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서한”에 대한 노먼 가이슬러와 론 로우즈의 변증과 ‘크리스천 리서치 저널’(Christian Research Journal)의 지방 교회들 재평가에 대한 그들의 비평에 답변함 [영어 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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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0년 전에 미국에서 제일 처음으로 지방 교회들을 비판하는 자료들을 펴내는데 참여했던 베테랑 이단 변증가인 그레첸 파산티노(Gretchen Passantino)는 크리스천 리서치 저널(the Christian Research Journal)최근 특집호(“우리가 틀렸었다”)에서 열정적인 호소를 했다. 파산티노는 동료 이단 변증가들, 그리고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LSM)와 지방 교회들의 가르침을 비판하는 공개서한 서명자들에게 자신은 더 깊은 연구 후에 자신의 의견을 바꿨노라고 밝히면서, 지방 교회측에 대한 그들의 정죄를 재고해 보라고 요청했다.1 노먼 가이슬러와 론 로우즈는 파산티노의 호소를 즉각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진리는 더 많이 읽었거나 더 오래 연구한 사람들에게 항상 귀속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오히려 진리는 증거를 통해 가장 설득력 있는 논증을 펼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귀속된다.2
따라서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그레첸 파산티노 여사가 참여했던 원래의 조사 이후 35년 이라는 긴 시간이 경과했음에도 추가 조사의 필요성을 일축했다. 그 기간 동안 추가적인 증거가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그것을 도외시하면서 자신들의 뛰어난 논증력만 진리 판별의 근거로 드리대고 있는 셈이다. 사실 그들의 논증은 여러 방면에서 결함이 있다. 이 글은 한 가지 사례를 들어 가이슬러와 로우즈의 논증이 얼마나 결함이 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지방 교회들이 고대의 이단인 성부고난설을 믿는다고 애둘러서 비난한다. 성부고난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또 다른 존재양식일 뿐이며,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 고난받으신 분은 아버지라고 보는 견해인데, 지방 교회측이 이 견해를 붙들고 있다는 비판이다.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찬가지로, 성부 고난설(성부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이단-17)을 거부한다고 하는 지방 교회측 주장이 미심쩍어 보이는 것은, 그들이 상호내재라는 교리에 근거해 성부와 성자께서 서로 다른 분의 활동들에 관여하신다는 견해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보아하니CRI 도 이것을 지지하는 듯하다.)
가이슬러와 로우즈의 분석에는 다음과 같이 여러가지 결함이 있다:
-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이러한 비난을 뒷받침하려고 사용한 세 개의 인용문들 모두 출처가 잘못되었다(“허울뿐인 학식에 의해 지지된 성부고난설이라는 거짓 비난” 을 보라);
- “성부 고난설을 거부한다고 하는 지방 교회측 주장”이라고 말함으로써,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은연중에 지방 교회들이 이전에 그러한 믿음을 가진 적이 있다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준다.
- 아버지와 아들께서 상호 내재하시고 함께 일하신다고 믿는 것을 성부 고난설과 동일하다고 추론하는 것은 잘못된 논리와 잘못된 신학에 근거한 추정이다;
-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아버지께서 아들의 일에 관여하심을 부인하는 것은, 그들이 성경에 기록된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함을 드러낸다;
-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신격의 셋 모두가 각 위격의 운행에 관여하심을 기록하는 성경 말씀과 관련, 여러 저명한 성경 교사들과 신학자들도 지방 교회측과 유사한 진술을 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신성한 삼일성의 셋이 함께 일하심을 확증하는 학자들” 을 보라).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지방 교회들이 성부 고난설을 거부하는 것을 못 본체 함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지방 교회들이 성부고난설을 거부한 것을 두고 “거부한다고 하더라.” 라고 하면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조사의 필요성을 무시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는 1976년 초에 성부고난설이 기초하고 있던 양태론 이단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소책자인 양태론,삼신론, 또는 성경에 근거한 삼일 하나님에 관한 순수한 계시,3 양태론,삼신론, 또는 성경에 근거한 삼일 하나님에 관한 순수한 계시를 출판한 바 있다. 더구나 위트니스 리는 1985년에 출판된 한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또한 우리는 아버지께서 육체가 되셨고, 육체 안에서 이 땅에서 사셨다고 말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로 가셔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십자가 위에서 흘려진 피가 아버지 예수의 피라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셨다고 말해야 한다(요일1:7).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아버지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도 말할 수 없다.4
“신성한 경륜 안에 계신 신성한 삼일성”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성부고난설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의 신성한 삼일성의 동역 사이의 구별을 명쾌하게 설명했다. 이러한 구별과 케리 로비쇼우의 설명은 아래에서 더 깊이있게 살펴볼 것이다.
더구나 캐리 로비쇼우(Kerry Robichaux)는 <확증과 비평>지 1999년호에 실린 > “신성한 경륜 안에 계신 신성한 삼일성” 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성부고난설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의 신성한 삼일성의 동역 사이의 구별을 명쾌하게 설명했다. 이러한 구별과 케리 로비쇼우의 설명은 아래에서 더 깊이있게 살펴볼 것이다.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위에서 위트니스 리의 세 선언문뿐만 아니라, 양태론과 성부고난설을 거부한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출판물 모두를 못본 체 한다. 연구 주제를 공정하고 균형잡힌 방식으로 이해하고 제시하고자 하는 기독교 변증가들에게 필수불가결한 자질은 조사를 철저히 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그들의 주장과 위배되는 모든 증거들을 거부하면서 지방 교회들을 이단적이라고 쉽게 낙인찍고 있다.
가이슬러와 로우즈의 결함이 있는 추정
양태론(그리고 확대해서 성부고난설)의 오류는 신성한 삼일성의 셋 사이의 구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양태론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진리의 측면을 보존하려는 갈망에서 비롯되어 발전되었지만,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을 하나님께서 시간 안에서 일시적으로 발현하신 것으로 보는 오류를 범했다. 양태론과 성부고난설 모두가 이단임으로,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의 가르침들은 그것들을 의심의 여지없이 단호하게 배척한다.5 그러나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신성한 삼일성이 상호 내재하시고, 아버지와 아들께서 서로의 활동에 관여하신다고 보는 것은 필연적으로 성부고난설로 이어진다고 주장하면서 지방 교회들을 이단이라고 낙인찍었다. 그들의 논리는 중요한 다음의 세 가지 방면에서 결함이 있다:
- 가이슬러는 하나님의 불변성 을 분명하게 단언한다. 그러면서도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상호내재의 항목의 경우 분명한 지지를 내비치지 않는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주님 자신의 말씀에 분명히 계시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상호내재가 정통의 범주 안에 있다는 것은 용납하는 듯싶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요한복음 10장, 14장, 17장 에서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서로 안에 계셨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박히시던 동안에도 아버지와 아들께서 분명 서로 안에 거하셨음을 수긍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불변성은 손상되고 만다.
-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아버지께서 십자가 위에서 아들과 상호내재하시고 계셨다면, 아버지께서 고통을 당하고 계셨음에 틀림없다고 추론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무감각성‘(impassibility)에 관해 가이슬러 본인이 쓴 글과도 모순된다..
- “관여” “(involvement)” 를 “성부고난설” 과 동일시 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에 의해 부당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상호내재와 하나님의 불변성
상호 내재(Coinherence)는 신성한 삼일성의 셋이 상호 내주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그분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는 그분 안에 계심을 그분의 제자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요10:38, 14:10, 20, 17:21, 23). 신성한 삼일성의 상호 내재적인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그영께서 어떻게 한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상호 내재는 물질 세계 안에서는 그에 필적할 만한 개념이 없기 때문에 실례를 들수 없다. 더구나 그것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논리 체계로는 설명이 안 된다. 상호내재는 삼일 하나님에 관한 가장 위대한 비밀이며, 삼일성을 깔끔하게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를 분쇄해버린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였겠지만, 상호 내재는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강조해서 다루는 항목은 아니다. 가이슬러의 <조직신학 제 2권, 하나님, 창조> 와 <기독교 변증 베이커 백과사전>( Baker Encyclopedia of Christian Apologetics)은 삼위일체를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음에도 상호 내재는 거론하지 않는다. 만일 이 두 책 안에 있는 성경 색인이 정확하다면, 가이슬러 자신은 요한복음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내재를 분명히 가리키는 말씀들 중 그 어느 것도 참조 구절로 색인에 포함하지 않는다. 이 말씀들 중 유일하게 언급된 말씀은 요한복음 14장 10절로서, 이것도 아래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적인 거함을 분명하게 단언하는 존 칼빈의 글의 인용 부분에 나올 뿐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요14:10)이라고 아들 자신께서 선포하신 것과 같이, 아버지 전체가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 전체가 아버지 안에 계신다. 교회 저술가들도 어떤 본질상의 차이로 한 분이 다른 한 분과 분리되심을 인정하지 않는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삼일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과 그영의 상호 내재라는 진리의 중요성을 제대로 평가하고 있는지, 아니 그런 진리를 수긍이라도 하는지 불분명하다. 그들은 ‘크리스천 리서치 인스튜트트’(CRI)의 지방 교회 재평가를 비판하는 글에서, 상호내재를 정통의 범주 안에 속한다고 보면서 용납하는 듯한 태도를 내비치기는 한다. 거기서 그들은 “어떤 사람이 상호내재의 교리를 지지할지라도(even if)…”(강조부분 추가함)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말을 얼버무리고 있다. 그들은 상호내재를 옳다고 보고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틀렸다고 반박하지도 않는다. 이처럼 애매모호한 태도는 소위 오류라고 할 수 있는 것들에 맞서 삼일성과 같은 핵심적인 진리를 변호하는 일에서는 허용될 여지가 없는 태도이다. 가이슬러와 로우즈의 문제점은 만일 그들이 상호내재를 옳다고 단정하게 되면, 그 때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조차도 아버지와 아들께서 본질적으로 상호 내재하고 계셨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불변성을 부인하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계시는 동안 또는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동안 어떤 시점에서 하나님의 본질적인 존재가 바뀌었다고 말하는 꼴이 될 것이다.
불변성(immutability)이란 하나님은 그분의 속성, 그분의 본성 혹은 그분의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 변치 않으신다는 사실을 말한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의 상호내재는 하나님의 본질적 존재의 한 방면이므로, 신성한 삼일성의 셋의 상호내재는 영원하며 바뀌지 않는다. 상호내재가 변하지 않는 것임으로, 그리스도께서 육체되심, 인간 생활, 십자가에 못박히심, 부활의 전 과정을 거치시는 동안에도 상호내재는 변함이 없었다. 바로 여기에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되도록 외면하려고 하는 듯한 근본적인 문제가 놓여 있다. 만일 그들이, 상호내재는 인정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실 때 더 이상 아버지는 아들과 상호 내재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기본적인 한 방면, 곧 그분의 상호내재적 하나가 변했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무소부재라는 그분의 특성상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당하시던 그곳에 분명 계셨지만,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 하나님이 아니시고, 아버지는 확실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시는 체험에는 참여하지 않으셨다.
이러한 진술은 아들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동안 아버지께서 아들과 상호 내재하셨는지에 관한 핵심 쟁점을 회피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소부재는 그분께서 어디든 동시적으로 계신다는 것으로써, 우리도 이것을 확고하게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소부재는 특별히 물질적인 우주와 관련된 것이지, 신격 안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과 그영의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격 안의 이 관계성은 상호내재의 관계성이다.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상호내재에서 무소부재로 논의의 주제를 바꿔버린다. 이러한 논쟁에 있어서의 문제점은, 만일 우리가 아들께서 아버지 안에 계셨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셨다고 하신 요한복음의 주님 말씀을 받아들인 후, 아버지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오직 무소부재의 방면에서 그곳에 계셨을 뿐이고, 더 이상 아들과 상호 내재하신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적 존재가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감각성
무감각성(impassibility)이라는 용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관련해 사용될 때,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고난 당하실 수는 없음을 가리키는 뜻으로 신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이다.7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말한 대로, 성부고난설 이단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고난 받으셨다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은 초기 교회에 의해 당연히 이단으로 배척되었다. 하나님은 무감각성의 속성을 지니신다는 주장을 근거로, 하나님께 고통을 야기할 수 없다는 논지는 아버지만 아니라 육체 되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있는 신성한 본성을 포함한 신격 전체에 적용되는 데 이르렀다. 19 세기 칼빈주의 신학자인 찰스 하지(Charles Hodge)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분은 단지 사람이 아니라, 한 인격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셨다. 따라서 그분의 순종과 고난은 신성한 인격의 복종과 고난이었다. 이것은 고대 교회의 성부고난설과 현대 일부 저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신성한 본성 자체가 고난 받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로마 카톨릭과 루터교와 개혁교회들 모두 한결같이 배척한다.8
가이슬러 자신도 다음과 같이 썼다:
성부고난설은 문자적으로 “아버지께서 고난받으셨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3세기 초에 그리스도뿐 아니라 아버지께서도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믿는 단일신론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소유하신 신성한 본성은 고난받거나 죽으실 수 없었다. 하나님은 무감각하시고 따라서 고난을 경험하시는 것이 불가능하다.9
육체되신 그리스도는 두 본성, 즉 신성한 본성과 인간 본성을 소유하신다. 가이슬러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은 무감각하셨으며, 그 결과 십자가 위에서 고난받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가이슬러는 아버지와 아들께서 상호 내재하신다는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은 아버지께서 분명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받으셨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이슬러의 주장대로, 만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한 본성이 무감각하기 때문에,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동안 그 본성이 고통을 겪지 않았다면, 마찬가지로 아들과 상호내재하시는 신성한 아버지 역시 가이슬러가 정의한 그런 고통을 십자가 위에서 겪으실 수 없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이 아버지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으셨다고 가르치는 것을 암시하는 단 한 줄의 인용문조차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여전히 자신들의 가정(假定)과 잘못된 추론에 의존하여 그러한 비난을 가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관여하심” 은 “성부고난설” 이 아니다
더 나아가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관여하심”(involvement)을 “성부고난설”(patripassianism)로 비약시키는 것은 부당하다. 히브리서 9장 14절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영원하신 영을 통해 자신을 유일한 속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다고 말한다. 이 구절을 근거로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께서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구속을 성취하시는데 모두 관여하신다(9:12)고 말하는 것은 성부고난설이 아니며, 성경에 있는 신성한 계시이다. 케리 로비쇼우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해 무엇을 말할 것인가? 여기에서 대부분의 믿는이들은 얼버무린다. 심지어 신학 배경이 거의 없다시피 한 사람들도, 터툴리안이 주의 깊게 논박의 대상으로 삼았던(이단논박, II, XIII, XXIX-XXX)성부고난설의 오류을 알고 있다. 우리는 아버지(또는 그영)께서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고난받으신 주체라고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나, 아들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아버지와 그영으로부터 분리되어 계셨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마찬가지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가시적인 죽으심 안에서 삼일성의 셋은 십자가상에서의 아들의 고유한 활동이 드러나는 목적을 위해 운행하고 계셨다는 관점을 우리는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아들이야말로 하나님-사람의 죽음(비록 우리가 하나님 자신은 죽지 않으신다고 고백하더라도!)의 주체이셨다고 밝혀야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사람의 죽음에서 아버지와 그 영 또한 운행하셨고, 그 셋의 운행하심이 아들의 고유한 활동을 가능하게 했다고 믿어야 한다. 성경도 동일하게 이것을 증거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안에서 다음의 일을 이루고 계셨음을 말한다: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를 반대하는, 규례들이 적혀있는 증서를 하나님께서 지워버리셨고 ,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으시어 우리 가운데서 없에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을 벗기시어 공개적으로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습니다(골2:14-15).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하나님-사람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쌓여있었던 불법들을 용서하시고, 사람들을 사주해 그분을 반대했던 타락한 천사 무리들을 이기시려고 운행하셨으며, 이러한 운행으로 우리의 구속이 성취되었다. 우리는 구속이 아들께 속한 일이지만, 구속을 위한 운행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그영인 신격 전체의 활동이 개입되었다고 이해한다.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삼일성의 운행을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더욱이 영원하신 영을 통하여 흠이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신 그리스도의 피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하여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도록 우리의 양심을 얼마나 정결하게 하겠습니까?”(히9:14). 아들은 질(質)과 효능에 있어서 영원한 구속(12절)을 성취하시려고 영원하신 영을 통하여 그분 자신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셨다.10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추가 조사는 필요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삼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의 진리에 대해 지방 교회측이 제시한 이처럼 주의 깊고 균형잡힌 해석을 외면하려고 한다. 대신 그들은 “관여”(involvement)는 필연적으로 성부고난설을 암시한다고 부당하게 싸잡아서 일반화시켰다. 케리 로비쇼우의 글은 문제를 명쾌하게 풀어내는 데 비해, 가이슬러와 로우즈의 가정은(假定)오류가 있는 가정이다. 저명한 스코틀란드 개혁 신학자인 토마스 F. 토렌스(Thomas F. Torrance)역시 구속의 역사에 삼일 하나님 전체가 관여한 것을 아래와 같이 증명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는 것은 놀라운 복음의 진리이다. 물론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이실 때만 참으로 말이 된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은 아버지나 그영이 아니시며, 육체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와 그영과는 확실히 차별화 되신 가운데 십자가에 못박히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와 활동에서 아버지와 그영과의 깨어질 수 없는 하나 됨(oneness)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삼위일체 전체가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에 관여한다.11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성경에 있는 계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부족이 있음
만일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아버지께서 아들의 육체되심, 인간 생활, 십자가에서 죽으심, 부활에 관여하실 길이 없으셨다고 진정 믿는다면, 참으로 유감스럽지만, 그들은 삼일성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에 관한 성경의 계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심각한 부족이 있는 것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 사이의 상호내재는 영원하며 불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육체 되심을 통해 사람이 되셨을 때 중단되지 않았고, 아들께서 그분의 인성 안에서 이 땅에 사시던 짧은 기간에만 해당됐던 것도 아니다. 비록 육체 되심의 주체이시자, 사람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맞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거치셨던 각각의 단계에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가 관여하셨음을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한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마1:18, 20, 눅1:35). 따라서 그분의 근원은 성령이셨고, 그분의 요소는 신성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아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셨다. 아버지께서 항상 그분과 함께 계셨다(요8:16, 29, 16:32). 성경은 우리에게 신격의 모든 충만이 몸을 지니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고(골2:9), 그분은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며(딤전3:16),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셨다고 말한다(마1:23). 성경은 신격의 삼분의 일의 충만이 몸을 지니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신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삼분의 일이 육체로 나타나셨다고도 하지 않으며,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삼분의 일 하나님이셨다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신격의 모든 충만의 체현이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으로서 인생을 사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 안에 들어가셨으며,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시도록 높여지셨다(행2:36). 인성 안에서 그분의 존재가 거친 위 각 단계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여전히 아버지와 그 영과 서로 안에 계셨다. 한시라도 아들께서 아버지 그리고 그영과 분리되신 적이 없으셨다. 이와 다르게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본성이 변하였다는 주장이 되고 만다. 그것이야말로 심각한 이단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침례받으실 때, 그 영은 그리스도께서 사역을 수행하시도록 그분께 기름 부으셨다(마3:16, 눅4:18). 이 외적인 기름부음은, 그 이전에는 그 영께서 그리스도와 서로 안에 거하고 계시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2장에서 사도들이 복음 봉사를 수행할 능력을 얻도록 그 영께서 그들에게 경륜적으로 부어지신 것이,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그들이 이미 본질적으로 그 영을 영접한 사실을 무효화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스도는 침례 이후에도 그 영에 의해 사시고, 움직이시고, 일하셨다(눅4:1). 아들은 그 영에 의해 귀신들을 쫒아내셨다(마12:28). 더구나 아버지께서 항상 그분과 함께 계시고(요8:29, 16:32), 그분과 아버지는 서로 안에 거하신다고(요14:10-11, 17:21)그분께서 선언하신 것은 하나님-사람으로서 그러셨던 거였다. 그분은 자신이 아버지와 상호 내재하신다는 사실에 근거해, 제자들이 아들을 본 것이 아버지를 본 것이고(14:9), 그분 즉 아들의 말씀은 아들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분의 일을 행하신 것(요14:10)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아버지는 경륜적으로 그리스도를 버리셨지만(마27:45-4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신성한 독생자로서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아버지와 그 영과 서로 안에 거하고 계셨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일어났던 일들은 참으로 비밀이며, 우리는 그 깊이를 다 헤아릴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성경이 확증하는 것을 확증할 수 있을 뿐이다. 성경은 십자가에서 아래와 같은 일들이 일어났음을 말해준다:
- 하나님(삼분의 일 하나님이 아닌)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화목하게 하고 계셨다(고후5:18-19).
-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피로 교회를 사셨다(행20:28).
-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영을 통해 그분 자신을 죄를 위한 유일한 희생제물로 하나님(아버지)께 드리심으로 영원히 효능있는 구속을 이루셨다(히9:14, 12).
구속을 성취하실 때 삼일 하나님께서 운행하신 것과 관련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원한 구속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에 의해 영원하신 성령을 통해 성취되었다(히9:12, 14, 요일1:7).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사람 예수님의 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피이기도 하다. 요한일서 1장 7절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한다고 말한다. 사람 예수님의 피는 사람인 우리를 위한 그분의 구속에 자격을 부여한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참 사람이셨다. 그러나 그분의 구속의 효력은 그분의 신성에 의해 보증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께서 구속의 효력이 영원토록 보증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의 구속은 영원한 구속이다(히9:12). 왜냐하면 이 구속은 사람 예수님의 피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에 의해서도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심지어 이 피를 ‘하나님 자신의 피’(행20:28)라고까지 했다.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12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성경은 삼일 하나님 전체가 관여하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 하나님(아버지)은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행2:24, 32, 10:40, 갈1:1).
- 주님은 스스로 살아나셨다(요2:19, 행10:41, 살전4:14)
- 그 영 역시 참여하셨다(롬1:4, 벧전3:18)
만일 우리가 신성한 삼일성의 영원한 상호내재에 관한 성경의 증거를 받아들인다면13,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통과하시고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을 때조차도 본질적으로는 아버지와 그 영과 결코 분리되지 않으셨다고 단언해야 한다. 이러한 진리에 관해 토마스 F. 토렌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로서, 분리되시지 않았으며, 각자 다른 이 안에 거하셨다. 심지어 예수께서 우리의 허물 때문에 하나님의 내치심을 당하시고 고난받으시고 찔리시던 그 ‘흑암의 능력과 시간’ 안에서도 그러하셨다.14
가이슬러의 신학체계는, 가이슬러 자신이 논리적으로 필연적이라고 미리 단정해 둔 것에 위배된다면, 제 아무리 성경적인 진술이라 하더라도 용납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내재적 하나는 인간 논리로 체계화하여 설명하기가 불가능한 범주의 개념이다. 아마도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인간 논리에 끈질기게 신뢰를 두다보니 하나님의 상호내재적 하나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하다가, 성경 기록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데로 이끌린 것 같다.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언하면서도 신격의 셋이 서로 서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운행하신다는 견해를 갖는 것같다. 따라서 그들이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육체되심을 통해 인성 안에 오시고 구속의 성취를 위해 십자가로 가셨던 분은 아들뿐이셨다. 아들은 아버지 그리고 그 영과는 분리되신 채 그 과정을 거치셨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의 이런 견해에 따르면, 믿는 이들 안에 거하시는 분은 그 영 혼자뿐이시다.
아들께서 육체 되심의 중심 인물이시자 주체이시고(요1:14, 롬8:3), 구속을 성취하시려고 십자가로 가신 분은 아들이셨다는 것은 사실이다(엡1:7, 요일1:7). 믿는 이들 안에 내주하시는데 중심 역할을 하고 계시는 분은 그 영이시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롬8:11, 고전 3:16). 그러나 그것이 성경의 완전한 계시는 아니다. 그렇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지만, 어떤 방식으로 아들을 보내셨는가? 아버지는 성령에 의하여 신성하게 잉태되는 방식으로 아들을 보내셨고(마1:18, 20, 눅1:35), 또한 아들께서 오실 때,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심지어 아들 안에서 오셨다(요8:29, 14:10-11, 16:32).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그분 자신과 화목케 하고 계셨다(고후5:19, 롬5:10참조). 더 나아가 아버지께서 그 영을 보내셔서 믿는 이들 안에 거하게 하셨을 때, 이것은 아들께서 믿는 이들 안에 거하시려고 오시는 것(요14: 16 -17, 20, 롬8:9-11, 고후13:5, 갈2:20, 골1:27참조)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께서 믿는 이들 안에 거처를 정하시기 위해 오시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요14:23). 그뿐 아니라 그 영께서 오셨을 때,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시고, 우리는 아들 안에 있으며, 아들은 우리 안에 계심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요14:20).15
결론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의 가르침을 살펴보기 위한 추가 조사의 필요성을 거절한 것은 그 자체가 충격적이다. 그것은 그들의 ‘논증’을 조사해 볼 때 더욱 그렇다. 그들의 논리에는 결함이 있고, 그런 결함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무감각성에 대한 가이슬러 자신의 글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두 가지 기본 속성들인 하나님의 불변성과 상호내재와 관련해서도 자가당착의 오류에 빠지고 있다. 또한 가이슬러와 로우즈의 결함 있는 논리대로라면, 만약 우리가 성부고난설을 배격한다면 삼위 중 한 분에게 특별히 귀속되는 일에 신격의 셋 모두가 관여하신다는 성경의 증거도 배격해야만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데, 그들은 이 딜레마가 그들의 잘못된 논리에서 비롯되었다고 인정하기는커녕 우리를 그 딜레마 안에 가두어두려 한다.
문제의 근원은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상호내재와 그리스도의 육체되심, 인간생활, 십자가에 못 박히심, 부활하심에 있어서 신성한 삼일성의 셋이 상호 내재하시고 함께 일하심을 말하는 성경의 신성한 계시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이 이해한 바가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정통성을 시험하는 잣대로 삼아 다른 이들에게 들이대고 있다. 신성한 삼일성의 상호내재라는 핵심 진리는 그들의 산뜻하지만 결함이 있는 삼일성의 모델을 산산조각 내어 버리기 때문에, 가이슬러의 신학관련 저술에서는 완전히 실종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논리적인 기준들을 성경의 신성한 계시에 편협한 방식으로 적용하는 걸 고집하다 보니, 그들 자신이 이것과 관련 곤란한 상황에 빠져 버렸다. 자신 있게 상호내재를 확언하지도, 부인하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나 신격 안의 셋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 핵심 진리는 주님 자신께서 요한복음 14장과 17장에서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신 진리였다. 더 나아가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분명한 취지를 명확하게 단언하기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상호내재를 이단 정죄와 연관지음으로써(마23:13참조)상호내재가 이루어내는 효과가 주님의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게 한다. 상호내재가 믿는 이들이 신성한 삼일성을 체험적으로 이해하고 또 신성한 삼일성과 하나 되는 데 있어서 소중한 함의를 띠고 있음에도 말이다(요14:20, 17:21, 23).
많은 성경 학도들이 자신들의 지적인 능력으로 신성한 계시를 이해할 수 있다고 과신하다 보니 잘못을 범한다. 워치만니는 1927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빌립보서 3장 3절에서 사도는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기서 ‘신뢰’는 원문에서 ‘믿음’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사도는 자신이 “육체를 믿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육체의 가장 큰 일은 자기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스스로 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령을 의지하지 않는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지혜이시다. 그러나 믿는 이들은 자기의 지혜를 믿는다. 그도 성경을 읽고 전하며, 말씀을 듣고 믿을 수 있겠지만, 이것들은 모두 자기 생각의 힘으로 한 것일 뿐이다. 그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에게 있는 것이 남에게 들어 얻은 것이거나 자기 자신의 연구에서 얻어 낸 것으로서, 하나님에께 속하기보다는 사람에게 속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모든 진리를 받았다고 믿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가르침을 받으려는 마음이 없어, 하나님께서 빛가운데서 그분의 진리를 계시해 주시기를 앙망하며 기다리지 않는다.16
우리의 교육 또는 능력에 대한 자만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담겨있는 계시를 받는데 있어서 주된 장애물이다. 위트니스 리의 다음 설명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합당한 겸손이다:
여러분이 받은 교육을 자랑할 때, 여러분은 성경을 아는데 있어서 방해를 받을 것이다. 아무리 많은 교육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은 자신이 가르치기가 쉬운 어린아이일 뿐이고, 여러분의 온 존재가 비어 있다고 주님께 겸손하게 말씀드려야 한다. 여러분은, “주님, 제게 세 개의 박사학위가 있지만,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제 존재는 제가 받은 교육으로 가득차 있지 않습니다. 제 영과 제 생각과 제 존재 전부는 비어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야 한다. 고등교육을 받는 많은 전문인들이 안에 뭔가가 가득 차 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구원받은 후에도 말씀에서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교만에 사로잡혔다.17
주님의 자녀로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향한 단순성과 순수성 안에 보존되도록(고후11:3)은혜를 얻기 위해 주님을 앙망하기를 배움으로써, 미리 주입된 신학적 혹은 철학적인 개념들에 의해 걸러짐이 없이 거룩한 말씀 안에서 그분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각주들:
1 그레첸 파산티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의 이전 연구(밥과 월터와 일리옷과 칼과 함께 발전시키고 공유했던 연구)는 충분치 못한 것이어서 잘못된 결론에 이르른 바 있다. 현재 연구(행크와 엘리옷과 함께 발전시키고 공유했던 연구)는 이전 것보다 훨씬 더 깊고 광범위하게 수행되었으며, 이 연구 결과 나는 이전의 결론을 번복해야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개 서한에 서명했든지 얼마나 여러 번 동일한 부적절한 출처가 인용되었든지 간에, 진리의 승부에 있어서 이 저널의 특집기사가 뒷받침하는 결론이 우위를 점한다. 지방 교회들은 정통 기독교 신학의 본질적인 항목들을 믿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이단이라고 대적하기보다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다른 이단 연구자들이 우리가 한 만큼 심도 있는 연구에 재착수하지 않을 것이라면 자신들이 한 정죄를 철회하기를 나는 기도한다. 우리는 이단 분별에 있어 잘못 형제를 고발하거나 아니면 잘못 이단을 포용하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우리에게 무슨 영적인 권리가 있어서 이 문제에 대한 재고를 거절할 것인가? (Gretchen Passantino, Christian Research Journal 32:6, 2006, p. 50)
2 완전한 단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CRI가 제기한 주장 중 하나는 지방교회측에게 우호적인 그들의 결론은 그들이 그 주제에 관해 더 나은 그리고 더 많은 조사를 했기때문에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50). 먼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더 많은 것이 반드시 더 나은 것을 의미하지는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이 참으로 중요한 것인지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그레첸 파산티노 커번(Gretchen Passantino Coburn)은 이 주제에 대해 자신이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연구를 해 왔고 또 그것을 오랫동안 수행해 왔다고 주장한다(50). 그러나 진리는 더 많이 읽었거나 더 오래 연구한 사람에게 항상 귀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그것은 최상의 증거를 가지고 논의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한다.
3 Ron Kangas, Modalism, Tritheism, or the Pure Revelation of the Triune God according to the Bible (Anaheim, CA: Living Stream Ministry, 1976).
4 Witness Lee, Elders’ Training, Book 3: The Way to Carry Out the Vision [영어 사이트] (Anaheim, CA: Living Stream Ministry, 1985), pp. 70-71.
5 E.g., in Witness Lee, The Clear Scriptural Revelation Concerning the Triune God [영어 사이트] (Anaheim, CA: Living Stream Ministry, n.d.) and Witness Lee, The Revelation of the Triune God According to the Pure Word of the Bible [영어 사이트] (Anaheim, CA: Living Stream Ministry, 1976).
6 Norman Geisler, Systematic Theology, Volume 2: God, Creation (Minneapolis, MN: Bethany House, 2003), p. 305, 존 칼빈의 기독교 강요, 1.13.2, 19에서 인용함. 가이슬러와는 달리 칼빈은 요한복음 17장 3절에 대한 자신의 주석에서 상호내재의 진리를 다음과 같이 확고하게 지지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온전히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는 온전히 그분 안에 계심을 알수 있다. 짧게 말해서, 그리스도를 아버지의 신성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아직 인식하지 못한 것이며, 오히려 이상한 하나님 한 분을 스스로 고안해 낸 것이다. – 존 칼빈, Calvin’s Commentaries, Volume XVIII: John 12-21; Acts 1-13, William Pringle, trans.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848, 1981), p. 167
7 이 글은 하나님의 무감각성 교리의 장점들을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신 이 글은 가이슬러가 신성한 본성의 무감각성을 옹호하면서도, 지방 교회들이 신격의 셋은 서로의 활동에 참여한다고 가르치는 것을 빌미로 지방교회들이 성부고난설을 가르친다고 비난을 가하는 것에서 드러나는 모둔을 드러낸다.
8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Volume 2 (Grand Rapids, MI: Eerdmans, 1979), p. 483.
9 Norman Geisler, Systematic Theology, Volume 2: God, Creation (Minneapolis, MN: Bethany House, 2003), p. 296.
10 Kerry S. Robichaux, “The Divine Trinity in the Divine Economy,” [영어 사이트] Affirmation & Critique IV:2 [영어 사이트], April 1999, pp. 40-41.
11 Thomas F. Torrance, The Christian Doctrine of God: One Being Three Persons (London: T&T Clark, 1996), p. 247.
12 Witness Lee, God’s New Testament Economy [영어 사이트] (Anaheim, CA: Living Stream Ministry, 1986), pp. 49-50.
13 삼일 하나님의 성경적인 계시에 관한 기본 진리들에 대해서는, 애드 막크 (Ed Marks) 의, “삼일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인 개관,” [영어 사이트] Affirmation & Critique, I:1 [영어 사이트], January 1996, pp. 23-31, 을 보라.
14 Torrance, The Mediation of Christ (Colorado Springs, CO: Helmers & Howard, 1992), p. 43.
15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위한 상호내재의 연관성에 관한 토론에 대해서는 “이사야 9장 6절에서 ‘아들’ 이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부인하는 오류.” 를 보라.
16 Watchman Nee, The Collected Works of Watchman, vol. 12: The Spiritual Man (1) [영어 사이트] (Anaheim, CA: Living Stream Ministry, 1992), p. 108.
17 Witness Lee, Life-study of Genesis (Anaheim, CA: Living Stream Ministry, 1987), p. 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