reconciliation, G. W. Bromiley & T. F. Torrance, eds. (Edinburgh: T&T Clark, 1958), pp. 322-323

6절과 8절에서 새 사역은 문자[γράμμα] 가 아닌 영[πνεῦμα]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게다가 그 구절은 믿지 않는 유대인이 여전히 너울에 가려 살고 있는데 그 너울은 그리스도 안에[ἐν Χριστῷ ](14절)서만 없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곳에서도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주님[κύριος](14절의 그리스도[Χριστός] à III. 1087.5ff.)께로 돌이킬 때 너울이 벗겨진다. 이 ‘큐리오스’(κύριος, 주님)는 그영이시라는 이 문장은 계속 이어지는 두 가지 논지를 접목시킨다. 이스라엘이 돌아가야 할 분, 곧 모세가 아닌 높여지신 큐리오스(κύριος, 주님)(롬10:4, 고전10:2 참조)는 푸뉴마(πνεῦμα [영])와 동일시 된다. 이것은 그분께 돌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푸뉴마(πνεῦμα그영)안에 있는 새로운 디아코니아(διακονία, 사역)로 돌이키는 것임을 보여준다. 바울이 그리스도와 그영께 같은 기능을 부여하면서도 다른 곳에서는 그 두 분을 같은 분으로 보지 않는다는 지적은 완전히 맞는 말이 아니다.
Eduard Schweizer, “πνεῦμα, πνευτικόςμα,” i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ol. VI, Gerhard Friedrich, ed., translated and edited by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MI: Eerdmans, 1968), p. 418

도덕적이든 영적이든 그리스도인의 현재의 체험에 관한 모든 것들에서, 성 바울은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와 성령을 사실상 상호 교환되는 분으로 취급한다.
Charles A. Anderson Scott, Christianity according to St Paul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1), p. 260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간헐적으로 나타난 여호와의 행사, 곧 행동을 지시하시고 선지자의 말에 영감을 주신 행사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후4:11)라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 영께서 믿는 이들 안에 들어오셔서 그들의 생명이 되시고, 그들 안에 예수님의 생명을 산출하시는 것은 사람의 아들께서 전에 계셨던 곳으로 올라가시고, 마지막 아담이 생명주는 영이 되시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해졌다.
S. H. Hooke, “The Spirit Was Not Yet,” New Testament Studies, vol. 9, Issue 4, July 1963, p. 380

17절과 18절에서 ‘주님’이라는 말은 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분 자신이 그 영 이시다. 18절의 말씀 끝부분에서도 이게 반복된다. “이것은 그영이신 주님에게서 비롯됩니다” 바울의 이런 사상의 또다른 특색은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한영 입니다” 라고 한 고린도 전서 6장 17절과, 믿는 이들 안에 거하는 신성한 실체가 그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로 서로 바꾸어 칭해지는 로마서 8장 9-11에서 발견된다.
Hendrikus Berkhof, The Doctrine of the Holy Spirit (Richmond, VA: John Knox Press, 1964), pp. 24-25; see also pp. 18, 25-27

14절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너울)이 없어진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므로, 이 문맥에서 ‘주님’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가리킴에 틀림없다. 이어 17절도 “더구나 주님은 그 영이십니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빛비춤 받고 이해를 얻도록 돌아갈 수 있는 주님이 그영, 즉 내적으로 생명을 주시고, 자유케하는 능력으로 체험되시는 분, 또한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서 행동하시는 수단이 되시는 그영시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David Hill, Greek Words and Hebrew Meanings: Studies in the Semantics of Soteriological Term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7), p. 278; see also pp. 279, 281

17. 더구나 주님은 그영이십니다…바울은 다른 곳에서는 주님(곧 그리스도)과 그 영(고전 12:4, 고후13:14참고)을 구분하지만, 두분은 역동적으로 하나이시다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이 믿는 이들 안에 나누어지고 그들 안에 간직되기 때문이다(롬8:9-11참고, 고전 15:45 하반절 각주 1의 주석도 보라).
F. F. Bruce, ed., New Century Bible (London: Oliphants, 1971), p. 193

최근 많이 받아들여지는 한 가지 해석은 “이 단락이 말하는 주님은 그영이십니다.” 라고 이 절을 옮긴 NEB 번역본에서 구체화된다. 이 해석은 이 고후 3:17절을 출애굽기 34장 34절에 대한 주석적 논평으로 본다. 곧 모세가 돌아가야 할 분으로 성경이 말하는 주님, 오늘날 유대인들이 빛비춤 받기 위해 돌아가야 할 분이신 주님은 성령이시다. 이 번역은 텍스트의 난점에 대한 설명으로 충분치 않은데 왜냐하면 16절에서 너울이 벗겨지도록 유대인들이 돌아가야 할 대상인 주님은 14절이 암시하는 것처럼 분명히 주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만일 바울이 17절에서 출애굽기 기사에 있는 주님의 인격을 밝힐 의도를 하고 있다면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어 바울은 이 주 그리스도께서 그영이시라고 선포하는 데로 나아간다.
G. R. Beasley-Murray, “2 Corinthians,” The Broadman Bible Commentary, vol. 11: 2 Corinthians-Philemon (Nashville, TN: Broadman Press, 1971), p. 26

바울은 높여지신 예수님과 그영-영적인 존재 혹은 영적인 차원이나 범위가 아니라, 그 영 즉 성령을 동일시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존재론적인 기독론은 성령론이다. 믿는 이들의 체험 안에서, 그리스도와 그 영 사이에 구분이 전혀 없다.
James D. G. Dunn, “1 Corinthians 15:45 – last Adam, life-giving Spirit,” Christ and Spirit in the New Testament, Barnabas Lindars and Stephen S. Smalley, ed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3), p. 139; 참고 항목 pp. 132-133, 141; “Jesus—Flesh and Spirit: An Exposition of Romans I. 3-4,”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XXIV:1, April 1973, p. 67; Christology in the Making: A New Testament Inquiry into the Origins of the Doctrine of the Incarnation (London: SCM Press, 1980), pp. 145, 146

따라서 그 영은 세상의 새로운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도달하실 수 있게 하시는 매개체요 힘이시며, 그 영 안에서 우리는 그분을 알 수 있다. 그 영은 교회 안에서, 개별적인 믿는 이들 안에서 그리고 세상 안에서 높여지신 주님의 활동적인 현존이시다.
Walter Kasper, Jesus the Christ (New York: Paulist Press, 1976), p. 256

진리의 영께서 ‘여러분과 영원히 계실 것’ 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은, ‘내가 여러분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을 것이고, 나는 여러분에게 돌아올 것’ 이라는 약속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다. 왜냐하면 내주하시는 그영은 예수님께서 돌아오실 때의 존재 양태(the mode)이시기 때문이다.
G. W. H. Lampe, God as Spirit (Oxford: Clarendon Press, 1977), p. 10

거듭해서 바울은 신성한 푸뉴마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후에 삼위일체 공식으로 귀결되었던 존재론적인 토론에 바울이 관심이나 기울였는지 의심스럽다. 그가 관심했던 바는 고린도인들이 자신들의 소망이 세워지는 기반인 그리스도가 그들이 푸뉴마를 체험할 때 만났던 바로 그분임을 이해하는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비추시는 것은 바로 푸뉴마를 통해서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푸뉴마로 오셨고, 그들이 점점 더 그분을 닮아가도록 영광의 새로운 단계 안으로 그들을 계속해서 인도하신다. 바울과 그의 독자들의 체험에 있어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푸뉴마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었다. 그리스도는 푸뉴마로서 그들을 만나셨다.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의 푸뉴마이셨다. 간단히 말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푸뉴마이시고, 푸뉴마는 그리스도이시다.
Walter Clifford Wright, Jr. “The Use of Pneuma in the Pauline Corpus with Special Attention to the Relationship between Pneuma and the Risen Christ,” Ph.D. Dissertation, Fuller Theological Seminary, 1977, p. 246

각각 맥락을 살펴보면, 고린도 전서 15장 45절 하반절과 고린도 후서 3장 17절 상반절은 밀접한 연관이 있고, 그 결과 고린도후서 3장 17절의 말씀에서 표명된 동일시는 예수님의 부활에서 비롯된다는 결론을 피하기 어렵게 된다. 그분은 부활하셨을 때 생명주시는 영이 되셨기 떄문에, 이제 그분은 그 영이시다.
Richard B. Gaffin, Jr., Resurrection and Redemption: A Study in Paul’s Soteriology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1978, 1987), p. 96; see also pp. 86, 95

그러나 그영은 높여지신 주님의 땅에 계신 현존이시다…
Ernst Käsemann, Commentary on Romans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1980), p. 241

믿는 이들 안에 내주하시는 그영은 영광받으신 주님과 동일한(selfsame)영이시다.
Carl F. H. Henry, God, Revelation and Authority, VI:2 (Waco, TX: Word Books, 1983), p. 400

바울은 두번 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 고 말한다(고전 15:45). ‘되셨다’(became)라는 동사에 얼마큼의 비중이 두어지는지에 상관 없이, 그것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신성한 영(the divine Spirit)을 거의 동일시 함에 이른다는 것은 분명하다. 바울은 당혹스런 한 문장에서 “주님은 그영이십니다”(고후3:17)라고 말한다. 그가 “주님은 그영을 보내신다” 또는 “그영은 신성하시다”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사안들이 더 단순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이 정녕 말하려고 한 것을 분명하게 다루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로마서 8장에서의 그영과 그리스도의 뒤섞음(the mixing)을 주목해야 한다. 몇 구절 안 되는 단락 안에서 바울은 ‘우리 안에 계신 영’,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따라서 문맥과 문법의 모든 미묘한 차이를 제쳐놓는다면, 우리는 추가적인 검토 없이도 다음만큼은 말할 수 있다. “영과 그리스도는 분리되시지 않는다”.
Lewis B. Smedes, Union with Christ (Grand Rapids, MI: Eerdmans, 1970, 1983), pp. 26-27

[고후3:17]의 문장 안에서 주님은 누구이신가? 해석가들은 가끔 그분이 출애굽기 34장의 여호와이시다 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본다면 새 언약의 그영은 사실상 여호와의 영이시고,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전혀 불일치하는 게 없게 된다. 그러나 바울의 논쟁의 전말은 두 언약들 사이의 일치가 아니라 대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지금 이스라엘이 역사상 어떤 단계, 곧 특별히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놀라운 주장과 직면해야 하는 단계로 이끌렸다는 주장을 내세우고자 한다.

주님은 예수님이시다. 이것이 이곳과 다른 모든 곳에서 바울의 메시지의 핵심이다. 17절에서 주님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이제는 ‘모든 것들’의 주님이신 실체적 존재인 예수님이시다.
Lewis B. Smedes, Union with Christ (Grand Rapids, MI: Eerdmans, 1970, 1983), pp. 39-40

바울은 “주님께서 그영이십니다”(고후3:17절, 18절도 참조)라고 말할 때, 성령의 신격을 지지한다. 어떤 이들이 큐리오스(kyrios)를 구약의 하나님과 동일시 하더라도, 앞뒤 문맥에 비춰볼 때(14절)사도는 그리스도와 그 영을 동일시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보는 편이 더 낫다. 그렇다면 “주님과 그영은 예수님께서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다(요10:30)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은 의미에서 ‘하나’이시다”.
Bruce Demarest and Gordon Lewis, Integrative Theology, vol. 1 (Grand Rapids, MI: Zondervan, 1987), p. 266;

마지막 문장은 타스커(R. V. G. Tasker)의 <턴데일 신약 주석>(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ies) (Grand Rapids, MI: Eerdmans, 1983), p. 66)고린도 후서를 인용한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그영은 구성 성분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특성(character)이 배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부활로 인해 전적으로 그영의 영역에 들어서셨다(롬1:4, 8:11도 참조). 참으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부활에 의해“생명주는 영이 되셨다” 라고 말할 수 있다(고전 15:45). 말하자면, 높여지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그영 안에서, 그영을 통하여, 그영으로서 체험되시는 것이다.
James D. G. Dunn, The Christ and the Spirit, vol. 2: Pneumatology(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1998), p. 16; 참고 항목 pp. 338, 341

그럼에도 그리스도와 그영의 역동적인 동일시는, 오늘날의 신학용어와 개념적 구분을 활용하자면, 단지 기능적인 동일시에 머물지 않고 존재상의(ontic)또는 존재론적인(ontological)방면 또한 포함함직하다. 달리 말해서, 누구도 그영께서 단지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신다거나 다만 그리스도를 대리하신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부활하신 주님 자신이 그 영을 통해 현존하시고 활동하신다는 의미가 포착되는데 이것은 이 두 분 사이에 존재상의 또는 존재론적인 어떤 연결이 없다면 거의 상상하기가 불가능한 개념이다. 따라서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와 그영 사이에 역동적이기는 하지만 존재론적인 동일시 또한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적합할 것같다.
Mehrdad Fatehi, The Spirit’s Relation to the Risen Lord in Paul: An Examination of Its Christological Implications (Tübingen, Germany: Mohr Siebeck, 2000), p. 305; 참고 항목 p. 332

또한 아들과 그영께서 하나이심을 가르치는 단락들이 있다. 로마서 8장 9-10에서 바울은 성령의 내주를 말하고 있는데, 누구든지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있으면 성령 또한 있는 것이며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들은 그분들의 단일성(unity)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 후서 3장 17절을 고려해 보라. 우리가 이미 보아온 것과 같이, 이 구절은 주님께서 그 영이라고 말하며, 주님이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히브리어 야훼(yhwh)에 해당되는 큐리오스(kyrios)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의 ‘큐리오스’를 자주 이 칭호로 호칭되곤 하셨던 예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경우에, 이 구절은 아들과 그 영 사이의 단일성을 단언한다.
John S. Feinberg, No One Like Him (Wheaton, IL: Crossway Books, 2001), p.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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