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서한”에 대한 노먼 가이슬러와 론 로우즈의 변증과 ‘크리스천 리서치 저널’(Christian Research Journal)의 지방 교회들 재평가에 대한 그들의 비평에 답변함 [영어 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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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증과 비평:크리스천 사상저널』 (Affirmation & Critique: A Journal of Christian Thought) [영어 사이트] (A&C) 안에 소개된 신앙 고백서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성경을 완전한 계시이자 유일하게 신성한 계시로 보며, 하나님은 영원히 한 분이시고 또한 영원히 아버지, 아들, 그 영이시며, 이 셋은 구별은 되나 분리되시지는 않는다고 굳게 믿는다….우리는 삼일성의 세번 째이신 그 영께서 동등하게 하나님이심을 믿는다.1
가이슬러는 『확증과 비평』의 편집장인 롼 캥거스(Ron Kangas)에게 보낸 편지에서, 삼일성에 관한 이러한 선언문이 정통이 아니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만일 귀측이 제시한 ‘신앙고백문’을 정통으로 인정받고자 했다면, 귀측은 왜 삼일성의 세 구성원들을 지칭하는 용어인 ‘인격’(person)이란 말을 빠뜨렸는가? 정통이 되려면 귀측은 “세(인격)은 구별은 되나” 라고 말했어야 했고, 또 “우리는 삼일성의 세 번째(인격)을 고백한다”라고 말했어야 했다.”2
따라서 신성한 삼일성의 셋을 말할 때 ‘인격들’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은 신앙고백문은 그 어떤 것이라도 가이슬러가 보기에는 정통이 아닌 셈이다. 더구나 가이슬러는 론 로우즈와 공동 서명한 글에서, 위트니스 리가 했던 다음과 같은 진술을 근거로,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을 이단으로 매도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그영은 분리된 세 인격이나 세 하나님들은 아니시다. 그분들은 한 분 하나님, 한 실재, 한 인격이시다.3
그들은 원래 문맥을 감안하지 않고 이 진술만 따로 발췌하여 이단임을 드러내는 증거로 제시하고, 하나님을 ‘한 인격’으로 말하면서 또 ‘세 인격들’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모순이라고 주장한다:
일단 ‘비모순의 원리’를 포기하면, 지적 추론에 의한 확증 또는 부인, 정통이냐 비정통이냐의 분별을 위한 근거가 상실되게 된다. 하나님께서 동시에 그리고 동일한 의미에서 오직 한 인격이시면서 또한 세 인격들이 되시는 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존재론적인 삼위일체에 있어서 하나님은 유일한 한 인격이시자 또한 세 인격들이시라고 주장하면서도 둘 사이의 의미적 차이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지방 교회측 인도자들 역시 하나님은 세 인격들이시지만 본질적인 존재 안에서 오직 한 인격이시라고 주장하면서도 둘 사이를 구별짓는 참된 차이가 무엇인지 밝히지 않는다.4
가이슬러와 로우즈의 비판은 다음과 같이 여러 면에서 결함이 있음이 드러난다:
- 아버지와 아들과 그영에 관련된 ‘인격’이란 용어는 성경 용어가 아니며, 성경의 계시를 설명해 보려고 고안된 것이었다.
- 많은 신학자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을 말하기 위해 ‘인격’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 ‘인격’이라는 용어의 문제점 중 일부는 그 말이 일상어로 쓰이기 시작했을 때, 의미하는 바가 전반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 ‘인격’에 대한 오늘날의 이해는 삼신론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 한 하나님(the one God)을 단수적 의미의 한 인격으로 말할 수 없다는 가이슬러의 주장은 성경의 기록과 모순된다.
-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생략했던 본문 안에서 위트니스 리는 자신이 ‘한 인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어떤 ‘의미’로 그랬는지를 분명하게 진술했다”.
-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위트니스 리의 저서에서 잘라 낸 인용문에는 반 틸(Cornelius Van Til)의 진술문들에 적용한 것과는 다른 진리의 기준을 적용한다.
- 하나님을 지칭하기 위해 단수형의 ‘인격’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정죄하는 가이슬러와 로우즈의 입장이 일관성을 갖추려면, 존경받는 다른 많은 교사들과 주님의 종들이 하나님을 ‘인격’으로 말해 온 것도 정죄해야 할 것이다.
- 가이슬러와 로우즈의 비판은, 가이슬러 자신이 내린 ‘인격성(personhood)’의 정의와,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지칭한지 아무런 설명도 덧붙이지 않으면서 그들 자신이 하나님을 단수의 인격으로 지칭하는 사례들과도 위배됨이 드러난다.
-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하나님의 본성과 관련, 위트니스 리의 인쇄된 저술들에서 소개된 유용한 증거들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을 거부한다.
인격은 성경 용어가 아님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한 본질, 세 인격”(one essence, three Persons)이라는 공식을 내세우지만, 이것은 성경의 표현이 아니다. 에딘버러 대학의 기독교 교의학 교수인 토마스 F. 토렌스(Thomas F. Torrance)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성경의 전통 그 자체, 즉 신 구약 성경 안에는 ‘인격’ 이라는 명시적인 개념이 없다….5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저명한 침례교 신학자’로 소개한 바 있는 아우구스투스 스트롱(Augustus H. Strong)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격’이란 용어는 진리를 대략적으로 나타낼 뿐이다. 이 단어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에 관하여 성경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개념을 다른 어떤 단어보다 더 근접 하게 표현한 면이 있긴 하지만, 성경에서 사용된 단어 자체는 아니며,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인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베드로와 바울과 요한을 인격이라 지칭할 때와 같은 통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제한된 의미로 사용한다.6
달라스 신학교 신학부 교수인 스캇 호레엘(J. Scott Horrell)은 다음과 같이 썼다:
하나님에 관해 말할 때 본성(nature)이라는 용어가 어렵다면, 인격(person)이라는 용어는 훨씬 더 복잡하다. 근대 및 탈근대에 들어 그 개념이 더 현저하게 다양화되었지만, 옛적에 터툴리안과 캅바도키아 교부들과 어거스틴과 아퀴나스 같은 신학자들도 인격에 대한 개념을 서로 달리한 바 있다.7
천주교 신학자이자 옥스포드 대학에서 역사와 교리를 가르치는 강사인 토마스 웨이난디(Thomas Weinandy)가 최근에 펴낸 책에 따르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인격들’로 지칭하는 것이 적합한지에 대해서 현대 신학자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토론이 진행되고 있다.8
인격이란 용어와 관련한 문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존 웨슬리는 1775년 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 ‘삼위일체’(Trinity)나 ‘인격’(Pers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라 고 감히 강요하지 않는다. 나 자신은 더 좋은 용어를 알지 못하기에 그 말들을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 용어들을 사용하기를 꺼려한다면, 감히 누가 그런 용어들을 사용하라고 그에게 강요할 것인가? 나는 할 수 없다.9
가이슬러는 그런 자제력을 보여주지 않는다. 『확증과 비평』지의 신앙고백문이 ‘인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하면서, 가이슬러는 비성경적인 시금석을 정통성의 기준으로 적용한다. 가이슬러가 볼 때, 신격의 셋 사이의 구별에 관한 어떤 선언도, 만약 ‘인격’이라는 용어를 분명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정통이 될 수 없다. 이러한 그의 기준대로라면, 성경과 사도 신조와 니케아 신조도, 신성한 삼일성의 셋 중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인격’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으니 모두 비 정통으로 정죄되어야만 한다.
용어의 정의에 관한 문제점들
문제는 ‘인격’이라는 용어를 삼위일체에 적용했을 때 그 완전한 신학적인 의미가 분명히 정의되지도 않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의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웨스턴 신학교의 저명한 신학 교수인 밀리아드 에릭슨(Millard Erickson)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이 공식이 4세기에 매우 분명하게 정립되었다. 하나님은 한 실질(substance)또는 한 본질(essence)이시며, 세 인격들(persons)로 존재하신다. 우리에게 있는 어려움은 이 용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 교리가 하나님께서 어떤 점에서는 셋이시고 또 다른 점에서는 하나이심을 말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 둘 사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른다.10
스코틀란드 신학자인 메킨토시(H. R. Mackintosh)도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런 영역에서 쓰이는 용어들은 다소간 임의적인 측면이 있기에, 지칭하는 대상에 적합한 의미를 고려하여 취해져야 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헬라 신학의 ‘휘포스타시스’와 그에 상응하는 라틴어인 ‘페르소나’는 현재 우리가 통상적으로 인격성(Personality)이란 말을 쓸 때 의미하는 바를 가리키지 않고, 사실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11
스위스의 신학자인 칼 바르트(Karl Barth)는 그의 걸작인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에서 ‘하나됨 안에 있는 셋’(Threeness in Oneness)을 설명하면서, 다음에서 보듯 ‘인격’이라는 개념을 피하고자 했다:
이 단락의 도입부 문장에서 우리는 ‘인격’(person)개념 사용을 피하고자 했다. 그것은 교회 언어로 도입되는 과정에서도 충분히 명료화되지 못했고, 이어 중세기간 전체와 종교개혁 이후의 스콜라철학에서 그 용어를 해석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여전히 의미는 명료해지지 않았으며, 이 논쟁에 인격성(personality)이라는 현대적 개념을 도입한 시도도 오히려 혼돈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12
바르트는 『교의학 개론』(Dogmatics in Outline)에서 추가적으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러나 오늘날 인격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무의식적이고 거의 불가항력적으로, 우리 사람들은 인격이다 라고 말할 때의 그 인격 개념을 떠올린다. 그리고 사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묘사하기에는 인격에 대한 이런 개념만큼 부적절한 것도 없다.13
칼빈 신학교 조직 신학자이자 교장을 역임한 고(故) 루이스 벌콥(Louis Berkhof)도 다음과 같이 썼다:
신격 안에서 이러한 구별들을 말할 때, 헬라쪽 저술가들은 일반적으로는 ‘휘포스타시스’(hupostasis)란 용어와 가끔씩은 ‘수브스탄시아’(substantia)라는 용어를 썼지만, 라틴계 저자들은 ‘페르소나’(persona)라는 용어를 썼다. 전자는 오해의 소지가 있었고 후자는 뜻이 모호했기 때문에, 스콜라 신학자들은 ‘숩시스탄시아’(subsistentia)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이처럼 사용된 용어들이 가지각색인 것은 그 용어들이 늘 불충분하게 여겨졌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인격’이라는 말이 그 개념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14
좀 더 최근에는 핀란드 신학자인 벨리-마티 커케년(Veli-Matti Kärkkäinen)이 다음과 같이 썼다:
‘페르소나’ 라는 용어에 관한 역사와, 그 말을 삼위일체 용어로 써온 사실은 여러 글에서 다루어졌다. 그 용어의 윤곽은 모호하기도 하고 넓기도 하다. 그것의 원래 의미는 연극에서 배우들이 썼던 ‘마스크’ 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마스크 뒤에 감춰진 인간 존재의 ‘실상’ 과는 관련 없는 어떤 것을 지칭한다. 또 다른 극단적 용례는, 근대에 들어 쓰이는 것으로서, ‘페르소나’란 용어가 인간 존재의 ‘실상’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아주 개인적인 뉘앙스까지 띠게 된 점이다….이 용어의 어원이나 고도로 개인적인 뉘앙스를 띠게 된 근대적 의미 모두, 기독교의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해 이 용어를 처음으로 썼던 사람들이 의미했던 바 ‘연합 안의 구별’(distinction-in-unity)이라는 원칙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해할 법하다.15
“인격”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의 문제점들
‘인격’이라는 말이 처음 쓰인 이래, 그 용어를 둘러싼 문제들이 제기되어 왔지만 근대에 이르러 어려움이 가중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 용어가 통속어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별개로 분리된 각각의 의식 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쓰여 왔기 때문이다.16 로마 가톨릭 신학자인 월터 캐스퍼(Walter Kasper)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적인 논쟁들(해석학적 논쟁 및 종교의 역사와 교리에서 비롯된 논쟁)을 제쳐 놓고 그 가르침의 내용에 직접 기초한 논쟁들을 고찰한다면, 그 때는 하나의 반론이 그외의 다른 것들보다도 더 중요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인격에 부여된 현대적 주체성과 현대적 인격 개념에서 비롯된 반론이다. 현 시대에서 인격은 더 이상 신의 존재와 관련된 의미로 이해되지 않고 대신에 하나의 자의식을 가진 행동의 자유로운 중심과 개별적인 인격성(personality)으로 정의된다.17
토마스 토렌스(Thomas F. Torrance)역시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러나 일단 ‘인격’이라는 개념이 인간 관념의 흐름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에서 늘 활용되는 개념이 되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자신만의 독립된 역사를 갖는 경향을 띠게 되고, 또 문화에 따라 의미의 변주가 있기는 하겠지만, 사람들 생각 속에 인격 하면 아 그것하고 떠올리게 되는 일반적인 개념을 형성하는 경향도 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겠다. 그렇지만 원래의 신학적 의미가 아닌, 인격이라는 용어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형성되어 현재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그 개념에 비추어 거룩한 삼위일체 교리 안에 있는 ‘인격’의 의미를 해석하려 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오류를 범하는 것일 게다.18
‘인격들’이 삼신론으로 빠질 수 있다는 우려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위트니스 리가 가르친 본문을 완전히 무시한다. 엘리옷 밀러(Elliot Miller)가 『크리스천 리서치 저널』에 게재한 논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위트니스 리는 ‘인격’ 개념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구별되실 뿐만 아니라 또한 분리되신다고 보는 삼신론, 곧 사실상 세 하나님을 믿는 데로 서방의 믿는 이들을 잘못 이끌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거기에 반응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위트니스 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분리된 세 인격들 또는 세 하나님들이 아니시다”라고 말했던 이유이다. 일부 저명한 서방 신학자들도 위트니스 리와 같은 우려를 표한 바 있다. 예를 들어, 달라스 신학교 창립에 기여했던 그리피스 토마스(W. H. Griffith Thomas)도 다음과 같이 썼다:
‘인격’이라는 용어에도 때로 이의가 제기된다. 인간의 모든 언어가 그러하듯이, 인격이라는 용어도 부적절한 용어라는, 심지어 그 용어를 쓰는 것은 명백한 오류라는 비난을 받기 쉽다. 확실히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삼신론에 빠지게 된다. 신격의 셋을 구분하는 의미로 그 용어를 사용하긴 하지만, 그것은 분리됨을 뜻하는 구분이 아니라, 본질적인 상호 내재 또는 상호 포함과 관련된 구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질’과 ‘인격’ 같은 용어를 사용하게 되더라도, 그런 것들을 우리가 이해하는 인간의 본성 혹은 인격성과 동일한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런 용어들은 대상의 특징을 정확히 설명해주지 못하며, 대략적으로만 옳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본성을 규정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필연적으로 그럴 수 밖에 없다.19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자신들의 글에서 저자를 밝히지 않고 위 단락의 일부를 인용한 후, 마치 그것이 위트니스 리 본인의 말인 것처럼 비판하였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 이것과 모순됨을 드러낸다. “사실상 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설명하기 위해 ‘세 인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 역시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은데, 그것은 ‘세 인격’은 실제로 세 인격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언어가 그러하듯이, 인격이라는 용어도 부적절한 용어라는, 심지어 이 용어를 쓰는 것은 명백한 오류라는 비난을 받기 쉽다. 확실히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삼신론에 빠지게 된다….”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이 인용문의 후반부가 사실 위트니스 리가 그리피스 토마스의 글을 인용한 것임을 그 어디에서도 독자들에게 밝히지 않는다.
그리피스 토마스의 우려는 토마스 웨이난디(Thomas Weinandy)에 의해 반향되었다:
삼위일체론자들은 ‘인격’이라는 용어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게 적용했을 때, 그것이 부적절하거나, 더 나쁘게는 잘못된 함축적 의미를 전달할까봐 우려한다. 로크 이후 그리고 칸트 이후의 철학적 배경에서 인격 개념이 변화되었다는 점을 알지 못한다면, 세 ‘인격들’하면 세 주관적인 개별적 자의식이 함의되므로, 이 용어를 하나님께 적용할 때 사람들은 세 하나님을 떠올리는 삼신론으로 이끌려지지 않겠는가?20
위트니스 리는 여러 번 하나님을 세 인격으로 말했지만, 가이슬러와 로우즈와는 달리, 그는 균형잡힌 방식으로 그 용어를 둘러싼 쟁점들을 설명하는데 주의를 기울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21
노먼 가이슬러의 입장은 성경과 모순된다
가이슬러가 출판한 책 내용에 따르면, ‘하나의 인격’(one person), ‘한 인격’(a person), 또는 심지어 ‘인격의’(personal)등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을 단수의 의미로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22 이러한 입장은 성경에서 계시된 진리의 ‘정통성’ 여부를 판별할 기준으로 외적인 기준을 들이대는 시도이다. 따라서 가이슬러가 “한 본질, 세 인격”(one essence, three Persons)또는 “한 본성, 세 인격”(one nature, three Persons)의 공식을 인용할 때, 그는 그러한 단어들을 삼일 하나님의 본성의 비밀을 성문화하려는 좁고 배타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하나님께서 한 본질과 세 인격을 소유하셨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께서 한 ‘무엇’(what)과 세 ‘누구들’(whos)을 소유하심을 뜻한다. 세 누구들(인격들)각각은 같은 무엇(본질)을 공유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복수의 인격들을 지니신 하나의 통일적 본질이시다. 각 인격은 다르나, 여전히 하나의 공통 본성(nature)을 공유하신다.23
가이슬러의 설명은 그 자체가 모순된다. 하나님께서 “한 본질, 세 인격”을 소유하신다고 말한 직후에, 가이슬러는 하나님을 단수 인격 대명사인 ‘그분’(he)으로 지칭한다.
이 논문에 인용된 신학자들이 증명한 것처럼, 문제는, 가이슬러의 정의가 세 인격들 중에 있는 하나(oneness)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의문에 답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한 본성, 세 인격”, 또는 “한 본질, 세 인격” 이라는 표현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위트니스 리는 종종 그런 용어들을 사용했다. 오히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인간 언어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수 세기에 걸쳐 신학자들이 그 용어들의 의미를 한정하고 명료화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가이슬러는 그런 용어들이 삼일 하나님의 비밀을 충분히 설명하기에 적절한 공식이라고 교리적으로 강변한다는 점이다. 본질(essence)과 본성(nature)모두 보통은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개념으로 이해되며, 여전히 우리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묘사하지는 못한다. 밀리아드 에릭슨(Millard Erickson) 은 가이슬러의 진술에서 분명히 드러난 동일한 잘못을 다음처럼 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은 단일의 존재(a unitary being)이시다. 가끔씩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본성은 어느 정도 느슨하게 함께 묶여진 한 묶음의 속성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의 속성(a attribute)또는 하나의 술어(predicate)가 아니시다. 그분은 살아있는 한 인격, 한 주어(subject)이시다.24
가이슬러의 ‘무엇’과 ‘누구’사이의 구별이 하나의 산뜻한 공식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성경이 계시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성경은 반복해서 하나님을 ‘나’와 ‘내게’와 ‘그분’과 ‘그분에게’로 지칭한다. 여기에 쓰인 인칭 대명사들을 어떤 추상적인 본질이나 본성이나 ‘무엇’에 적용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창세기 1장 26절과 27절은 이렇게 말한다. “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모양을 따라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여기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대명사는 ‘우리에게’와 ‘우리의” 라는 복수형에서 ‘그분’과 ‘그분의’라는 단수형으로 전환되지만, 그것은 항상 한 인격이 말하고 행동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나는 이다’(I Am)로 지칭하셨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출애굽기 20장 2절과 3절에서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셨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단수 인격 명사로 지칭하신다. 사실 ‘나는 이다’(the I AM)이신 분으로서 하나님은 단지 한 인격(a person)만이 아니시라 그 인격(the Person)이시다. 피할 수 없는 결론은 하나님을 한 인격으로 말하는 성경이 틀렸던지 아니면 가이슬러가 틀렸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8장 19절은 삼위일체에 관한 가장 분명한 계시들 중에 하나이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가서, 모든 민족들을 나의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안으로 침례를 주고” 여기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한 이름을 가지신다. 이 절에서 ‘이름’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단수형인데 같은 단어가 사도행전 1장 15절에서 ‘사람들’(persons)을 가리키는 복수형으로 쓰였다.25 마태복음 28장 19절에 따르면, 사람들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안으로 침례주는 것은 단지 침례 의식 때에 암송되는 공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어 영접한 사람들을 삼일 하나님의 신성한 인격의 실재 안으로 잠기게 하는 행위이다. 이런 이유로 위트니스 리는 신약 회복역 [영어 사이트] 성경에서 마태복음 28장 19절에 있는 ‘이름 [영어 사이트] 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각주 [영어 사이트] 를 달았다:
여기서 신성한 삼일성의 이름은 단수이다. 그 이름은 신성한 존재의 총체이며, 그분의 인격과 동등하다. 어떤 사람을 삼일 하나님의 이름 안으로 침례주는 것은 그 사람을 삼일 하나님의 온 존재 안으로 잠기게 하는 것이다.
노먼 가이슬러가 생략했던 위트니스 리의 진술문 내용
가이슬러와 로우즈, 그리고 공개 서한에 서명한 그외의 사람들은 위트니스 리가 삼위일체의 ‘정통’ 가르침과 의도적으로 위배되게 하나님은 한 인격이시라고 가르친다는 증거로서 그의 방대한 사역물 중에서 한 문장을 끄집어 내어 제시한다. 앞뒤 문맥을 살펴 볼 때, 이 문장은 마태복음 28장 19절을 강해한 다음 글의 일부인데, 거기에서 하나님은 삼일, 곧 한 이름을 가지신 셋-하나의 인격이라고 분명하게 밝혀진다:
삼일 하나님에 관한 계시는 신약 전체에 걸쳐 발견된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방인들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안으로” 침례주라고 명령하셨다. 이 구절에서 ‘이름’은 단수이지만, 하나의 이름은 세 인격을 가리킨다.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에게 한 이름이 있음을 보여준다(신약 회복역 성경 마태복음 28장 19절 각주 3, 4를 보라). ‘인격’이라는 용어는 종종 신성한 삼일성의 셋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되지만, 우리는 그런 용어를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한다…
아버지, 아들, 그 영은 분리된 세 인격들 또는 세 신들이 아니시다. 그분들은 한 하나님, 한 실재, 한 인격이시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한 이름으로 지칭된다. 이름은 인격을 가리키고, 인격은 그 이름의 실재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이름은 신성한 존재의 총체이며, 그분의 인격과 동등하다. 하나님은 삼일이시다. 즉, 그분은 셋-하나이시다. 몇몇 신학적 저술들에서는 하나 안의 셋(three -in-one)이란 표현을 만들기 위해 하나와 셋 사이에 안의 라는 단어가 더해졌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셋-하나이시라고 말하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이다.26
이 단락에서 위트니스 리는 “하나의 이름은 세 인격을 가리킨다”(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이 부분을 인용하지 않음)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분리된 세 인격들이 아니시다”(그들은 이 부분을 문맥에서 떼어 내어 인용함)둘 다를 말했다.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위트니스 리가 하나님께서 ‘세 인격’이시라고 말할 때와는 다른 의미로 하나님은 ‘한 인격’이시다 라고 말할 때, 그 다른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히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보기에 그것은 납득할 수 없는 모순인 셈이다. 사실 위트니스 리는 아버지, 아들, 그 영, 곧 “신성한 삼일성의 이름”은 “신성한 존재의 총체이며, 그분의 인격과 동등하다.” 라고 말했다. 가이슬러와 로데스는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 신성한 존재의 총체” 즉 그분의 인격이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것인가? 그들은 ‘이름’을 단수형으로 사용하는 것이, 성경에서 ‘이름’이 사용될 때의 그 의미로 전체 하나님은 한 인격이시다 라고 말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셈인가?
일관되지 않는 진리의 기준
잠언 20장 23절은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을 평가하면서 일관되지 않는 평가 기준을 사용하는 것은 다른 저울을 사용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이슬러와 로데스가 위트니스 리는 정죄하는 반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변증학과 조직신학 교수를 역임한 고넬리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이 하나님은 한 인격이시라고 말한 것은 정죄하지 않았을 때 그들이 보여준 태도다. 반 틸은 다음처럼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 문제에 대한 전체 진리는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즉, 신격 전체가 한 인격(one person)이시다 라고 단언한다….다른 모든 존재, 곧 모든 피조물들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하나의 숫적인 동일성(numerical identity)을 현시함을 신앙으로 간직해야만 한다. 심지어 존재론적인 삼위일체 내에서 조차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숫자적으로 하나이시다 라고 주장해야 한다. 그분은 한 인격 이시다. 우리가 한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인격성’(personality)이라는 형용사구가 붙는 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격성을 소유하신 어떤 본질(an essence)이 아니시라….27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의심스러울 때는 선의적으로 유리하게 해석하는 원칙을 적용하여, 반 틸이 하나님을 한 인격으로 주장하는 것은 삼중 인격적인 존재인 신격 전반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고 이해하거나, ‘인격’ 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한 분(as one)으로서의 하나님을 말할 때와 세 분(as three)으로서의 하나님을 말할 때가 정확히 똑같은 것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가이슬러와 로데즈는 “의심스러울 때는 선의적으로 유리하게 해석하는 원칙을” 위트니스 리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 그건 그렇다치고 반 틸이 “삼중 인격적인 존재로서의 신격 전반”을 말한 것으로 관대하게 해석한 그들의 태도도 터무니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반 틸은 자신이 ‘전체 신격’을 말하고 있다고 명확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참된 의문점들은 다음과 같다:
- ‘전체 신격’(the whole Godhead)이라는 반 틸의 말과 “신성한 삼일성의 이름은 신성한 존재의 총체이며, 그분의 인격과 동등하다.” 라고 한 위트니스 리의 분명한 진술은 어떻게 다른가?
- 신격 전체(the Godhead overall)(가이슬러와 로우즈가 인정한)와 “신성한 존재의 총체”라는 말은 무엇이 다른가?
-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어떻게 반 틸이 “삼중 인격적인 존재인 신격 전체”를 말하고 있다 고 추정하여 반 틸의 견해를 정당화하면서, “신성한 존재의 총체”를 말한 다음 그것을 ‘셋-하나’라고 분명하게 설명한 위트니스 리는 정죄할 수 있는가?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비정통이며 공통의 신앙 밖에 있다고 매도하고 싶어하는 위트니스 리의 유사한 진술을 비판할 때와는 달리, 이름있는 신학교 출신의 저명한 개혁 신학자인 고넬리우스 반 틸의 주장을 평가할 때는 “다른 저울추”를 적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한 인격이신가?-–다른 사람들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가이슬러가 ‘삼일 하나님 전체가 한 인격이시다’라는 가르침을 정죄하려면,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단수적 의미의 한 인격으로 말했던 저명한 다른 여러 성경 교사들도 정죄해야만 한다.
달라스 신학교 창설자인 루이스 스페리 쉐퍼(Lewis Sperry Chafer):
…성경은 하나님의 본성과 특성을 지속적으로 제시한다. 그분은 인격성(personality)에 속한 기능들(faculties)과 구성 요소들을 지니신 한 인격이시다.28
칼 바르트(Karl Barth):
한 인격—즉 알고, 자원하고, 행동하는 나—의 정의는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선포된 그분의 인격이 고백될 때의 그 의미, 곧 사랑하시는 분이시자(그분 자신의 방식으로 살고 계신)그런 분으로서 그 인격(the person)이시라고 할 때 부여되는 그 의미만을 지닐 수 있다.29
존경받는 개신교 철학자이자 노틀 담 대학교의 철학 교수인 알빈 플랜틴가(Alvin Plantinga):
만일 하나님이, 아시고 바라시고 행동하시는, 살아 있고 의식 있는 존재시라면, 즉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한 인격이시라면, 그 경우 하나님은 어떤 특성이나 상태나 성향이나 명제나 다른 어떤 추상적인 사물이 아니시다.30
존경받는 복음주의 신학자이자 런던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근 30년 동안 설교한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
성경은 하나님께서 한 인격이시라고 말한다. 이 사실은 참된 의미의 경배를 드리는 데 있어서, 또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해 확신감을 갖는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인격이시라고 말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가 꽤 많이 있다. 하나님의 임재가 늘 인격적인 방식으로 묘사되었는지를 주목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가 살펴보았던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보자. ‘나는 이다”(I am)라는 표현, 이것은 인격적인 한 개인이 하는 진술로서, ‘나는 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인격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분 자신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대변자들은 예외없이 하나님은 단지 무의식적인 힘이 아니시라 한 인격이시라고 선포해 왔다.31
빌리 그레함도 “하나님은 한 인격이심”이라는 제목의 단락에서:
하나님은 영이실 뿐 아니라 또한 한 인격이시다. 즉 그분은 우리가 그러한 것과 똑같이, 인격성(personality)을 지니신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돌리는 각 특성을 하나님께도 돌릴 수 있다. 사람(A person)은 느끼고, 생각하고, 갈망하고, 결정한다. 하나님 역시 그러신다. 사람은 관계를 형성한다. 하나님 역시 그러신다. 사람은 행동한다. 하나님 역시 그러신다. 하나님은 느끼신다. 하나님은 생각하신다. 하나님은 동정하신다. 하나님은 용서하신다. 하나님은 소망하신다. 하나님은 결정하신다. 하나님은 행동하신다. 하나님은 판단하신다. 이것은 모두 그분께서 인격이시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런 분이 아니셨다면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을 경배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힘이나 능력이 아니시다. 그분은 한 인격, 곧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완전한 인격이시다.32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스스로도 모순된다
가이슬러와 로데즈의 비판은 ‘인격성’(personhood)에 대한 가이슬러 자신의 정의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자신의 『조직신학』에서 가이슬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격성은 전통적으로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 이해되었다…. 본질적으로 인격성은 하나의 ‘나’, 하나의 ‘누구’, 또는 하나의 주체를 가리킨다. 인격성 그 자체는 그것의 ‘나 됨’(I-ness) 또는 ‘누구 됨’(who-ness)이다.33
그들 스스로의 정의에 근거해 볼 때, 어떻게 가이슬러와 로데스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나’(I) 또는 ‘누구’(who)로 소개되시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더구나 가이슬러 본인이 쓴 변증 백과사전에서 발췌한 다음 내용을 고찰해 볼 때, 그들의 비판은 더욱 납득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야훼는 오직 한 분의 참 하나님을 가리킨다. 다른 어떤 인격이나 사물도 경배나 섬김의 대상이 아니었고(출20:5), 그분의 이름과 영광은 다른 것에게 주어지지 않았다.34
가이슬러가 “다른 어떤 인격이나 사물도….아니었고”라고 했을 때 무슨 의미로 그렇게 말했는가? 이것은 한 분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한 인격이시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 아닌가? 더 흥미로운 것은 가이슬러와 로데즈가 공동 저술한 책에서 했던 다음과 같은 진술이다:
참으로 성경 안에서, 누가 됐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기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는 다른 인격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다.35
더 나아가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한 인격이시다”라는 제목 아래 로데즈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인격은 의식이 있는 존재, 즉 생각하고, 느끼고, 의도하고, 의도한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는 존재이다. 인격은 다른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여러분은 한 인격에게 말을 걸수 있고 반응을 얻어낼 수 있다. 여러분은 그와 느낌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 여러분은 그와 논쟁할 수 있고, 그를 사랑하며, 심지어 그를 미워할 수 있다.
확실히 이러한 정의에 의하면 하나님은 한 인격으로 이해해야 한다.36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어떻게 자신들은 하나님을 단수의 의미로서의 한 인격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정죄할 수 있는가? 이러한 사례들에서, 그들 자신들도 하나님을 한 인격으로 말했을 때의 그 의미와 하나님을 셋으로 말했을 때의 그 의미를 구별하지 못했다?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모든 증거에 관해 언급하기를 거절함
삼일 하나님은 위트니스 리의 사역에서 주된 주제이다. 그의 저술들은 하나님 관련 주제들, 즉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셋의 방면을 가지고 계심, 셋 모두 영원하시며 동일하게 하나님이심, 셋 모두는 영원히 동시 존재 하시면서 상호 내재하심, 양태론과 삼신론의 오류들과 같은 항목들에 관한 철저하고 균형잡힌 주석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37 더구나 많은 곳에서 위트니스 리는 신성한 삼일성의 셋과 관련하여 ‘인격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38 “공개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은 이 사실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더구나 위트니스 리는 30여년도 이전에 기독교 변증 분야의 몇 사람이 자신의 가르침을 왜곡시킨 것에 답변하면서, 그들의 오류를 바로잡고 삼일성에 관한 성경 진리를 제시한 세 권의 소책자을 출판했다.39 그 중 한 책자에서 위트니스 리는 마태복음 28장 19절에 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제시한다:
주님은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모든 민족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안으로 침례를 주고” 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주님은 명시적으로 세 인격, 곧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을 언급하신다. 그러나 주님께서 여기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의 이름을 말씀 하실 때, 이름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문에서 단수형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께서 셋이시지만 여전히 그 이름은 하나임을 의미한다. 세 인격들에게 한 이름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비밀스럽다. 바로 이것이 하나 안의 셋(three-in-one) 또는 삼일(triune)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이다. 40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측을 비판하는 자들은 위트니스 리가 셋 모두가 하나님이시고, 셋 모두가 영원하시며, 그분들은 영원히 동시존재하시고, 영원히 상호내재하신다고 말한 출판물들 중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결코 반응한 적이 없었다. 대신에 그들은 삼일 하나님이라는 주제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방대한 사역물의 직접적인 맥락 및 더 큰 맥락을 도외시하고, 단일 진술문들을 맥락과 분리시켜 따로 떼어 내어 비판의 근거로 삼는 행태를 게속해서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행태는 “공개 서한”의 초안과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쓴 글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비판을 위해 일부 인용문을 잘라 내어 문제삼았던, 『세부분으로 된 사람에게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영어 사이트]이란 책자의 주요 주제에 대해서는 언급조차하지 않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비판하는 인용문은 그 책의 제 5장에 있다. 처음 네 장들은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생명으로 들어오시기를 갈망하신다는 것과, 그분께서 이 목적을 어떻게 성취하시는가의 관점에서 성경 전체의 개관을 제시하고 있다. 위트니스 리가 설득력 있게 제시하듯이, 이러한 관념은 신성한 계시의 중심부를 이룬다. 성경 전체에 걸친 하나님의 목표는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이러한 진리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에 도달하도록 이끌릴 뿐 아니라, 십자가의 주관적인 체험(고후 4:10-12)과 신성한 생명의 교통(요일 1:2-3, 고후 13:14)을 통해 그들 안에 살아계시고(갈 2:20), 그들을 그분의 생명 안에서 구원하시는(롬 5:10) 분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 안으로 이끌리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말함은 신약 사역의 특성을 담지하며(고후3:6, 4:1),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관여하고 있는 것과 같은 공허한 말다툼이 아니다(딤전6:4, 딤후 2:14).
결론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위트니스 리의 진술을 비판한 것은 심각한 결함이 있다. 그들은 비성경적인 기준을 정통성을 판별하는 시금석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인격들 이라는 용어에는, 자칫 삼신론에 빠져들게 할 수 있는 함의들이 담겨 있다고 본 여러 기독교 성경교사들의 우려를 무시한다. 하나님을 ‘한 인격’으로 지칭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성경에 위배되고, 그런 표현과 의미가 성경적인 근거에 밑받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주변 맥락을 도외시한다. 그들의 비판은 한결같지 않은 진리의 기준을 적용한 것이고, 그들 자신의 저술들뿐 아니라, 존경받는 많은 성경 교사들과 주님의 사역자들의 견해와도 충돌한다. 그것은 또한 위트니스 리의 사역 안에 있는 삼일 하나님에 관한 철저하고 균형잡힌 수 많은 주석들을 무시하고 있으며, 믿는 이들을 인도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 안으로 이끄는 그의 사역의 참된 본성과 진의를 무시하고 있다.
각주들:
1 “신앙 고백서,” 확증과 비평, XIII:1, April 2008, p. 2. 신앙고백서 전문은 다음 싸이트에서도 읽을 수 있음 http://www.affcrit.com/st_faith.html.
2 노먼 가이슬러, 2008년 6월 1일 롼 캥거스에게 보낸 편지, 비록 가이슬러가 그런 편지를 보냈다고 주장하나, 롼 캥거스가 그것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3 위트니스 리 , 세 부분으로 된 사람에게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애너하임: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 1996), p. 48.
4 노먼 가이슬러와 로우즈, “’지방교회’ 운동을 변호하는 크리스천 리서치 최근 저널에 대한 답변,” 2009. 12월.
5 토마스 F. 토렌스, The Christian Doctrine of God, One Being Three Persons (Edinburgh: T&T Clark, 1996), p. 155.
6 H. 스트롱, Systematic Theology (Valley Forge, PA: Judson Press, 1907), p. 330.
7 7J. 스콧 호레일, “The Eternal Son of God in the Social Trinity,” Jesus in Trinitarian Perspective, Fred Sanders and Klaus Issler, eds. (Nashville, TN: B&H Academic, 2007), p. 52.
8 토마스 웨이난데, The Father’s Spirit of Sonship: Reconceiving the Trinity (Edinburgh: T&T Clark, 1995), p. 111.
9 존 웨슬리, “On the Trinity” (1775), Sermon 55, 존 웨슬리 전집, vols. 5 and 6, 3rd edition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872, 2002) pp. 200-201.
10 밀리아드 J. 에릭슨, God in Three Persons: A Contemporary Interpretation of the Trinity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5), p. 19.
11 H.R. 메켄토시, The Doctrine of the Person of Jesus Christ (Edinburgh: T&T Clark, 1913), p. 524.
12 카알 바르트, 교회 교의학, I:1: The Doctrine of the Word of God (Edinburgh, T&T Clark, 1936), p. 408.
13 카알 바르트, 교의학 개론 (New York: Harper & Row, 1959), pp. 42-43
14 루이스 벌콥, 조직 신학, 4판.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1939, 1941), p. 87.
15 벨리-마티 커케년, The Trinity: Global Perspectives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7), p. 30.
16 J. N. D. 캘리가 지적한 것처럼, “Persons”이란 말을 삼위일체에 적용했을 때의 사실상의 의미는, 터툴리안이에서 그 용어를 소개한 이래 대폭적인 변화를 겪어 왔다” (, vol. III,을 보라. Alexander Roberts and James Donaldson, eds.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1980), p. 598):
그러므로 터툴리안이 아버지와 함께 한 본체(one substance)로 계신 아들을 말할 때, 그분들이 같은 신성한 본성 또는 본질을 공유하시며, 신격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임으로, 그분들은 사실상 한 동일 존재(one identical being)이심을 의미한다. 한 면으로 πρόσωπον and persona 는 그 셋의 다름(the otherness) 또는 독립된 현존(independent subsistence)을 표현하는데 놀랍도록 적합했다. 원래 ‘얼굴’과 ‘표현’과 역할’의 의미를 가진 이후, ‘프로스폰’은 개인(individual)을 의미하게 되었고, 강조점은 늘 밖의 모양 또는 객관적인 표현에 두어졌다. ‘페르소나’의 원래의 의미는 ‘마스크’였고, 그로부터 마스크를 쓴 배우와 그 배우가 맡은 등장인물로 쉽게 옮겨갔다. 법적인 용례에서 그것은 재산의 권리증을 가진 사람을 가리켰지만, 터툴리안이 사용했듯이 그러한 개인의 구체적인 출현을 의미했다. 어느 경우든, 기억해야 할 점은 오늘날 ‘인격’ 또는 ‘인격적인’ 하면 떠오르는 자의식과 관련된 개념은 전혀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J. N. D.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 (San Francisco: Harper & Row, 1817), p. 115)
17 월터 카스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translated by Matthew J. O’Connell (New York: Crossroad, 1994), p. 285.
18 토마스 F. 토렌스, The Christian Doctrine of God, One Being Three Persons (Edinburgh: T&T Clark, 1996), pp. 159-160.
19 W. H.그리피스 토마스, The Principles of Theology (London: Church Book Room Press, 1956), p. 31.
20 토마스 웨이난디, The Father’s Spirit of Sonship: Reconceiving the Trinity (Edinburgh: T&T Clark, 1995), pp. 111-112.
21 다음은 많은 사례들 중 일부이다:주의 회복의 주요항목에 관한 핵심 요점들,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1-3장, 장로 훈련 제1권 :신약의 사역, 4장, Young People’s Training, 7장. 일부 더 짧은 사례들은 각주 37을 보라.
22 놀만 가이슬러, The Baker Encyclopedia of Christian Apologetics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9), p. 757.
23 놀만 가이슬러, The Baker Encyclopedia of Christian Apologetics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9), p. 732.
24 밀리아드J. 에릭슨, God the Father Almighty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8), p. 231.
25 Conc사도행전 1장 15절에서 사용된 헬라어(ὀνομάτων)에 관하여W. E. 바인은 다음과 같이 썼다: “As standing, by metonymy, for persons, Acts 1:15; 계 3:4; 11:13(회복역 성경, ‘persons’)” (Vine’s Exposition Dictionary of New Testament Words (McLean, VA: Macdonald Publishing, 1985), p. 782).
26 위트니스 리, 세 부분으로 된 사람에게 생명되신 삼일 하나님(Anaheim, CA: Living Stream Ministry, 1996), p. 48. 생략된 본문은 앞에서 이미 인용했던W. H. 그리피스 토마스의 책(The Principles of Theology)에서 발췌한 구절이다(각주 17을 보라).
27 고넬리우스 반 틸,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hiladelphia, PA: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1961), p. 229.
28 루이스 스페리 쉐퍼, Systematic Theology (Dallas, TX: Dallas Seminary Press, 1947), p. 180
29 카알 바르트, 교회 교의학, II:1: The Doctrine of God (Edinburgh: T&T Clark, 1957), p. 284.
30 알빈 플랜틴가, The Analytic Theist, James F. Sennett, ed.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1998), p. 239.
31 말틴 로이드 존스, Great Doctrines of the Bible (Wheaton, IL: Crossway Books, 2003), pp. 55-56.
32 빌리 그레함, The Journey: How to Live by Faith in an Uncertain World (Nashville, TN: W. Publishing Group, 2006), p. 20.
33 노먼 가이슬러, Systematic Theology, vol. 2: God, Creation (Minneapolis: Bethany House, 2003), p. 279.
34 노먼 L. 가이슬러, Baker Encyclopedia of Christian Apologetics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9), p. 129. Ne거의 정확히 똑같은 진술이 노먼 L. 가이슬러와 A. 살리브가 쓴, Answering Islam: The Crescent in Light of the Cross, 2판에 있다. (Grand Rapids, MI: Baker Books, 2002), p. 250; and Norman L. Geisler, Systematic Theology, vol. 2: God, Creation (Minneapolis: Bethany House, 2003), p. 280.
35 노먼 가이슬러와 론 로우즈, When Cultists Ask: A Popular Handbook on Cultic Misinterpretations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7), p. 118. 같은 문장이 노먼 가이슬러와 R. E. 맥켄지가 쓴, Roman Catholics and Evangelicals: Agreements and Differences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5), p. 351에 있다.
36 론 로우즈, The Heart of Christianity (Eugene, OR: Harvest House Publishers, 1996), p. 43.
37 일부 짧은 실례들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삼일 하나님이시다. 한 분 유일하신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영인 세 방면(aspect)이 있으시다. 아버지와 아들과 그영은 모두 하나님이시고, 영원하시며, 동시 존재하시고, 상호 내재하시며 분리될 수 없으시다. –위트니스 리, 진리 공과, 1단계, 1권(애너하임, CA: 리빙 스트림 미니스트리, 1985), p. 23
신성한 삼일성의 셋 가운데는, 구별은 있으나 분리는 없다. 아버지는 아들과 구별되고, 아들은 그영과 구별되고, 그영은 아버지와 아들과 구별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들이 분리되신다고 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분들은 상호내재, 즉 서로 안에 거하시기 떄문이다. 동시 존재 안에서 신격의 셋은 구별되시지만, 그분들의 상호내재는 그분들을 하나로 만든다. 그분들은 상호내재 안에서 동시존재 하신다, 따라서 그분들은 구별은 되시나 분리되지 않으신다.–위트니스 리, 주의 회복의 주요 항목들에 관한 핵심 중점들(애너하임, CA: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 1993), pp. 10-11
양태론은 하나님께서 하나이심을 강조함으로 신격의 셋의 동시존재와 상호내재를 부인하는 이단이다. 또 다른 면에서 삼신론은 하나님의 셋이심을 강조함으로아버지와 아들과 그영이 세 하나님들이라고 가르치는 이단이다. 성경은 이 두 극단들 중 어느 것도 아니다. 성경은 신성한 삼일성의 양면을 증거함으로 그 중간에 서 있다.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진리에 관하여 균형잡혀야 하며 두 이단적인 극단인 양태론과 삼신론을 피해야 한다– 앞의 책, p. 14
우리는 양태론의 오류에 관해 매우 분명할 필요가 있다. 양태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영 모두 영원하지 않고, 모두 동시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대신에 양태론은 아들의 계시는 승천으로 종결되었고, 승천 후에 아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양태론은 너무 멀리 나아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그영께서 상호내재하시며 동시존재하심을 믿지 않는다. 양태론자들과 달리, 우리는신격의 셋의 상호내재와 동시존재를 믿는다. 즉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그영 모두 동시존재하시며 동일 조건 아래 계심을 믿는다. 우리는 또한 셋 모두 영원하심을 믿는다. 이사야 9장6절은 아버지가 영원하심을 말하고, 히브리서 1장12절과 7장3절은 아들이 영원하심을 가리키고 히브리서 9장14절은 영원한 영을 말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그영은일시적이지않고 영원하시다. –위트니스 리, 신약의결론 , 메시지 221-239 (Anaheim, CA: Living Stream Ministry, 1988), p. 2467
위트니스 리가 쓴책자 처음 4개 장을 포함하여 신성한 삼일성에 대한 더 많은 반대한 주석들이 있다. 그책에서 위트니스 리는성경진리와 서방과 동방과 중국의 신학 그리고 초기 교회 신조들에서 사용된 표현들을 개관하고 있다.
38 상대적으로 짧은 두개의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교회의 하나는 삼일 하나님으로 이뤄진 그영의 연합이다. 여기 에베소서 4장에서 일곱 하나는 세 그룹으로 나눠지며, 각 그룹은 신격의 세 위격들 중 하나를 갖는다. 첫 그룹에서 우리는 그영을 보며, 두 번째 그룹에서는 주님을, 세 번째 그룹에서는 아버지를 본다. 첫번째 그룹에는 몸과 그영과 소망이 있다. 그 다음 두 번째 그룹에서 우리는 주님과 믿음과 침례를 본다. 그리고 마지막 그룹은 아버지 하나님을 포함한다. 그영과 관련하여 몸과 소망이 있다. 주님과 관련하여 믿음과 침례가 있다 그다음에 모든 이 위에 계시고, 모든 이를 통과하시며, 모든 이 안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다. 세 인격들 안에 계신 신격이 그 영 안에 실재화 되신 우리의 하나이다. – 위트니스 리,교회의 실제적인 표현(로스 엔젤리스: 흐름사, 1970), pp. 42-43
그분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영 셋이시다. 4-5세기의 위대한 신학자들은 삼일성의 셋을 세 ‘휘포스타시스’(hypostases)라고 칭했다. 휘포스타시스라는 헬라어의 원래의 의미는 밑에서 서 있는 어떤 것 즉 지지 또는 기초를 의미한다. 예를 들자면, 하나의 테이블은 그것을 지지하는 네 개의 다리가 있고, 그 테이블의 네 개의 다리는 네 개의 휘포스타시스이다. 마찬가지로, 한 하나님이 계시지만, 그분은 아벚, 아들, 그영이시다. 이 셋인 아버지, 아들, 그영은 세 신성한 휘포스타시스들이다. 헬라어로 쓰여진 신학자들의 저술들에서 사용되었던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은 또한 본체(substance)로 번역될 수 있다. 후에 신학이 라틴어 안으로 들어왔을 때 페르소나(persona)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후 영어에서 그 용어는 인격(person)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인격이라는 단어의 일반적인 이해를 따라서 그분들이 세 분리된 인격들을 의미한다고 이것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 위트니스리, 주의 회복의 간략한 제시 (Anaheim, CA: Living Stream Ministry, 1990), p. 9
39 삼일 하나님에 관하여—아버지, 아들, 그영; 성경의 순수한 말씀에 따른 삼일 하나님에 대한 계시; and 어떠한 이단인가- 두 신성한 아버지, 두 생명주는 영, 세 하나님!
40 위트니스 리, 삼일 하나님에 관하여-아버지, 아들, 그영(Los Angeles, CA: The Stream, 1973), pp. 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