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Summary:

이 1977년 소책자에서, 위트니스 리는 자신의 가르침이 양태론적이라는 참소를 직접 반론한다. 그는 이사야 9장 6절, 고린도전서 15장 45절, 고린도후서 3장 17절과 같은 핵심 구절들의 검토를 통해, 그 구절들이 분명히 의미하는 것을 회피하려고 본문을 곡해한 일부 사람들이 결국 삼신론 이단이 되는 것을 보여준다. 위트니스 리는 삼일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인 계시는 교리적인 공식을 위함이 아니라 그분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실재를 체험토록 하려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어떠한 이단인가—두 신성한 아버지, 두 생명 주는 영, 세 하나님

목차

위트니스 리

삼일 하나님의 문제에 대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그들의 전통만을 주의할 뿐 분명하고 정확한 성경 말씀을 주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전통을 보존하기 위하여 성경 말씀을 왜곡하며 절대적으로 성경의 순수한 말씀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통 때문에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싸움을 원치 않지만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명백하게 이단적인 관념, 즉 두 신성한 아버지, 두 생명 주는 영, 심지어 세 하나님의 관념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부지중에 또는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붙잡고 있는 관념은 사실상 이단적인데, 이는 그것이 두 신성한 아버지, 두 생명 주는 영, 그리고 어떤 경우는 세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기본적인 계시목차로 돌아가기

성경의 기본적인 계시에 의하면, 하나님의 경륜은 그리스도를 믿는이들 안으로 넣어서 그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살아 있는 교회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와 오늘날의 상황 가운데서는 이것을 볼 수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경배의 대상이신 삼일 하나님과 죄인들을 지옥에서 천당으로 구원하는 구주를 가진 기독교라는 종교뿐이다. 오늘날의 기독교 안에서는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도, 합당한 교회 생활의 실행도 볼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지난 오십 년 동안 주님은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과 합당한 교회 생활에 대한 주님의 회복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그 기간에 걸쳐 우리는 주님이 주신 주님의 회복에 대한 부담을 가져왔고, 종교의 공격을 받아왔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관하여 주님으로부터 분명한 이상을 받았기 때문에 공격을 당해왔다. 주님은 그리스도가 만유를 포함한 놀라운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는 만유 안에 계신 만유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이요, 창조주요, 아버지요, 아들이요, 그 영이며 또한 합당한 사람이시다. 그분은 모든 신성한 속성들과 인간적인 미덕들의 실제이시다. 이 만유를 포함하신 그리스도의 모든 방면의 중심점은 생명 주는 영이다. 우리는 우리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 주는 영이심을 우리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분은 하나님의 어린양이고 구속주이시지만, 이러한 것들은 단지 이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의 두 방면일 뿐이다. 만유를 포함하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 되신다. 성경은 심지어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느니라』(골 3:11)는 말로 그분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적극적인 것들의 실제이시다. 그분은 빛이요, 생명이요, 의요, 거룩이요, 구속이요, 구원이시며, 또한 모든 것이시다. 체험에서, 그분은 우리 영 안에 거하시는 생명 주는 영이시다. 이것을 선포함으로 인해 우리는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그 영이시고 또한 아버지라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이단을 가르친다고 말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아버지시요 그 영이심을 믿지 않는다.

거짓 비난을 부인함목차로 돌아가기

우리의 비난자들 중 일부는,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그 영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삼위 양식론을 가르치는 것이며 신격의 세 위격 간의 상호 내재와 동시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러한 비난을 부인한다. 만일 비난하는 사람들이 내게 아들은 서 계시고, 그 영은 강림하시며, 아버지는 말씀하시는 마태복음 3장 16절과 17절을 믿는지를 묻는다면, 나는 적어도 그들이 믿는 만큼은 믿는다고 대답할 것이다. 아버지, 아들, 영, 셋 모두가 동시에 존재하셨다. 나는 신격의 셋의 상호 내재와 동시 존재를 완전히 믿는다. 나는 마태복음 3장 16절과 17절을 믿을 뿐 아니라, 이 주제를 담고 있는 모든 구절들을 믿는다. 예를 들면, 계시록 1장 4절과 5절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에서 아버지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이시며, 그 영은 「일곱 영」이시고,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이시다. 여기에서 아버지와 영과 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도 계실 뿐 아니라, 심지어 그분의 승천과 오순절 후에도 계신다. 많은 다른 구절들이 같은 것을 계시한다. 고린도 후서 13장 13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을 본다. 더 나아가 에베소서 3장 14절부터 17절은, 『내가 …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라고 말한다. 여기서도 아버지와 성령과 그리스도가 모두 동시에 계신다. 내가 삼위 양식론자라는 비난은 거짓이며, 나는 전적으로 그것을 부인한다. 삼위 양식론은, 하나님은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이 아니시며 아들의 계시는 승천으로 끝난다고 가르친다. 삼위 양식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영원성을 부인한다. 삼위 양식론은 이단이며, 우리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아들이 아버지라고 불리심목차로 돌아가기

그러나 몇몇 비난자들은 이렇게 비난할지 모른다. 『당신은 아들이 아버지이시고 그리스도가 그 영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것은 분명히 삼위 양식론자들이 말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나는, 내가 삼위 양식론을 관심하지 않고 성경의 순수한 말씀만을 관심한다고 답변하겠다. 이사야 9장 6절은,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아기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불리고, 그 아들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린다고 말한다. 아들이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은 해석이 아니다. 그것은 인용이다. 만일 이 구절을 주의깊게 읽는다면, 당신은 본문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기를 가리키며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아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역대로 모든 정통적인 성경학도들은 구유에서 나신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다는 것에 동의했다. 오직 유대인과 불신자들만이 이것을 부인하려고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구절의 반만 믿는다. 그들은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리는 나머지 반 구절은 무시하거나 왜곡한다. 이제 그것을 왜곡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들어서 이 구절을 자세하게 고찰해 보자.

이사야 9장 6절은,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는 두 요점을 가진 두 문구가 있다. 첫번째 행은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이며, 두번째 행은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이다. 이 구절의 중반부에서는 그분이 하나님의 행정을 수행하는 분이시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이 우리에게 주신 바 된 것이 하나님의 행정을 수행함을 가리킨다. 이 구절의 후반부에는 그 아기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은 아기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을 가리킨다. 그 이름은 기묘자, 모사, 평강의 왕이라 불리울 것이다. 이러한 이름들에서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존하시는 아버지를 본다. 의심할 바 없이,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기의 이름이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두 문구에 따르면, 우리에게 난 아기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불리고, 주신 바 된 아들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린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에게 난 아기가 베들레헴 말구유에 나신 예수라 하는 아기인 것에 동의한다. 더 나아가 우리 모두는 이 아기가 참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다는 것에 동의한다. 모든 참되고 근본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인정한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근본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이 두번째 행에 문제를 갖고 있다. 그들은 단순하게 아들이 아버지이심을 믿지 않는다.

이사야 9장 6절이 말하고 있는 바를 그대로 믿기 때문에 우리는 삼위 양식론자라는 비난을 받는다. 우리를 삼위 양식론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삼신론자의 위험에 떨어진다. 신성한 삼위일체는 하나인 면과 셋인 면을 가지고 있다. 삼위 양식론은 하나인 면을 강조함으로 셋인 면을 오해하고 오용하며, 삼신론은 셋인 면을 강조함으로 하나인 면을 부인한다. 그러나 성경에 있는 순수한 계시는 진리의 양면을 다 가지고 있다. 모든 근본주의자들은 우리에게 나신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지만, 두번째 요점 곧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것은 다소 소홀히하고 심지어 반대한다. 그들은 여기에 커다란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이 구절을 왜곡한다.

이사야 9장 6절에 대한 가지각색의 왜곡    목차로 돌아가기

첫째로, 한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아들은 아버지라고 「불릴 뿐 아버지는 아닙니다.』 나는 말하기를, 『형제여,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습지 않습니까? 스미스 씨가 스미스 씨라고 불리긴 하지만 사실은 스미스 씨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이 성경이라고 불리긴 하지만 성경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그분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어떤 논리입니까?』라고 했다.

둘째로, 히브리어에 따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영원의 아버지」로 번역되어야 하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나는 「영원의 아버지」가 「영존하시는 아버지」보다 나은 번역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 영원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그분은 신격의 셋 가운데 계신 아버지가 아니신가? 신격 안에 계신 아버지 외에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또 다른 신성한 아버지가 계신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이들은 이사야 9장 6절의 영원의 아버지는 신격 안에 계신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 말씀을 왜곡한다. 그들에 따르면, 영원의 아버지는 그 세대의 기원, 근원을 의미하는 또 다른 아버지이다. 이러한 왜곡은 그들이 신격 안에 계신 아버지와 영원의 아버지라는 두 신성한 아버지를 믿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참으로 이단이다. 성경에 따르면, 영원의 아버지는 신격 안에 계신 아버지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정직하고, 공정하고, 성실할 것을 간청한다. 여러분은 신격 안에 계신 아버지 외에 영원의 아버지라는 또 다른 아버지가 계시다고 믿는가?

셋째로, 히브리어에 따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창조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나는 이 창조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묻고 싶다. 만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대답한다면, 나는 『당신은 신격 안에 계신 아버지 외에, 예수가 창조의 아버지라는 또 다른 아버지라고 믿는가?』라고 되묻고 싶다. 그들은 이것을 믿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두 신성한 아버지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이단적이라고 정죄하지만, 그들 자신이 이단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넷째로, 왜곡하는 또 다른 방식에 따르면, 이 구절의 「아버지」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이다. 이런 식으로 그 구절을 왜곡하는 사람들은 이사야 63장 16절과 64장 8절을 근거로 삼는다. 그들은 이사야 9장 6절에 있는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누가 이 아버지, 즉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신가?』 그것은 신격 안에 계신 아버지임에 틀림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스라엘의 아버지인 이 아버지는 신격 안에 계신 아버지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두 신성한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분명히 이단적이다.

다섯째로는 칠십 인 역[칠십 인 역(The Septuagint)은 히브리어 구약의 고대 헬라어 번역본임]에 있는 한 주석에 근거한 것이다. 이 주석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를 「오는 시대의 아버지」로 번역한다. 어떤이들은 이것에 근거하여, 이사야 9장 6절에 있는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신격 안에 계신 아버지가 아니라 장차 올 시대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그들은 에디슨이 전기 과학 시대를 가져온 아버지인 것처럼, 그분이 새로운 시대를 가져올 아버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구절의 「영존하시는」이란 히브리어는 영원, 영원한, 영존하시는, 영구히, 영속적으로, 고대의, 끝없는 세상(스트롱의 성구 사전을 보시오)을 의미한다. 그들이 이 구절을 왜곡시킨다 할지라도 「아버지」라는 칭호는 왜곡시킬 수 없다.

사실상, 이사야 9장 6절에서 계시된 것은 우리에게 매우 개인적이고도 주관적이다. 그것은 「한 아기가 났고 한 아들이 주신 바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한 아기가 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신 바 되었다.』고 말한다. 특별히 반복된 「우리에게」라는 구(句)는 강한 강조를 가리키며, 이 구절에 계시된 것은 무엇이든지 매우 개인적이고, 주관적이고, 체험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있음을 보여 준다. 「아기」와 「아들」만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분의 다섯 명칭들이 다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을 위한 것이다.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평강의 왕이신 예수는 모두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을 위해 계신다. 이 구절의 「영존하시는 아버지」 또한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을 위해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기묘자, 우리의 모사, 우리의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평강의 왕, 우리의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다. 기묘자와 모사와 전능하신 하나님과 평강의 왕이 우리 것이라면, 영존하시는 아버지 또한 우리 것이 되어야 한다. 「영존하시는 아버지」 또는 「영원의 아버지」를 「오는 시대의 아버지」라고 해석하는 것은 본문에 맞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를 객관적이고 일반적이 되게 하며, 구절 전체의 내용과 관련하여 볼 때, 주님의 이러한 방면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이사야 63장 16절은,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이라고 말하며, 이사야 64장 8절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고 말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두 구절을 6절에서 영원의 아버지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예언한 것보다 진전된 것으로 사용했다. 64장 8절에서 이사야는 9장 6절의 영원의 아버지가 우리의 창조주이심을 말하고, 63장 16절에서는 그분이 우리의 구속주이심을 말한다. 성경 전체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창조주, 특히 우리의 구속주로 계시되신다(요 1:3, 히 1:10, 롬 3:24, 딛 2:14). 영원의 아버지가 우리의 창조주시고 우리의 구속주시라는 것은 구속주이신 그리스도가 영원의 아버지 곧 신격 안에 계신 거룩한 아버지라는 해석을 확증할 뿐 아니라 강화시킨다. 그러므로 이사야 9장 6절에 있는 영존하시는 아버지 또는 영원의 아버지가 신격 안에 계신 아버지가 아닌 다른 종류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이사야서 본문 전체에 따른 것이 아니다.

두 신성한 아버지를 말하는 이단목차로 돌아가기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이 구절을 왜곡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당신은 신격의 셋 가운데 계신 아버지 외에 다른 신성한 아버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만일 누구든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이 우주 안에 두 신성한 아버지는 계시지 않으며, 그렇게 말하는 것은 커다란 이단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분명히 말해주어야 한다. 두 신성한 아버지라는 개념을 붙잡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즉시 그것을 떨쳐버려야 한다. 비난하는 사람들이 이 구절을 해석할지라도, 그들은 아들이 아버지라고 불리며, 온 우주 안에 오직 한 신성한 아버지만 계시며, 이 아버지는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의 아버지이시고, 시작과 끝이 있는 어떤 시대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를 「영원의 아버지」, 「창조의 아버지」, 「오는 시대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아버지」, 또는 그 밖의 어떤 것의 아버지라고 해석하더라도, 이사야 9장 6절에 있는 「아버지」라는 칭호는 왜곡시킬 수 없다. 온 우주 안에는 오직 한 분의 신성한 아버지만 계신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왜곡시키든, 이사야 9장 6절의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신격 안에 계시는 유일한 신성한 아버지이심에 틀림없다. 어떤이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구는 왜곡해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구는 왜곡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면, 「영존하시는 아버지」도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원칙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번째 용어는 순수한 말씀에 따라 받아들이고 두번째 것은 왜곡시켜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삼위일체에 관한 전통적인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두번째 구를 왜곡한다. 그러나 우리는 전통적인 가르침을 주의하지 않고 성경의 순수한 말씀만을 주의한다. 이사야 9장 6절은 우리에게 나신 한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불린다고 말하며, 우리는 그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이 구절은 또한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린다고 말하고, 우리는 또한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믿는다. 우리는 성경에 따라 이것을 말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부합되도록 이 구절을 왜곡한다. 사람들이 이사야 9장 6절을 왜곡할 수는 있어도 바꿀 수는 없다. 이 구절은 두 문구로 되어 있는데, 만일 우리가 첫번째 문구를 왜곡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면, 두번째 것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계속해서 요한복음 14장을 보기로 하자. 요한복음 14장 8절에서 빌립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9-11)고 대답하셨다. 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와 함께 있었는데 내가 누구인지 모르느냐? 너는 나를 삼 년 반 동안 보아 왔다. 나를 보았다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서 주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의 이러한 구절들은 이사야 9장 6절에 계시된 것들을 뒷받침한다. 이사야 9장 6절은 아들이 영원의 아버지이심을 계시한다. 아들이 왔을 때, 그분은 제자들에게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심을 말씀하셨다. 아들이 영원의 아버지라고 불리시는데, 어떻게 그분을 신격 안에 계신 아버지가 아닌 또 다른 아버지, 즉 창조의 아버지나 오는 시대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는가? 신격 안에 계신 신성한 아버지 외에 또 다른 신성한 창조의 아버지 또는 오는 시대의 아버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단적이다.

이사야 9장 6절에 관하여 주된 두 견해가 있는데, 분명하게 기록된 성경 말씀에 따라 아들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며 신격 안에 계신 아버지라고 말하는 견해와 이 아버지는 신격 안에 계신 아버지가 아니고 뭔가 다른 아버지라고 말하는 견해이다. 만일 당신이 하늘에 있는 법정의 재판관이라면, 이 구절에 대한 이같은 두 이해에 대하여 어떤 판결을 내리겠는가? 나라면, 전혀 왜곡되지 않은, 성경이 말하는 바를 지지하겠다. 이 구절을 왜곡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분명한 말씀대로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왜곡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믿는다. 그들의 이해에 부합하는 것은 무엇이든 취하고, 그들의 이해와 부합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왜곡시킨다. 만일 당신이 성경의 말씀들을 왜곡시킨다면 손실을 입을 것인데, 이는 거룩한 말씀을 변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말씀에서 어떤 것을 감하거나 더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엄중한 것이다. 나는 성경이 말하는 바를 이해하든 못하든, 성경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는다. 성경에서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린다고 말할 때, 나는 『아멘, 아들은 아버지이십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사람들이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관심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관심한다.

두 생명 주는 영을 말하는 이단목차로 돌아가기

이제 고린도 전서 15장 45절로 돌아가자. 이 구절은 『첫 사람 아담은 산 혼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 따르면, 그리스도이신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왜곡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그 생명 주는 영」이 아닌 「어떤 생명 주는 영」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생명을 주는 성령 외에 또 다른 생명 주는 영이 있는가? 두 생명 주는 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또 하나의 큰 이단 학설을 가르치는 것이다. 관사가 정관사이건 부정관사이건, 그리스도 자신이신 마지막 아담은 영, 곧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요한복음 6장 63절을 참조해야 하는데, 거기서 주님은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장(章)에서 주 예수님은 그분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그분은 생명의 떡으로서 사람들에게 생명이 되기 위하여 그분이 영이 되셔야 했는데, 이는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셨다. 더 나아가 고린도 후서 3장 6절은,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생명을 주는)것임이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 있는 영이 성령이 아닌가? 성령 외에 생명을 주는 또 다른 영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이 구절을 왜곡하는 두번째 방법은 여기서의 생명 주는 영은 성령이 아니고 인격이신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 구절을 왜곡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영이 있듯이 그리스도께도 영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그들은 나아가서 여기서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이지 성령이 아니라고 말한다. 확실히 이 구절에 있는 영은 그리스도의 영이다. 그러나 당신은 성령 외에 그리스도의 영이라 칭하는 또 다른 영이 있다고 믿는가? 그렇지 않으면 다르게 말해서, 당신은 그리스도의 영 이외에 성령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영이 있다고 믿는가? 만일 이것을 믿는다면, 당신의 생각이 어두워졌음에 틀림없다. 분명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것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고린도 전서 15장 45절을 이런 식으로 왜곡하는 사람들은 성령이 오늘날 하나님의 영이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롬 8:9)이시며, 심지어 예수의 영(행 16:7)이시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로마서 8장 9절은 오늘날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의 영이심을 증거하고, 빌립보서 1장 19절은 그리스도의 영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심을 증거한다. 「그리스도의 영(The Spirit of Christ)」이라는 책의 「영광 받으신 예수의 영」이라는 제목의 장(章)에서, 앤드류 머리(Andrew Murray)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이 이전과 같이 오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구약에서 그분은 다만 하나님의 영으로서 오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후에 그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오셨을 뿐 아니라 또한 사람이신 예수의 영으로서 오셨다. 더 나아가, 요한복음 7장 39절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전에는 이 영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이미 거기에 계셨다. 비난하는 사람들은 오늘날 성령이 하나님의 영이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심을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이신 이 영은 생명 주는 영이시다. 부활 후에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그러한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 의심할 바 없이 이 영은 성령이시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장 45절을 쓸 때 주의깊었다. 그는 「마지막 아담은 영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하면서 「생명 주는」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였다. 논쟁의 여지가 없다. 생명 주는 영은 누구인가? 당신은 성령 이외에 생명을 주는 또 다른 신성한 영이 계시다고 믿는가?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 구절을 왜곡하는 세번째 방법은 여기서의 그 영이 「그리스도의 사람의 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여기서의 영이 다만 그리스도의 사람의 영을 가리킨다면, 그분이 영이 되셨다고 말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이미 사람의 영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는 여러 번 그리스도의 사람의 영을 언급한다. 예를 들어, 그분은 「영 안에서 아셨고」(막 2:8), 「영 안에서 깊이 탄식하셨으며」(막 8:12), 「영 안에서 통분히 여기셨고」(요 11:33). 「영 안에서 민망하셨다」(요 13:21). 그러므로 그분은 사람의 영이 되실 필요가 없었다.

넷째는, 아담은 전체가 혼이 되었고, 그리스도는 전체가 영이 되었으며, 이 영은 생명을 주는 성령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아담이 혼이 되었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이는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그리스도가 완전히 영이 되신 것도 믿는다. 그러나 이 영이 생명 주는 성령과 별개의 것이라는 것은 믿을 수 없다. 당신은 성령 외에 생명을 주는 또 다른 영이 계시다고 믿는가? 이것은 비논리적이다. 왜곡된 것과 성경의 분명한 말씀 중에서 당신은 어떤 것을 받아들이겠는가? 우리 모두는 단순해져서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무엇에나 「아멘」이라고 말해야 한다.

주는 그 영이심목차로 돌아가기

이제 우리는 고린도 후서 3장 17절을 보자. 그것은 『주는 그 영이시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매우 분명하고 단순해서 비난하는 사람들이 왜곡할 만한 것이 없다. 이 구절에 있는 영은 6절에서 언급된 영인데, 그 구절은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그 영은 생명을 준다고 말한다. 이제 주님은 생명을 주는 그 영이시다. 다비의 새 번역에 의하면, 고린도 후서 3장 7절부터 16절까지는 삽입절로서, 17절이 6절의 연속임을 보여준다. 17절은, 『주는 그 영이시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 영은 6절에서 말한 생명을 주는 바로 그 영이다. 고린도 후서 3장 17절의 주님은 확실히 예수님이다. 딘 알포드(Dean Alford)와 앤드류 머리(Andrew Murray)를 포함하여, 수많은 그리스도인 저자들은 주님이 예수님이라는 것과 주님이 영이시라는 것을 말해 왔다.

이 구절에는 사실 왜곡할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적어도 두 가지 방법으로 여전히 그것을 왜곡하려고 한다. 첫째로, 어떤이는 여기의 주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다만 주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고린도 후서에서 「주(the Lord)」라는 칭호는 항상 주 예수님에게 사용되었고(1:2, 14, 4:5, 13:13),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불리신다(1:3, 11:31). 3장 16절과 18절에서처럼, 3장 17절의 주님은 의심할 것 없이 아버지 하나님이 아닌 주 예수님을 가리킨다. 이 구절에 있는 주님이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전통적인 가르침에 일치시키려는 왜곡이며, 삼위일체의 문제에 관한 순수한 계시를 회피하는 것이다.

두번째 왜곡에 따르면, 주님이 영이시라고 말하는 것은 주님이 실지로 영이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주님을 대표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을 왜곡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없는 사상을 순수한 계시에 덧붙여 성경을 바꾸는 것이다. 성령이 주님을 대표한다는 사상을 제시하는 구절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 그런 구절은 없다. 왜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성경을 왜곡시키는가? 그것은 바로 그들이 그리스도가 그 영이시라는 순수한 계시 안에 머물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삼위일체에 대한 전통적인 가르침 안에 머물고자 한다.

순수한 말씀목차로 돌아가기

기독교는 너무 낡았다. 의견과 전통과 관념으로 가득 차 있다. 주님의 회복은 우리를 순수한 말씀으로 돌아가게 한다. 우리는 기독교의 관념이나 전통 혹은 어떤 사람의 가르침을 주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성경의 순수한 말씀을 주의한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왜곡하는 방식이 아닌 순수한 방식으로 성경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는다.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성경을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우리가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정죄한다. 그들은 왜곡된 방식으로 성경을 믿고,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쓰여진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성경을 믿는다. 이사야 9장 6절에서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린다고 말할 때, 우리는 『아멘』이라고 말한다. 고린도 전서 15장 45절에서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다』고 말할 때, 우리는 『아멘』이라고 말한다. 고린도 후서 3장 17절에서 「주는 그 영」이시라고 말할 때, 우리는 또한 『아멘』이라고 말한다. 비난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가르침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에 이 구절들을 왜곡한다.

누가 우리 앞에서 이 구절들을 가지고 우리를 이단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누가 이단인가? 이사야 9장 6절에 따라 아들이 아버지이시고, 고린도 전서 15장 45절과 고린도 후서 3장 17절에 따라 오늘날 주 예수님이 생명 주는 영이시라고 말하는 우리인가, 아니면 두 신성한 아버지와 두 생명 주는 영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인가? 두 신성한 아버지와 두 생명 주는 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 이단인지! 우리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이단들에 대하여 말해야 하며, 이러한 이단들은 폭로되어야 한다. 우리는 절대로 성경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절들을 왜곡시킨 결과, 두 신성한 아버지와 두 생명 주는 영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단적이다. 이러한 고소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자신을 변명할 것인지 지켜보자.

삼위 양식론이라는 이단목차로 돌아가기

니케아 공회의에서 제정된 정통 신조는 사벨리우스(Sabellius)로 예시되는 삼위 양식론과 아리우스(Arius)로 대표되는 삼신론을 부인했다. 사벨리우스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시 존재함을 믿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단지 환경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시는 한 분 하나님의 세 가지 나타남이라고 했다. 그와 반대로 아리우스는 세 하나님을 믿었다. 그에 따르면 아버지가 한 하나님이고, 아들은 다른 하나님이며, 성령은 또 다른 하나님이다. 물론 이것은 이단이다. 아리우스의 이단이 니케아 공회에서 정죄되었지만,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 일부를 포함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잠재의식 속에서 세 하나님을 붙잡고 있다. 과거에 여러분 중 많은 사람들이 깊은 속에서 은밀하게 이 신앙을 붙잡았다.

삼위 양식론은 어느 정도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쳐 나아가서 이단적인 극단에 이르렀다. 삼위 양식론자들은 하나인 면은 보았지만 셋인 면을 오용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계시가 끝난 후에 성령만 남았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영원 안에 있는 신격의 셋의 동시 존재와 상호 내재를 부인한다. 그들은 이것을 부인하지만 우리는 믿는다. 삼위 양식론은 성경 안에 있는 진리의 양면성이라는 안전 장치를 소홀히한다. 성경에 있는 모든 진리는 두 방면을 갖고 있다. 당신이 안전하게 되려면 이 두 방면 사이에서 균형 잡혀야 한다. 하나님의 규정과 원칙과 법에 따라 이 우주 안의 모든 것이 두 면을 갖고 있다. 이것은 심지어 종이 한 장도 두 면을 갖고 있다. 삼위 양식론자들은 한 면만 붙잡고 다른 한 면을 잘못 적용하여 균형과 안전 장치를 상실했다.

삼신론이라는 이단목차로 돌아가기

그와 반대로, 삼신론자들은 셋인 면을 붙들고 하나인 면을 소홀히한다. 그들은, 『만일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세 하나님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들이 세 위격이 되실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사실상 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설명하기 위하여 「세 위격(three Persons)」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데, 이는 「세 위격」이라는 말이 실지로 세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피스 토마스(로마서 강해로 유명함)는 「신학의 원칙」이라는 책에서 신격의 삼위일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혜롭게 썼다. 『위격(Person)이라는 용어 또한 종종 반론을 야기한다. 인간의 모든 언어가 그러하듯이, 이 용어도 부적절하다는, 심지어 명백한 오류라는 비난을 받기 쉽다. 확실히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삼신론에 빠지게 된다.』 아들이 아버지이시고 주님이 성령이시라는 사실을 부인하면서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삼신론의 위험에 떨어졌다. 그들이 삼신론자들임을 부인하고자 해도,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잠재의식적으로 그들은 신격의 세 위격이 세 하나님이라는 관념을 붙잡고 있다. 대부분은 감히 이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지만, 일부는 그것을 인정한다.

1965년에 아들이 아버지이시고 주님이 그 영이시라는 가르침이 이단적이라고 나를 비난했던 한 형제가 나를 방문하러 왔었다. 그는 자신이 세 하나님을 믿는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내가 결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자, 그는 『너희는 신들이며』라고 말한 시편 82편 6절을 들어서 나와 논쟁하려고 했다. 나는 그 구절의 「신들」은 천사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지적해 주었다. 성경 전체에서 한 분 이상의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하는 구절은 없다. 오히려 모든 곳에서 우리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라고 말했다. 그분은 홀로 하나님이시다.

신격의 「세 위격」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틀림없이 「삼신론으로 이끌 것」이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누구나 모르는 사이에 삼신론이라는 이단적인 극단에 떨어진다. 삼신론은 하나인 면의 안전장치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성경은 거듭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한다. 삼신론자들은 셋인 면만 붙잡고 하나인 면을 소홀히하기 때문에, 균형이나 안전 장치가 없다.

삼위 양식론과 삼신론은 둘 다 극단에 치우쳤다. 그러나 우리는 중간에서 균형 잡혀 있다. 우리가 아들은 아버지이시고 주님은 성령이시라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다만 성경을 인용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또한 마태복음 3장 16절과 17절, 고린도 후서 13장 13절, 계시록 1장 4절과 5절, 에베소서 3장 14절부터 17절과 같은 구절들을 믿는다. 우리는 삼일 하나님에 관한 진리의 양면을 다 믿는다. 우리는 삼위 양식론과 삼신론을 둘 다 이단으로 정죄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영원토록 유일한 한 분이심을 믿지만, 또한 그분이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심을 믿는다. 어떤이들은,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셋이면서 동시에 하나일 수 있느냐?』고 물을지 모른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나도 모른다. 나는 당신에게 말해 줄 수 없다. 만일 당신이 이것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마르틴 루터의 말처럼 「하나님의 선생」이 될 것이다.』 삼위일체는 우리의 지적인 이해를 초월하며, 오직 어리석은 자들만이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쓸 뿐이다.

우리가 체험하는 삼일 하나님목차로 돌아가기

사실상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없다. 성경에서 삼일 하나님에 대한 계시는 그분과 사람의 관계 및 사람이 그분을 누리는 것과 관련된다. 삼일 하나님을 지칭하는 첫번째 구절은 창세기 1장 26절인데, 이 구절은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말한다. 이것은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계시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인 신격의 셋이 처음으로 계시된 것은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이다. 이 구절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안으로 세례(침례)를 주고』라고 말한다. 이것 역시 교리가 아닌 체험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많은 용어들, 즉 위격(person), 본체(substance), 실체(hypostasis), 자존(subsistence)등이 신학자들에 의해 발명되거나 채택되었다. 이러한 용어들은 가급적 피하고 단순하게 성경을 인용하는 것이 더 낫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는 것은 모두 잘못 이해되거나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일 하나님을 체험하기 위하여 우리는 오늘날 삼일 하나님이 결국 모든 것을 포함한 생명 주는 영이심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의 체험을 점검해 보라. 비록 많은 비난자들이 체험을 두려워하지만, 우리의 부담은 사람들이 삼일 하나님을 아버지와 아들과 영 곧 하나님 자신이신 모든 것을 포함한 놀라운 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교리적인 이해를 위한 것이 아니며, 절대적으로 우리의 체험을 위한 것이다. 이 나라에 오기 전에, 나는 삼일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사람들에게 분배하기 위해 계신다는 분명한 말씀을 제시하지 못했다. 어느 날 삼일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을 때, 나는 갑자기 삼일 하나님이 사람들 안으로 그분 자신을 분배하는 신성한 분배를 위해 계신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분 자신을 사람 안으로 넣으시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영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이 음식을 먹고, 저장하고, 소화하고, 흡수하도록 입과 위를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만지고, 접촉하고, 안으로 받아들이고, 보유하도록 우리를 영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예배하는 자는 영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요 4:24). 해가 지날수록, 나는 삼일 하나님이 사람 안으로 그분 자신을 분배하기 위해 계신다는 것을 더욱더 확신하게 되었다. 이것은 교리의 문제가 아닌 체험의 문제이다.

우리가 이 사역 안에서 전파하고 가르치는 모든 것은 철저하고도 주의깊게 검토된 것이다. 수년 전에 워치만 니 형제님의 인도 아래서 우리는 성경을 연구했을 뿐 아니라 교회사와 전기와 자서전 및 매우 유명한 그리스도인 교사들의 저술들을 연구했다. 많이 연구하고 조사한 후에, 우리는 순수한 말씀에 의해 빛 비춤 받았으며, 주님은 우리의 누림이신 그분 자신과 하나님의 표현인 교회를 많이 계시해 주셨다. 회복이 이 나라(미국)에 오기 전에, 여러분 중 많은 사람이 사람의 영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그리스도가 만유를 포함한 분으로서 우리가 체험할 수 있도록 생명 주는 영이 되셔야 한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삼일 하나님이 우리가 체험하도록 그분의 택한 백성인 우리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계신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우리가 있는 지방에서의 교회 생활의 실행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오래 전에 주님은 우리에게 빛 비추시고 이러한 것들을 계시하셨으며, 우리는 오랜동안 그것들을 실행해 왔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본 진리들을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볼 수 있도록 그것을 제시하기 원한다. 적어도, 우리는 그리스도인 대중이 진리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도록 진리를 위하여 하늘을 맑게 해야 한다. 모든이가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 있는 체험과 삼일 하나님의 분배하심과 합당한 교회 생활의 실행에 대한 진리를 알아야 한다.

많이 연구한 후에 우리는 성경에 따라 삼일 하나님은 교리적인 이해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의 체험을 위하여 계시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만일 우리가 체험을 소홀히한 채 교리로 삼일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자신이 어려움에 빠진 것을 발견할 것이다. 젊었을 때 나는 니케아 신조에 따른 삼위일체에 대해 가르침 받았는데, 가톨릭과 개신교가 모두 그 신조를 믿었다. 내가 형제회의 가르침 아래 있었을 때, 나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아들의 이름으로써 아버지께 기도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것을 체험으로 실행했을 때 어려움에 빠졌다. 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 가운데 누구에게 기도를 드려야 하는가?』하고 스스로 반문했다. 기도할 때 나는, 『실수해서는 안 된다. 그 영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상기시켜야 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실행하기를 주의했다.

내가 처음으로 니 형제와 함께 머물렀을 때, 중국 내지 선교회 소속의 한 중국인 복음 전도자를 초청하여 우리에게 말씀을 전하도록 했다. 니 형제가 내게 개인적으로 말하기를, 이 형제가 중국 내지 선교회의 중국인 복음 전도자 중에 가장 영적인 사람으로 여겨진다고 했다. 그는 메시지를 전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주 예수님이 성령과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오늘날 성령은 바로 주 예수님이십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자 멀찍이 앉아 있던 니 형제는 큰 소리로 『아멘』이라고 했다. 그것은 나를 놀라게 했다. 집회 후에 니 형제와 산책하고 있었을 때 그는, 『윗트니스 형제,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하고, 오늘날 주 예수님이 그 영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이후로 나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도록 최상의 도움을 받았다. 그 이래로 줄곧 나는 삼일 하나님의 실제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갔다.

우리는 교리로 분리되고 구별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체험은 어떤가? 체험에 따르면, 셋인가 하나인가? 신약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모두 우리 안에 계신다고 말한다(엡 4:6, 고후 13:5, 요 14:17). 당신의 체험에 따라 당신 안에는 세 분이 계시는지 아니면 한 분이 계시는지 말해 달라. 당신이 신격의 셋을 말하는데, 생각을 사용하면 그들은 셋이시다. 그러나 그들을 체험하기 위하여 영을 사용하면 단지 한 분이시다.

최근에 나는 삼일 하나님이 교리적인 이해를 위해 있지 않고 하나님의 실제를 체험하기 위해 있다고 말하는 많은 저술들을 읽었다. 만일 우리 구주가 생명 주는 영이 아니시라면, 어떻게 우리가 그분을 접촉할 수 있는가? 근본적인 해석에 따르면,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그분을 접촉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의미한 용어일 뿐이다. 아들이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오셨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성경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어떤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우리 안에 사시고 거하신다. 이것이 신약의 계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사신다고 말하는 구절이 어디 있는가? 그러한 구절은 없다. 우리의 체험에서도 그것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우리의 체험에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신다. 체험으로 돌이킬 때,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한 분임을 볼 것이다. 우리 영 안에 거하시는 생명 주는 영이신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신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멘』이라고 말하여 분명한 말씀을 순수하게 믿어야 하며, 우리의 체험을 돌아보아야 한다. 해석할 필요가 없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순하게 취하고 믿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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