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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서한”에 대한 노먼 가이슬러와 론 로우즈의 변증과 ‘크리스천 리서치 저널’(Christian Research Journal)의 지방 교회들 재평가에 대한 그들의 비평에 답변함 [영어 사이트] 이 글을 PDF 로도 읽을 수 있음 노먼 가이슬러와 론 로우즈는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을 재평가한 크리스천 리서치 저널(Christian Research Journal)에 실린 엘리옷 밀러의 글에 대한 비판에서, 지방 교회들이 이단 교리인 성부 고난설을 가르친다며 […]

허울뿐인 학식에 의해 지지된 성부 고난설이라는 거짓 비난

“공개서한”에 대한 노먼 가이슬러와 론 로우즈의 변증과 ‘크리스천 리서치 저널’(Christian Research Journal)의 지방 교회들 재평가에 대한 그들의 비평에 답변함 [영어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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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먼 가이슬러와 론 로우즈는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을 재평가한 크리스천 리서치 저널(Christian Research Journal)에 실린 엘리옷 밀러의 글에 대한 비판에서, 지방 교회들이 이단 교리인 성부 고난설을 가르친다며 다음 세 개의 인용문을 증거로 제시했다.1

마찬가지로, 성부 고난설(성부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주장하는 이단)을 거부한다고 하는 지방 교회측 주장이 미심쩍어 보이는 것은, 그들이 상호내재라는 교리에 근거해 성부와 성자께서 서로의 활동들에 관여하신다는 견해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보아하니CRI 도 이것을 지지하는 듯하다.)그들의 주장인즉슨, “삼위일체의 어떤 인격도, 어디를 가시든 무엇을 하시든, 다른 두 인격들의 임재와 관여 없이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23, 강조가 추가됨).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부는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참여하신 것이 되는데, 이것은 그들 스스로 인정하듯이 성부 고난설의 이단이다. 하나님은 확실히 그분의 무소부재하심 안에서 거기 계셨지만,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이 아니시며, 성부는 분명히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지 않으셨다. CRI는 “뚜렷하게 아들의 활동들인 것도…또한 아버지의 운행하심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들은“위격들 간에는 상호왕래(intercommunion)가 있으며, 한 신성한 위격이 다른 두 위격 안에 내재하는 실재가 있다. 바로 이 때문에 한 위격의 고유한 일을 다른 두 위격 중 하나에게 귀속시키는 게 허용 된다.…”(22)는 진술을 승인한다는 취지로 인용해 싣는다. 그러나 다시 반복하지만 이것은 신격 안의 서로 다른 구성원들의 서로 다른 역할들과 행동들을 혼동한 것이다. 예를 들어, 성부는 우리의 죄들을 위해 죽지 않으셨고, 성자께서 성부에게서 나오시는 것과는 달리 영원토록 성부는 성자에게서 나오시지 않는다.

우리는 별도의 글에서 성부 고난설이라는 사실무근의 정죄를 다룰 것이다.2 이 글은 위 단락에 언급된 세 개의 인용문들을 취급하는 가이슬러와 로우즈의 방식이 어떤 이유에서 빈약하고 심지어 부정직한 변증론의 전형적인 예가 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첫 번째 인용문에 관하여—“삼위일체의 어떤 인격도, 어디를 가시든 무엇을 하시든, 다른 두 인격들의 임재와 관여 없이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1.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이 진술을 지방 교회측의 진술로 제시한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다. 우리가 이 진술의 기조에 동의하는 건 사실이지만, 이 진술은 우리가 한 말이 아니라 밀러가 한 말이다.
  2.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의도적으로 한 문장의 일부만 떼어 인용한 다음, 그 떼어낸 부분을 가지고 이단이라고 공격한다. 더구나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밀러의 주장의 실제 핵심이라 할 대목을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 곧 공개 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이 위트니스 리가 말한 이백 사십여 단어로 된 단락에서 고작 여덟 단어––“…신격 전체인 삼일 하나님께서 육체가 되셨다’(“…the entire Godhead, the Triune God, became flesh”)––만 인용하여 그가 말한 것을 왜곡해 전달했음을 지적한 밀러의 문제제기를 간과한다. 밀러는 다음과 같이 썼다.
  3. 그 단락의 맥락은 분명히 또 오로지 삼위일체의 상호내재를 말하고 있으며, 위트니스 리가 그 여덟 단어를 쓴 것은 그런 의미로, 오직 그런 의미로만 그렇게 한 것이다. 삼위일체는 한 존재이므로 삼위일체의 어떤 인격도, 어디를 가시든 무엇을 하시든, 다른 두 인격들의 임재와 관여 없이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어떤 저자가 완전히 인용되지 않은 문장에 근거해 정죄될 때 분별 있는 독자라면 뭔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경각심을 기울일 것이다. 이 경우 더 추가적인 조사를 통해 입증된 것은, 저자가 쓴 본문의 앞뒤 문맥이 무시되었다는 것이다.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밀러의 글을 공격하면서, 밀러가 주의를 환기시켰던 것과 정확히 똑같은 잘못을 범한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들은 거듭해서 크리스천 리서치 저널 논문이 소개한 위트니스 리의 진술문들을 조각조각 떼어다가 저자의 의도나 원래의 내용과 무관하게 그들 자신의 입맛대로 그것들을 왜곡시킨다.

  4. 상호내재(그리고 유사한 헬라어인 페리코레시스)는 신격의 셋의 상호내주를 가리킨다. 요한 복음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분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는 그분 안에 계심을 거듭해서 말씀하셨다(10:38; 14:10-11, 20; 17:21, 23). 요한 복음 10장37절-38절과 14장10절에서, 주님은 이 상호내재에 근거해 그분께서 아버지의 일을 하고 계시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거하심을 통해 그분의 일을 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밀러가 한 진술과 정확히 일치하고, 밀러는 바로 이것에 근거해 그런 진술을 했다.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요한 복음에서 발견되는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내재에 대한 계시와, 신성한 삼일성의 셋은 완전히 독립적인 일들을 수행하고 계신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다. 대신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창조와 관련을 맺고 계심을 가리키는 의미로 하나님은 “그분의 무소부재하심 안에서 거기 계셨다”고 말할 뿐이다. 상호내재는 요한 복음의 위 절들에서 보듯이 아버지와 아들께서 서로 안에 거주하시는 것이다. 사실,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신격의 셋이 서로 안에 거주하심을 수용하는지에 관한 자신들의 분명한 입장을 표하지 않는다.3
  5. 저명한 성경 교사들, 가령 밀리아드 에릭슨(Millard Erickson), 코넬리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 카알 F. H. 핸리(Carl F. H. Henry), 고오든 루이스(Gordon Lewis), 부르스 데마레스트(Bruce Demarest), 윌리암 레인 크레이그(William Lane Craig), 로레인 뵈트너(Lorraine Boettner)등도 밀러와 유사한 진술을 해 왔다(이 책 안에 있는 “신성한 삼일성의 셋이 함께 일하심을 확증하는 학자들” 을 보라).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이들을 성부 고난설을 가르친다고 비난할 셈인가?

두 번째 인용문에 관하여—“CRI는, ‘뚜렷하게 아들의 활동들인 것도…또한 아버지의 운행하심이다.’ 라고 주장한다”:

  1.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이 인용문의 출처가 CRI 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언급은 재차 부정확하다. 밀러가 자신의 글에서 분명하게 밝혔듯이, 그 글은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 편집부와 지방 교회측 대표들이 풀러 신학교의 교수 조사단을 위해 준비한 자료에서 인용된 것이다.
  2.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원래의 진술문을 문맥에서 떼어놓고, 또한 부정확하게 임의로 선택한 단어들만 인용해 진술문의 원 의미를 희석시켰다. 원래의 진술문은 다음과 같다.
  3. 요한복음 14장 10절은, 삼일성 안에서 볼 수 있는, 한 위격의 행동으로 명백히 드러나는 것과 세 위격의 분리될 수 없는 운행들에 내포된 미묘한 차이를 가장 잘 포착하고 있는 듯하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그대가 믿지 않습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분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요 10:10). 아들은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기 때문에, 즉 아들과 아버지께서 상호내재 하시기 때문에, 분명하고도 뚜렷하게 아들의 활동인 것(“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도 또한 아버지의 운행하심(“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분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이라 할 수 있다.

    진술문의 내용에서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비판한 대목은 요한복음 14장 10절에 대한 설명 부분이다. 위 말씀에서 주님 자신이, 그분께서 아버지와 상호 내재하시는 것(“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는 것”)과 그분의 말씀하심이 그분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의 일하심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연결 지어 말씀하신다.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앞뒤 문맥을 무시한 채 이 인용문을 떼어냄으로써 요한 복음 14장 10절에서 주님 자신이 하셨던 말씀의 취지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만일 그들이 요한 복음 14장에 대한 이 주석에 오류가 있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밀러를 끌어들이는 대신 정면으로 지방 교회측에 문제를 제기했어야 했다. 더구나 요한복음 14장 10절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내재에 관한 주석에 기초하여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측을 성부 고난설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심각한 논리의 비약이다.

세 번째 인용문에 관하여—“그들은(CRI)‘위격들 간에는 상호왕래(intercommunion)가 있으며, 한 신성한 위격이 다른 두 위격 안에 내재하는 실재가 있다. 바로 이 때문에 한 위격의 고유한 일을 다른 두 위격 중 하나에게 귀속시키는 게 허용된다…’는 진술을 승인의 취지로 인용해 싣는다.”:

  1.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CRI 가 찬성의 의미로 인용했던 진술문이 위트니스 리 또는 지방 교회측이 작성한 것이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LSM)와 지방 교회측이 풀러 신학교에 제출하기 위해 만들었던 자료에서 인용된 것이긴 하지만, 원 출처는 존경 받는 침례교 신학자인 아우구스투스 스트롱(Augustus H. Strong)이다. 스트롱의 『조직 신학』에서 인용되었고, 이어서 밀러의 글에서 재차 언급된 단락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2. 이렇게 본질이 하나인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명해 준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각각의 위격성(personality)과 관련 서로 구별되는 실체(subsistences)들이시지만, 위격들 간에는 상호왕래(intercommunion)가 있으며, 한 신성한 위격이 다른 두 위격 안에 내재하는 실재가 있다. 바로 이 때문에 한 위격의 고유한 일을 다른 두 위격 중 하나에게 귀속시키는 게 허용되고… 한 위격의 나타남이 다른 위격의 나타남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처럼 상호왕래와 관련해서 성경에 나타난 것을 대할 때 우리는 그분들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 구분 지어 칭해지시는 것을 보고 그분들이 서로 분리되어 계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상호 왕래는 또한 고린도 전서 15장 45절(“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과 고린도 후서 3장 17절(“주님은 그 영이십니다.”)에서 보듯이 그리스도를 ‘그 영’으로, 그 영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지칭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된다. 거룩한 삼일성의 위격들은 분리된 개체들이 아니시다. 각 위격은 다른 두 위격들을 포함하시며,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두 위격들의 오심이다. 그러므로 그 영의 오심은 아들의 오심을 포함했음이 분명하다.4 [굵은 글씨체 부분은 가이슬러와 로우즈의 글에 인용된 부분이다. 나머지는 생략되었다.]

  3.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그 이후의 비평에서 동일한 스트롱의 인용문을 자신들도 찬성한다는 취지로 다음과 같이 인용해 소개하고 있다:
  4. 왜냐하면 스트롱도, “위격들 간에는 상호왕래(intercommunion)가 있으며, 한 신성한 위격이 다른 두 위격 안에 내재하는 실재가 있다. 바로 이 때문에 한 위격의 고유한 일을 다른 두 위격 중 하나에게 귀속시키는 게 허용되고….”라고 말하고 있는데 올바른 지적이다.

    그들의 위선은 놀랄 만큼 명백하다. 그들은 인용 출처를 잘못 짚은 후, 자신들이 쓴 비평의 글의 한 부분에 그 인용문을 실어 성부 고난설의 증거라고 들이대며 정죄하고, CRI 도 “승인의 취지로” 그것을 인용했다고 정죄하더니, 이번에는 저자를 바르게 인식한 후에는 같은 비평의 글 속에서 정확히 동일한 인용문을 추천하고 있다. 마치 그들에게는 어떤 사람이 말한 진리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가 중요한 듯하다. 어떤 인용문이 위트니스 리나 지방 교회측에 귀속된 것으로 볼 때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그것을 정죄한다. 그런데 동일한 인용문이 존경 받는 침례교 신학자가 쓴 것으로 밝혀질 때는 그들의 승인을 얻고 있다.

  5. 더구나 그들이 스트롱의 글을 인용한 부분은 심지어 정확하지도 않다. 스트롱은 ‘상호왕래’(“an intercommunion”)라고 했지 상호교통(“intercommunication”), 이라고 하지 않았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신성한” 이란 말도 빠뜨렸다. 이것은 쟁점이 된 주제와 다른 사람의 말을 다룰 때 그들이 매우 부주의하고 거만하게 다룬다는 것을 추가적으로 입증해준다. 더구나 그들은(지방교회측이)풀러 신학교에 제출한 답변서와 그것이 인용되어 실렸던 크리스천 리서치 저널 기사에 각각 게재되었던 스트롱의 글 상당부분을 생략해 버렸다. 스트롱은 그 생략된 부분에서 특히 고린도전서 15장 45절과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대해 논평했는데 위트니스 리가 말한 것과 거의 동일한 기조였다.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이 불편한 부분을 생략해 버리고 위트니스 리의 말에 대해 “양태론적인 인상”을 준다고 정죄했던 것이다.

결론

우리는 한 단락에서 뽑아 온 세 인용문들을 간략히 분석하면서, 각 인용문의 출처가 잘못되고 부당하게 제시된 것을 보았다. 밀러가 말한 것이 지방 교회들이 한 말로 뒤바뀌었다.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와 지방 교회측이 쓴 것은 CRI가 쓴 것이 되었다. 스트롱이 말한 것이 처음에는 지방 교회측의 말로 여겨져 공격을 받더니만, 나중에는 스트롱이 말한 것으로 바로 잡혀지자 변호되었다. 독자들은 세 인용문들이 이처럼 잘못 다뤄진 것을 볼 때 가이슬러와 로우즈의 분석이 과연 믿을 만하고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법하다.


각주들:

1가이슬러와 로우즈가 “지방 교회측(LC)은 성부 고난설을 배척한다는 의심스러운 주장을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거나 아니면 엄연한 사실을 냉담하게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지방 교회들은 결코 성부 고난설을 지지한 적이 없으며,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는 1976년 초에 성부 고난설의 오류를 폭로하는 영문 소책자를 출판한 적이 있다(롼 캥거스의 양태론, 삼신론 또는 성경에 따른 삼일 하나님에 관한 순수한 계시 (Anaheim, CA: Living Stream Ministry, 1976), pp. 3-4, 23-24).

2이 사이트의 “아들의 일하심 안에 아버지의 관여하심을 부인하는 오류” 를 보라.

3이것은 이 사이트에 있는 “아들의 일하심 안에 아버지의 관여하심을 부인하는 오류” 에서 충분히 다뤄지고 있다.

4Augustus H. Strong, Systematic Theology (Old Tappan, NJ: Revell, 1960, c1907), pp. 33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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