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nglish
  • 中文 (中国)
  • Español
  • 한국어
  • 제목:

    복음의 수호: “크리스천 학자들과 사역의 인도자들” 의 공개 서한에 대한 답변 (2)

    요약:
    ‘삼일성,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 교회에 관해: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발췌한 열 일곱 개의 인용문에 대한 답변’ 에 관한 한국어 번역 저작권은 LSM 소유이며, LSM 의 승인을 받고 이곳에서 사용하였습니다. © 2011 DCP출판사 판권 소유 본 출판사의 명기된 허락 없이는 이 책의 어떤 부분도 복사, 녹음, 정보 저장 및 검색 체계를 포함하여 도안, 전자, 기계 상의 […]

    복음의 수호: “크리스천 학자들과 사역의 인도자들” 의 공개 서한에 대한 답변 (2)

    ‘삼일성,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 교회에 관해: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발췌한 열 일곱 개의 인용문에 대한 답변’ 에 관한 한국어 번역 저작권은 LSM 소유이며, LSM 의 승인을 받고 이곳에서 사용하였습니다.

    © 2011 DCP출판사 판권 소유

    본 출판사의 명기된 허락 없이는 이 책의 어떤 부분도 복사, 녹음, 정보 저장 및 검색 체계를 포함하여 도안, 전자, 기계 상의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재생하거나 유포할 수 없습니다.

    초판 발행: 2010년 12월(영어 원문)/2011년 7월(한국어 번역)

    DCP 출판사는 아래 기관이 발간하는 서적을 출판합니다.

    Defense and Confirmation Project (DCP)
    P. O. Box 3217
    Fullerton, CA 92834

    DCP 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신약 사역 및 지방 교회들의 실행을 수호하고 확증하기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빌립보서 1장 7절
    내가 여러분 모두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나를 여러분의 마음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갇혀 있을 때나 복음을 수호하고 확증할 때나, 여러분 모두는 나와 함께 은혜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편집자 주 (註): 이 책의 제목 <복음의 수호: “그리스도인 학자들과 사역의 인도자들”이 보낸 공개 서한에 대한 답변 (2)>에서 사용된 복음 (the gospel) 이라는 용어는 일부 독자들이 이해하는 것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선포된 충만한 기쁜 소식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한 그분의 운행 전체를 망라합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복음은 ‘복음 진리의 말씀’ (골1:5, 엡1:13, 행2:42, 딛1:9) 을 통해 사도들의 가르침 안에 계시된 모든 진리를 포함합니다.


    목차

    서문목차로 돌아가기

    교회사를 통틀어 많은 학자들이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감상, 그리스도인의 신앙, 교회 사에 기여해왔다. 우리는 진리에 대한 그처럼 신실한 청지기들의 수고와 통찰력으로 인하여 주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학자로서의 지위를 남용하여 종종 자신들의 피상적인 연구를 마치 잘 알려진 학설인양 가장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의심할 줄 모르는 대중에게 타인들의 신앙과 실행을 잘못 제시했다. 그렇게 한 것은 그리스도께, 그리고 그분의 교회에게 큰 손상을 준 것이다.

    ‘학자’라는 명칭은 사실에 입각하여 편견없는 연구를 하는 사람, 그리고 연구 과정에서 참고한 출처를 정확히 제시하는 데 신실한 사람을 의미한다. 세상의 학자들이 학계에서 유지해야 할 최소한의 수준이 그 정도지만, 그리스도인 신학자들의 수준은 그보다 더 높아야 한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양심의 제한 아래 다른 이들을 공정하고 의롭게 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학자라 자처하는 이들은 가능한 한 직접 근원적인 자료 조사를 하고 연구 대상들에 대하여 정확하고 균형잡힌 제시를 하여, 전문가로서 최고의 표준을 견지해야 한다.

    2007년 초에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학자들과 사역의 인도자들’1이라는 사람들이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 (LSM)2 와 지방 교회들의 인도자들에게, 위트니스 리가 한 어떤 말들을 “거부하고 출판을 중지하기를” 요청하는 공개 서한3을 인터넷 상에 올렸다. 공개 서한이 근거로 제시한 문서는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발췌한 일련의 짧은 인용문들뿐이었다. 모든 인용문이 원래의 문맥을 떠난 채 제시되어,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에 대하여 왜곡되고 균형 잡히지 않은 인상을 갖게 했다. 그 서한의 진정한 목적은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와 지방 교회들의 인도자들이 위트니스 리의 어떤 가르침을 거부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에 익숙한 사람들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서한의 목표는 믿는 이들이 위트니스 리의 사역을 떠나고, 지방 교회들 안에서 모이는 믿는 이들과의 교제를 끊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 대부분이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의 가르침을 폭넓게 대한 적이 없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이름과 신용과 근무처의 이름을 공개 서한에 첨부함으로써, 학자적인 명성을 이용하여 인지도에서 오는 권위를 그 서한의 내용에 부여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서한의 정확성과 공정성과 균형성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나아가, 오류나 불균형이 밝혀졌을 때에는 그에 대해 답변을 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그들은 문맥을 떠나 인용된 말들이 왜곡된 조망을 제시하여 남을 부당하게 비난했다는 것을 들었을 때 주의했어야 했다. 애석하게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2007년 2월에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와 지방 교회들의 대표자들은 공개 서한이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분명하고 직접적인 방식4으로 인터넷에 간략한 답변을 올렸다. 이 간략한 답변은 공개 서한에 서명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개별적인 편지로도 발송되었다. 그 편지는 많은 수신인들을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와 지방 교회들의 대표자들과의 대화에 초대했다. 두 명의 서명자들만이 응답했는데, 그 두 사람 모두 사안들에 대한 추가 조사나 고려 없이 우리의 항의를 일축했다.

    우리는 간략한 답변을 제시할 때, 두 가지를 약속했다. 그것은 공개 서한이 제기한 폭넓은 신학적 주제들을 취급하는 보다 긴 답변을 하겠다는 것과, 문맥을 떠나 공개 서한에 제시된 몇몇 인용문들에 대한 답변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보다 긴 답변은 원래 2008년5 12월에 인터넷에 발표되었다. 간략한 답변과 보다 긴 답변이 다 이 시리즈의 1권에 담겨 있다. 본서에서 우리는 문맥을 떠나 인용된 것들에 대한 답변을 하고 있다.

    2009년 12월에 ‘크리스천 리서치 인스티튜트’(CRI) 는 <크리스천 리서치 저널>(Christian Research Journal) 에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의 가르침과 실행을 재조사한 것을 실었다. 그 특별호 표지는 1970년대에 CRI가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것에 관해 “우리가 틀렸었다”라고 선언했다. 그 저널이 다룬 내용은 6 년에 걸친 근원적인 조사 작업의 최종 결론이었다. CRI가 새롭게 발견한 것들을 출판할 계획임을2009년 늦가을에 안 후, 우리는 본서의 출판을 보류했다. 그것은 CRI의 재평가가 입지를 갖게 하기 위해서였고, 공개 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이 CRI가 훌륭하게 제시하는 내용을 재고할 시간을 갖게 하기 위해서였다.

    CRI의 대표인 행크 해네그래프(Hank Hanegraaff)와저널의 편집장인 엘리옷 밀러(Elliot Miller)는 저널 출판에 이어 ‘성경문답자(Bible Answer Man)’라는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서, CRI 가 발견한 사실들에 대해 두 번에 걸쳐 토론했다.6 대부분이 그 저널과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했지만, 공개 서한에 서명한 두 사람인 노르만 가이슬러 (Norman Geisler)와 론 로즈(Ron Rhodes)는 2010년 2월에 비판적인 반응을 발표했다. 가이슬러/로즈의 반응은 처음에 가이슬러의 개인 웹싸이트에 올려져 있다가 후에 가이슬러가 공동 창립한 버리터스 신학교(Veritas Seminary) 웹 싸이트에 올려졌고 결국에는 공개 서한 웹 싸이트에도 올려졌다. 가장 최근의 게시문은 공개 서한에 서명했던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가이슬러와 로즈의 결론에 링크시켰다. 공개 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이 진리와 학문성에 있어서 심각한 오류가 있는 가이슬러와 로즈의 반응을 그처럼 맹목적으로 보증하는 것은 그들이 형편없음을 반영한다.7

    사실, 공개 서한 자체도 서명인들로 알려진 모든 사람들의 관점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행크 해네그레프는 후속 저널에서 가이슬러와 로즈에 반응하는 한 기사에 이렇게 썼다. “내가 전화를 건 처음 두 학자는, 공개 서한을 알지도 못했고, 그 결론을 보증한 것도 아니었고, 자신들의 이름이 그런 문서에 들어갈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고 말했다.” 8 그러므로 해네그레프는 “지금까지 우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명인들의 명단이 부풀려졌다는 의심을 살 만한 이유가 있다.”라고 결론지었다.9 이러한 지적이 격려가 되지만, 우리는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로 되어 있는 나머지 사람들이 양심에 따라, 우리의 답변과 CRI 의 심도 있는 재평가의 빛 가운데, 공개 서한의 근거 없는 주장을 평가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크리스천 대중이 본서의 매 쪽에 제기된 쟁점들을 알게 된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공정한 생각을 가진 분별력 있는 그리스도인 독자들이, 공개 서한이 집어넣어 주려는 견해와는 반대로, 우리의 가르침이 공통 신앙의 범주 안에 있음을 보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또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 학자들과 사역의 인도자들”이라 하며 자신들이 일하는 기관의 명성과 평판을 끌어다가 자신들을 권위자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학식과 그리스도인 행동에 있어서 높은 수준의 성실성을 유지할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본서는 위트니스 리의 사역을 매도하는 허위 진술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그리스도인 학자들과 사역의 인도자들 사회에서 보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인의 정식 해명에 있어서 학자로서의 더 높은 표준을 지켜주기를 촉구한다. 우리의 진정한 바램은 본서에 있는 답변들이 우리 독자들과 서명인 자신들의 그리스도인 양심에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되풀이해서 말하거니와, 우리는 진리를 간절히 사모하는 모든 이들과 열린 대화를 나누기 원한다. 또한 주님께서 그리스도 안의 같은 믿는 이들과의 좀더 의미 있는 교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주시도록 그분을 앙망한다.

    밴슨 필립
    대니얼 토울
    앤드류 유
    크리스 와일드

    2010년 8월

    1. 2007년 1월 9일 공개 서한과 관련된 언론 광고에서.
    2. LSM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사역의 저서들을 출판하는 곳이다.
    3.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 및 ‘지방 교회들’의 인도자들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 www.open-letter.org에서 볼 수 있다.
    4. www.lctestimony.org/ResponseToOpenLetter.html에서 볼 수 있다.
    5. www.lctestimony.org/LongerResponse.html에서 볼 수 있다.
    6. 관련된 크리스천 리서치 저널 (Christian Research Journal)과 라디오 방송물은 www.contendingforthefaith.org/a-brief-history-of-the-relationship-with-hank-hanegraaff-and-cri을 참조하라.
    7. 가이슬러와 로즈의 논문에 있는 좀더 심각한 오류를 지적하는 일련의 글들은 www.contendingforthefaith.org/a-response-to-norman-geisler-and-ron-rhodes-defense에서 볼 수 있다.
    8. 행크 해네그래프, “분별(DISCERN),” 크리스천 리서치 저널(Christian Research Journal) 33권 3호, 영문판 12쪽
    9. 같은 책15쪽 각주 17

    장 1삼일성,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 교회에 관해: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발췌한 열 일곱 개의 인용문에 대한 답변 목차로 돌아가기

    © 2010 by Living Stream Ministry

    1.1 머리말 목차로 돌아가기

    2007년 초에 자신들을 ‘그리스도인 학자들과 사역의 인도자들’ 이라고 밝힌 사람들이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Living Stream Ministry)와 ‘지방 교회들’의 인도자들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인터넷에 올려 놓았다. 공개 서한에서 그들은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떼내어 발췌한 수많은 인용문을 거부하고 철회할 것을 우리에게 요청했다.1 우리는 이미 그 공개 서한에 답변했다. 처음에는 간략한 답변을 보냈고, 나중에는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문맥을 떠나 발췌한 인용문으로 터무니없이 비난한 우리의 신앙에 관하여 완전한 변호를 담은 상세한 답장을 보냈다.2

    우리는 공개 서한이 문제 삼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중요한 문제들에 관해 지난 번의 답변에서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지만, 발췌문들에 대해서도 설명하기로 약속했으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그 약속을 지키려 한다. 공개 서한에서는, 서명인들의 의도대로 그 발췌문들을 문맥에서 따로 떼어 한데 모음으로써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기본적인 교리들에 상반되거나 그 교리들을 위태롭게 한 것처럼 보이게 하여” 독자들에게 충격적인 인상을 주었지만, 이렇게 많은 발췌문을 늘어놓음으로써 준 인상은 위트니스 리나 지방 교회들 안에 있는 우리가 실지로 믿고 있는 것들을 공정하고 정확하게 대변하지 않는다.3 그러나 인용문들은 합당한 문맥과는 별도로 공개 서한 속에 담겨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이 인용문들을 검토하기에 앞서 우리는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이 어떤 식으로 인용문들을 제시했는지에 대해 몇가지 전반적인 중점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서명인들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고, 그들의 의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1.1 우리를 비난하는 서명인들의 의도를 밝힘 목차로 돌아가기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은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인용한 글들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어긋난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이 어떻게 어긋난 것인지는 설명하지 않은 채 그것들을 발표했다. 열일곱 개의 인용문들은 ‘하나님의 본성’, ‘인간의 본성’, ‘복음주의 교회들과 교파들의 적법성’ 이라는 제목 아래 나열되어 있지만, 그러한 전반적인 제목 외에는, 인용문 중 그 어떤 부분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비평이 없다. 서명인들은 비난받아야 할 각 인용문 자체가 증거가 된다고 믿었던 것같다. 그러므로 서명인들이 밝히지 않은 것들을 우리가 여기에서 명확히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각각의 사례에서 무엇이 쟁점인지를 알고 있다. 그것은 이러한 비난들이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며, 또한 우리의 답변도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답변 중 일부는 삼십 년 동안 공개되었지만, 공개 서한의 서명인 중에서 그것을 실질적으로 반박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4

    과거에 이러한 동일한 의문점들을 가지고 우리를 문제 삼았던 어떤 사람들은 직접적인 연구나 우리와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염려를 내려놓았다. 예를 들어, ‘크리스천 리서치 인스티튜트’ (Christian Research Institute)(CRI)와 ‘행동하는 답변들’ (Answers in Action (AIA)이라는 두 개의 주류 변증 사역 단체는 우리가 출판한 책들을 읽고 우리와 폭넓은 대화를 나눈 후에 우리가 정통적인 그리스도인들임을 확신했다.5 이것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CRI 그리고 AIA의 공동 창립자이자 현 대표자가 바로 현재 공개 서한이 문제 삼고 있는 것들에 대해 목소리를 낸 원래의 두 근원이기 때문이다. 풀러 신학교 역시 같은 문제점들에 대하여 연구한 후 우리의 가르침이 “본질적인 모든 방면에서 진실하고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대표”함을 발견했다.6

    많은 독자들이 ‘학자들과 사역의 인도자들’이라는 서명인들의 지위만 보고, 공개 서한에 제시된 인용문들이 논란의 여지가 있고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본질적인 교리들과는 다르다는 그들의 주장을 옳다고 생각한다. 믿는 이들은 대체로 학자들과 사역의 인도자들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지만, 일반 대중이 알고 있는 것처럼, 전문가로 알려진 사람들도 때로는 그 신분을 악용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여기에 제시된 증거를 점검해 보고, 단지 ‘학자들과 사역의 인도자들’이라는 서명인들의 지위때문에 우리에 대한 그들의 비난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1.1.2 모든 믿는 이들은 공통 신앙을 위해 싸워야 할 책임이 있음 목차로 돌아가기

    우리는 서명인들이 제시한 공개 서한의 내용의 성실성을, 믿는 이들이 두 가지 관점에서 검토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느낀다. 첫째로, 우리는 인용문에서 제기한 쟁점은 모든 믿는 이들이 싸워 지켜야 할(유 3절)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에 관한 것이므로 대부분의 믿는 이들이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서명인들이 인용문에서 쟁점으로 삼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본질적인 교리들과 관련된 것들을 독자들 앞에 명명백백히 밝혀, 그 인용문들이 원래의 문맥과 위트니스 리의 광범위한 저술의 맥락에서, 공통 신앙에 대한 합당한 이해를 확실하게 지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둘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인 학자들과 사역의 인도자들’이 일반 믿는 이들보다 더 면밀히 조사 한다고 느끼지 않으며, 학자들의 연구가 불합리하고 불성실할 경우 일반 믿는 이들은 그 진상을 조사할 능력이 없다고 느끼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모든 일을 무조건 학자들이나 사역자들에게만 미룬다면 우리는 우리 모두에게 전달된 신앙을 위해 싸우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신 공동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1.1.3 성실성과 신빙성에 관한 의문 목차로 돌아가기

    그러나 우리는 그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에게 먼저 자신들이 한 일을 돌아보고 서명을 철회할 기회를 주지도 않은 채 그들의 성실성을 검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공개 서한에 대해 답장을 두 차례나 보냈고, 이 답장은 한동안 인터넷에(첫 번째 답장은 3 년 반, 두 번째 답장은 1 년 반) 공개되어 있었다. 또한 우리는 대부분의 서명인들에게 개별적으로 편지를 보내어, 위트니스 리의 글을 문맥을 벗어나 인용한 것을 지적했고, 믿을 만한 그리스도인 학자들과 기관들이 우리의 글들을 철저히 연구하고 논점들에 대해 우리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 후에 내린 긍정적인 결론들을 보여 주었다.7 우리가 서한을 보낸 후, 지난 이 년 동안 두 명의 서명인들만 답장을 보내왔는데, 둘다 답변 내용이 부정적이었다. 한 명은 자신이 위트니스 리의 글에서 인용한 지면만 ‘조사’했음을 인정했다. 다른 한 명은, 우리의 가르침이 그리스도인의 공통 신앙의 본질적인 교리와 일치하며 그 교리에 전혀 손상을 주지 않는다는 결론을 철저한 조사 후에 내린 학자들과 기관들의 신빙성을 일방적으로 무시했다.

    더구나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은 ‘일곱 개 나라에 있는 70 명 이상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학자들과 사역의 인도자들’이 우리의 가르침에서 오류를 발견했다고 선언하며, 독자들이 그런 허풍에 압도되기를 원했다.8 사실상 이것이 인터넷을 통해 그들이 공개 서한을 광고할 때 강조한 요점이었다.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은, 자신들이 문제가 있다고 하면 문제가 있는 것으로 독자들이 결론짓기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반대로, 우리를 변호하게 된 사람들은 ‘수년간에 걸친 광범위한 대화’와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에서 출간된 위트니스 리와 워치만니의 책자들에 특별히 중점을 두면서 지방 교회들의 주요 가르침과 실행을 철저하게 재검토하고 조사하는 방식’을 취했다. 9 그뿐 아니라,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은 그들이 일하는 기관이 이 일에 대해 책임지는 것을 조심스럽게 부인한 것과 달리, 우리를 지지하는 전문가들은 그들이 일하는 분야에서 잘 알려진 기관들과 학자들로서 지지했다. 독자들은 우리를 지지하는 이들과 우리를 반대하는 이들의 이러한 대조적인 행동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아래에서 인용문 자체에 대하여 답변할 때, 독자들도 우리를 비난한 이들의 성실성을 주의 깊게 가늠해 보아야 할 것이다.

    1.1.4 우리의 소망과 기대 목차로 돌아가기

    우리는 일반적인 문제점들을 지적했고,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인 대중 앞에서 공개 서한에 제시된 인용문에 대해 설명하고, 독자들 스스로가 원래의 문맥 속에서 그 인용문의 참된 의미를 판단하기를 요청한다. 우리는 독자들이 공정하고 냉철하게,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미덕인 사랑 안에서 판단하리라 믿는다. 또한 우리는 독자들이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의 행동을 판단하고, 그들이 학자이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같은 믿는 이들로서 제대로 일했는지의 여부를 점검하리라 믿는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고 기도하지만, 이미 우리가 앞에서 했던 답변들이 두 번이나 무시된 적이 있기 때문에, 서명인들 모두가 이 답장에 마음이 움직이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공개 서한은 앞으로 여러 해 동안,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이런 저런 형태로 인터넷에 올려져, 이러한 것들을 잘 모르는 이들이나 생각이 반듯한 이들에 의해 유통되리라 예상한다. 하지만 우리는 독자들의 분별력을 신뢰하며, 독자들의 보이지 않는 판단이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과 선전자들의 공개적인 입장 표명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1. http://open-letter.org에서 볼 수 있다.
    2. 두 답변 모두 www.lctestimony.org/OpenLetterDialogue.html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이 두 답변은 open letter response (1).pdf 에서 책자 형태로 볼 수 있다. 이 두 번의 답변에서 우리는 비평가들에게 대응하여 쟁점을 해결하는 것과 관련해 공개 서한에서 제기한 다른 사항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3. 이 글 전체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지방 교회들’이라 할 것이다. 이처럼 포괄적인 용어를 사용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바와 그리스도인의 진리에서 그런 용어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는 우리의 글, ‘풀러 신학교와의 대화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하는 지방 교회들과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가르침들에 대한 진술’을 참조하라. 특히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하나의 진정한 터’라는 부제가 붙은 부분을 참조하라. 이 부분은 www.lctestimony.org/StatementOfTeachings.html#genuine-ground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글 전체와 풀러 신학교의 성명서는 concerning our teachings.pdf 에서 볼 수 있다.
    4. 우리의 답변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 위트니스 리,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해 [1971]
      • 위트니스 리, 성경의 순수한 말씀에 따른 삼일 하나님에 대한 계시 [1976]
      • 위트니스 리, 삼일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분명한 계시 [1976]
      • 란 캥거스, 양태론, 삼신론, 성경에 따른 삼일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계시 [1976]
      • 란 캥거스, 삼일 하나님: 우리의 신앙과 체험의 증언 [1976]
      • 란 캥거스, 배타주의에 관한 진리 [1978]
      • 란 캥거스, 구원에 관한 진리 [1978]
      • 란 캥거스, 지방 교회들의 신앙과 실행 [1978]
      • 위 모든 글들은 원래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에서 출판됐으며 www.contendingforthefaith.org/index-of-responses-to-criticisms-of-the-local-churches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위 소책자를 통한 답변들은 <진리의 변호와 확증>(한국복음서원, 1996)이라는 단행본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5. <지방 교회들: 진정한 믿는 이들이자 그리스도의 몸의 같은 지체들> [DCP Press, 2008]을 참조하라. 온라인 상에서는 hanegraaff-passantino-fuller.pdf 에서 볼 수 있다.
    6. <복음의 확증: 지방 교회들과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가르침에 관해> [DCP Press, 2009] 를 참조하라. 책자의 형태로 concerning our teachings.pdf 에서 볼 수 있다.
    7. 서명한 이들은 또한 크리스천 리서치 저널의 “우리가 틀렸었다” [32권 6호]와 “분별” [33권 3호]을 받아 읽었을 것이다.
    8. 서명자들의 출신 국가는 일곱 개 나라이다. 곧 에쿠아도르, 멕시코, 우크라이나(이 나라 출신 서명자는 핵과학자임), 영국, 브라질, 러시아에서 각각 한 명씩 참여했다. 나머지는 모두 미국 출신이다.
    9. www.lctestimony.org/FullerStatement.pdf

    장 2‘하나님의 본성에 관하여’ 목차로 돌아가기

    인용문 1

    한다. 어떤 이들은 그분께서 아버지라고 불리시기는 하지만 실지로는 아버지가 아니시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분께서 아버지라 불리시면서 아버지가 아니실 수 있겠는가? …아무도 가까이할 수 없는 위치에 계신(딤전 6:16)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 나오실 때 그분은 아들이시다. 따라서 한 아들이 주어지셨지만 그분의 이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신다. 우리에게 주어지신 바로 이 아들이 바로 아버지 자신이시다. (위트니스 리 전집 1965년도 제1권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의 영, 820-821쪽)

    인용문 2

    …신격 전체, 삼일 하나님께서 육체가 되셨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 235쪽)

    인용문 3

    삼일성에 관한 전통적인 설명은 매우 부적합하며 삼신론에 아주 가깝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와 연결되실 때, 하나님은 뒤에 남겨지시지 않고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 계시지도 않는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뒤에 남겨지시고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 계신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한 위격이신 아버지가 또 다른 위격이신 아들을 보내어 구속을 성취하시고 그 후에 아들이 또 다른 위격이신 영을 보내신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사상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보좌에 계시는 반면 영이 믿는 이들 안으로 들어온다. 믿는 이들은 기도할 때 아버지 앞에 엎드려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침 받는다. 신격을 이렇게 분리된 위격들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다.(생명 메시지, 제3권 220-221쪽)

    인용문 4

    아들은 아버지이시고 아들은 또한 영이시다.…그리고 아들이신 주 예수님은 또한 영원하신 아버지이시다. 우리의 주님은 아들이시요 또한 아버지이시다. 할렐루야! (삼일 하나님-아버지와 아들과 영-에 관하여, 영문판 18-19쪽)

    인용문 5

    그러므로 이것은 분명하다. 주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또한 주님이시다. 그분은 아버지, 아들, 영, 전능하신 하나님, 주님이시다. (삼일 하나님에 관한 분명한 성경적 계시 www.contendingforthefaith.org/the-clear-scriptural-revelation-concerning-the-triune-god)

    인용문 6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위격이나 세 하나님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 한 실재, 한 위격이시다.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 52쪽)

    2.1 그리스도인 신앙의 본질적인 교리 문제―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신격 안에 영원히 구별되심 목차로 돌아가기

    ‘하나님의 본성에 관하여’ 라는 제목 아래 처음 여섯 개의 인용문을 모아 놓은 것은 각 인용문이 말하는 신격에서의 한 위격과 또 다른 위격의 동일시, 곧 아들과 아버지를 동일시 하거나 아들과 영을 동일시하는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위의 인용문을 따로 떼어 자세히 살펴보게 한 것은, 위트니스 리가 신격 안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영원한 구별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하나이신 방면만 가르치고 셋이신 방면은 가르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려는 의도인 것 같다. 그리스도인 교회는 우리의 하나님이 영원히 하나이시며 동시에 셋이시라는 점을 오랫동안 확증해왔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역대로 간혹 어떤 사람들이 가르친 것처럼 ‘한 분 하나님을 가리키는 다른 용어일 뿐’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시간 안에 나타나신 단계들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다. 양태론(modalism)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하나님께서 시간 안에서 나타나신 연속적인 단계들을 의미하거나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일 뿐 신격 안에서 그 셋이 영원히 구별되는 실재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개념이다. 서명인들은 위트니스 리에게 이러한 양태론의 혐의를 씌우려 했던 것 같다. 양태론은 고대로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도 일부 믿는 이들과 기독 교사들 사이에 있는 아주 오래된 이단이다. 양태론 개념을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우리는 양태론에 대해 역량 있는 학자가 제시하는 간략한 정의를 제시하고자 한다.

    2.1.1 정의된 양태론 목차로 돌아가기

    켈리(J. N. D Kelly)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초기 교회의 교리에 대한 자신의 저서1에서 양태론(전문 용어로는 ‘양태론적 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이다)의 단순한 형태와 정교한 형태 모두에 대한 최고의 해설을 제공한다. 단순한 형태의 양태론은 2세기 말에 서머나의 노에투스(Noetus of Smyrna)와 “프락세아스”(Praxeas)가 신봉한 대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즉 아버지이시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동일하며 아버지와의 구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고통당하시면, 아버지도 고통당하신다. 신격에는 어떤 구별도 있을 수 없다.”(켈리 120). 이러한 단순한 형태의 양태론의 본질은 하나님은 오직 아버지로만 존재하시고 아들은 “아버지 자신의 투영으로서 말로나 명목상으로만 구별된다.”는 것이다(켈리 120). 같은 설명이 영에 대해서도 적용될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양태론에 의하면 신격 안에는 구별된 세 위격이 아닌 유일한 아버지만 계시며 그분이 때로는 아들로, 때로는 영으로 불리신다.

    보다 조직적이고 철학적인 형태의 양태론은 사벨리우스 (Sabellius)(그의 이름에서 사벨리아니즘이 비롯되었다)가 주장했다. “그는 신격을 세 운행 안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단일체로 간주했고…아버지는 형태 혹은 본질이며, 아들과 영은 아버지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양태들(modes)로 간주했다.” (켈리 122)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진정한 실재들이지만 영원히 그러하지는 않고, 아버지가 시간 안에서 일하시는 과정에서 “먼저는 아들로, 그 후에는 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이해하는 것이다(켈리 122). “따라서 창조자이시자 율법 수여자로 여겨지신 한 신격은 아버지였고, 구속을 위해 한 줄기 광명이 투영되듯 비치다가 사라지셨으며, 그러다가 세 번째로는 바로 그 신격이 영으로서 은혜를 불어넣고 주시기 위해 운행하셨다.”(켈리 122, 에피파니어스 (Epiphanius) 주해, 해어 Haer 62.1) 이렇게 보다 복잡한 형태의 양태론의 본질은 한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일시적 혹은 연속적인 세 양태인 아버지와 아들과 영으로서 나타내시어 그분의 구속 계획을 성취하시며, 세 양태가 서로 동시에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하는 데 있다. 단순한 형태의 양태론처럼 이러한 형태의 양태론에서는 신격 안에 구별되는 세 위격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한 위격이 시간 안에서 두 번째가 되고, 이후에는 세 번째가 된다. 두 형태 모두에서 양태론은 삼일성의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이단적인 극단에 이르렀고, 삼일성의 진정한 셋인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영원히 함께 존재하심을 부인하는 오류를 범했다.

    위트니스 리는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할 것임이니라” (사9:6),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나니”(고전 15:45하), “주님은 그 영이시니”(고후 3:17)라는 성경 말씀을 그대로 가르친 것 때문에 세 위격의 영원한 구별을 부인하고 양태론을 믿는다는 부당한 비난을 받았다.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이 위에서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발췌한 여섯 개의 인용문을 한 데 모아 놓은 것도 같은 비난을 하려고 했음이 분명하다. 문제는 참으로 ‘위트니스 리가 신격 안에서 셋의 영원한 구별을 부인하고 양태론을 가르쳤는가?’ 하는 점이다.

    2.1.2 위트니스 리는 양태론을 반대하고 신격에서의 영원한 구별을 지지함 목차로 돌아가기

    위트니스 리가 구두로 전한 메시지와 출판물에서 거듭 분명하게 밝혔듯이, 그는 양태론을 전하지 않았다.2 그는 자신의 청중들에게 양태론의 오류에 관해 많은 주의를 주었는데 그 중에 두 번은 다음과 같다.

    양태론(Modalism)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모두 영원하지 않고 모두 동시에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한 하나님의 일시적인 세 표현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삼신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세 하나님이라고 가르친다. 이 학파들 중에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는가? 여러분은 양태론자인가? 제발 여러분이 양태론과 관계없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 극단적인 관점은 이단이기 때문이다. 세 하나님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도 큰 이단이다. 아마 과거에 여러분 중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세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120-121쪽)

    양태론은 또다른 이단으로서, 극단적인 위치를 취한 결과이다. 양태론을 주장한 사람은 사벨리우스(Sabellius)였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영원히 동시에 존재하시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양태론적 사상에서 셋은 다만 신성한 존재의 연속적인 나타남이거나 그분의 활동의 일시적인 세 양식 (mode)이다.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신 이사야 9장 6절과, 주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신 요한복음 14장 9절이 양태론 입장을 지지하는 데 사용되었다.

    삼신론이 세 위격의 문제를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세 하나님으로 종결된 것처럼 양태론은 신격의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아들이 오셨을 때 아버지는 끝났고 영이 오셨을 때 아들이 끝났다고 가르쳤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다. (생명 메시지(4), 127-128쪽)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위트니스 리가 신격 안의 구별이 신성한 삼일성에 관한 우리의 이해와 가르침에서 존중되어야 할 영원한 실재임을 분명하게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 사이에 영원한 구별이 없다는 모든 사상을 거절했다. 다음의 발췌문이 그 증거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 사이에 구별은 있지만 분리는 없다. 아버지는 아들과 구별되시고, 아들은 그 영과 구별되시며, 그 영은 아들이나 아버지와 구별되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들께서 분리되셨다고 말할 수 없는데, 그것은 그분들께서 상호 내재, 즉 서로 안에 사시기 때문이다. 삼일성의 셋은 동시에 존재하시면서 구별되시지만 그분들의 상호 내재는 그분들을 하나로 만든다. 그분들은 그분들의 상호 내재 안에서 공존하시므로 구별은 되시지만 분리되지는 않으신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의 주요 항목의 중점, 20쪽)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시므로 그분들이 정확히 똑같다고 말할 수 없다. 그분들이 정확히 똑같다면 아버지와 아들과 영 사이에 어떤 구별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다만 하나이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아니실 것이다. (주님께 유용한 그릇, 영문판 157쪽)

    하나님은 삼일 하나님이시다. 한 분 유일한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세 방면을 가지고 계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모두 하나님이시며, 영원하고, 동시에 존재하며, 서로 안에 계시며, 분리되실 수 없다. (진리 공과, 1단계 제1권 29쪽)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 교회가 오랫동안 확증해 온 바와같이, 위트니스 리는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분의 위대한 계획 또는 경륜을 성취하시기 위해 시간 안에서 움직이실 때에도 각각 경륜 안에서 구별되는 움직임을 가지실 정도로 셋 사이의 구별이 존중되어야 함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이러한 이해는 다음의 발췌문에서 분명하게 선포된다.

    아버지는 계획, 곧 경륜의 첫 단계를 성취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시는 일을 하셨다. 선택하시는 일과 예정하시는 일은 아버지께서 이루신 것이며 아들이나 영께서 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것을 깨닫는 데 주의 깊어야 하지만, 그분은 그것을 홀로 하지 않으셨다. 삼일 신격의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그 영과 함께 선택하시고 예정하셨다. (장로 훈련 (3)-이상을 실행하는 길, 110-111쪽)

    아버지의 계획하시는 일에서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영과 함께 일하셨다고 말할 수 있지만, 아들께서 아버지와 함께 영에 의해 그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우리는 영이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그 계획의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도 없다. (같은 책, 112쪽)

    하나님께서 그분의 예지를 사용하셨으며, 우리를 선택하셨고, 예정하셨으며,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것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또한 하나님은 육신이 되셨고 구속을 성취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고 거룩하게 하고 계시며 인도하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아들이 우리를 선택하셨다거나 영이 우리를 예정하셨다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육신이 되셔서 우리 죄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셨다고도 말할 수 없다. 사도행전 20장 28절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교회를 사셨다고 말한다. 우리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사셨다거나 구속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셨다고는 말할 수 없다. 성경에서 우리가 아버지의 교회나 영의 교회는 볼 수 없지만, 그리스도의 교회와 하나님의 교회는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는데, 이것은 아버지로서 그분의 기능이 낳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같은 책, 133-134쪽)

    또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의 두 번째 단계인 성취의 단계에서 아들은 모든 일을 이루셨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영에 의해 성취하는 일을 이루셨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영께서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셨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영에 의해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는 모든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또한 아버지께서 육체가 되셨고 육체 안에서 이 땅에서 사셨다고 말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로 가셔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십자가 위에서 흘려진 피가 아버지 예수의 피라고도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다고 말해야 한다(요일 1:7).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아버지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말할 수도 없다. (같은 책, 112쪽)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위트니스 리를 신성한 삼일성의 셋 사이의 영원한 구별을 부인하는 양태론자라고 주장하거나 암시하는 것조차도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것처럼,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에 대한 양태론적 관점을 분명히 부인하였고, 영원히 존재하는 신격 안의 실재들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구별을 분명하게 확증했다.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은 “위트니스 리가 양태론자가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영원히 구별되신다는 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왜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에 관해’라는 제목 아래 제시한 여섯 개의 인용문처럼 말했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이 질문에 합당하게 답변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여섯 개의 인용문 모두가 신성한 삼일성에 관해 동일하게 중요한 또 다른 방면, 즉 하나님이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도 하나라는 점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공개 서한에서처럼 따로 분류된 여섯 개의 인용문이 양태론으로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위트니스 리가 말하려는 것, 즉 보다 큰 문맥에서 여섯 개의 인용문 내용들이 분명히 말하고자 했던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붙들어야 할, 하나님이 하나(the oneness)라는 진리를 확증하는 데 있었다. 우리는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도 이 진리에 동의하기를 바란다.

    2.1.3 하나님은 하나라는 진리와 위트니스 리 목차로 돌아가기

    우리는 하나님이 셋이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신격 안에서 영원히 구별되는 실재들이심을 인정하는 한편, 또한 우리가 믿고 경배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시고, 세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삼일 (triune)이심을 확실히 믿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모세에게 반향하여)과 바울이 각각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님이시다(막 12:29, 비교 신 6:4)”,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고전 8:6)”라고 선포한 것처럼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라는 기본적인 이해를 믿음 안에서 간직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셋(three)이심을 이해하지만 세 하나님(three Gods)이라는 것은 단호히 부인한다. 역대로 그리스도인 교회의 신앙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삼일성 안의 한 하나님의 실재를 고백한다. 이것은 분명히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큰 비밀이지만, 우리는 인간의 지성에 따라 혼자서, 무의식적으로라도 세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너무나 강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삼일 하나님에 관해 자신이 이해한 것을 점검해 볼 것을 독자들에게 요청한다. 여러분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분리된 세 위격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3, 초기 교회 시대4와 종교개혁 시대5에 그리스도인 믿음에 있어서 위대한 교사들과 현 시대의 존경받는 신학자들6이 합당하게 확증하는 것처럼, 항상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서로 분명하게 구별되지만 결코 분리되실 수 없다고 바르게 이해하는가? 우리가 믿기에 이 질문은 삼일 하나님의 비밀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공개적으로 그렇게 고백하지는 않지만 관념에서는 종종 세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잘못된 신앙인 삼신론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어왔다. 사실상 우리가 위에서 검토한 다양한 형태의 양태론은 초기 교회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분리된 세 하나님이라는, 이성적이지만 분명히 잘못된 개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겨났다(켈리 119). 하지만 신성한 삼일성을 합당하게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는 더 교묘한 위험 요소는 결코 양태론이라는 명백한 오류가 아니었다. 그리스도인 교회는 이러한 양태론 이단을 반복해서 물리쳐왔다. 또 다른 형태의 극단적인 믿음은 세 하나님이 있다는 관념인데, 그런 관념이 많은 믿는 이들의 부주의한 생각, 심지어 기독 교사들의 방심한 생각 속에서 종종 암암리에 신봉되면서 오랜 세월동안 교회 안에서 유지되었고 현재까지도 우리 가운데 지속되고 있다. 우리는 양태론이라는 명백한 오류는 비교적 쉽게 배척하고, 삼일성 안의 한 하나님이라는 참된 진리도 믿음으로 진지하게 이해하지만, 그것은 분리된 세 위격 즉 분리된 세 하나님이라는 단순화되고 숨겨진 개념으로 더 쉽게 대치되곤 한다.

    위트니스 리는 그의 책에서 오늘날 많은 믿는 이들의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삼신론에 대한 관념과 자주 싸웠다. 그의 책에는 삼신론을 분명하게 고발한 곳이 많다. 그러나 여기에 제시한 몇 가지 예로도 요점이 충분히 파악될 것이다.

    오늘날 어떤 근본주의 성경 교사들은 사실상 무의식적으로 삼신론적이다. 이들 교사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구별되실 뿐 아니라 분리되어 계신다고 말한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구별되신다(distinct)고 말할 수는 있지만, 분리되신다 (separate) 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분리시킬 수 없고, 영에게서 아버지와 아들을 분리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셋 모두 동시 존재하시며 상호 내재하시기 때문이다. (신약의 결론―하나님, 39쪽)

    또 다른 큰 이단은 삼신론(tritheism)이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동시에, 분리되신 채 공존한다고 말한다. 삼신론자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상호내재를 무시한다. 따라서 그들은 삼일 하나님을 세 하나님으로 분리한다. 이것은 오늘날 만연해 있는 이단이다. 성경에서 오직 한 하나님만 계신다고 분명하게 말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감히 이러한 관점을 견지하는 것을 자백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마음 속으로는 이렇게 믿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지식, 영문판 72쪽)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참으로 하나이시고 한 하나님이시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조금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삼일성(Trinity)을 믿지만, 결코 세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세 하나님을 믿는 삼신론(三神論)은 이단이며 우리는 그것을 유죄판결해야 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신격 안의 아버지와 아들과 영 사이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다.(요한 서신 라이프 스타디, 보급판 210쪽)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삼일 하나님의 셋을 세 신(gods)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삼신론의 그릇된 가르침을 믿는다. 세 신이 있다는 가르침인 삼신론은 이단이다. 신격의 셋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신격의 셋은 상호 내주하시며 서로 안에 사신다. 이것은 상호 내재라 불린다.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내재적 조망, 107쪽)

    2.2 인용문 3과 6 목차로 돌아가기

    공개 서한에 있는 처음 여섯 개의 인용문에 대한 평가를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각 문맥에서 위트니스 리가 신격 안의 셋이 분리된 하나님들이라는 잘못된 관념을 뒤엎으려 한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인용문 3과 6에서 이러한 시도는 매우 분명하다.

    인용문 3

    삼일성에 관한 전통적인 설명은 매우 부적합하며 삼신론에 아주 가깝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와 연결되실 때, 하나님은 뒤에 남겨지시지 않고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 계시지도 않는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뒤에 남겨지시고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 계신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한 위격이신 아버지가 또 다른 위격이신 아들을 보내어 구속을 성취하시고 그 후에 아들이 또 다른 위격이신 영을 보내신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사상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보좌에 계시는 반면 영이 믿는 이들 안으로 들어온다. 믿는 이들은 기도할 때 아버지 앞에 엎드려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침 받는다. 신격을 이렇게 분리된 위격들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다.(생명 메시지, 제3권 220-221쪽)

    인용문 6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위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 한 실재, 한 위격이시다.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 52쪽)

    우리는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이, 인용문 3에서 위트니스 리가 “삼일성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을 “상당히 부적합하고” “삼신론에 아주 가깝다”고 규정한 것 때문에 마음이 상했을 수도 있음을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전통이나 개인적 정서가 어떻든 간에, 신격의 셋이 분리된다는 관념을 인정하는 것은 신성한 삼일성에 관한 적절한 설명이 아니다. 따라서 영께서 믿는 이들 안에 거하기 위해 오실 때, 그 행동은 영의 행동으로 구별된다. 그럴 때 우리는 반드시 그분의 오심과 내주하심이 아버지나 아들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의 영원한 존재 안에서 영은 아버지와 아들과 구별되시지만 분리되실 수는 없기 때문이다.7 그 셋이 구별은 되시지만 분리는 되시지 않는다는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합당하게 붙잡아야 할 신앙이기도 하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대부분의 경우에, 영께서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은 영과 떨어져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리스도인 독자들은 이러한 인상을 받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고, 서명자들이 인용문 3을 불쾌하게 여긴다는 사실은 바로 그들 자신도 이러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위트니스 리가 부정하고 있는 것은 영이 아버지와 아들과 분리되어, 분리된 세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상이다. 그는 인용문 3에서 강하게, “하나님은 뒤에 남겨지시지 않고,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 계시지도 않는다.”라고 말하며, 영이 믿는 이와 연결될 때 아버지와 아들이 영과 분리되신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이것은 셋 사이의 구별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땅히 그래야 하듯이, 분리된 세 위격, 즉 분리된 세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무효화 한다. 더 나아가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은 독자들이 이 인용문을 통해, 지금 영이 믿는이들 안에 계시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지금 보좌에 계신다는 것을 위트니스 리가 부인한다고 이해하기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가 부인하고 있는 것은 “신격이 이러한 분리된 위격들로 쪼개진다.”는 잘못된 개념이지 아버지와 아들이 보좌에 계신다는 사실이 아니다. 다른 곳에서 위트니스 리는 이 점을 분명히 밝혔다.

    우리는 또한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아들 안에 계실 때 또한 보좌에도 계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둘이 구별은 되어도 분리될 수는 없다. 이것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신성한 비밀이다. 한 면으로, 신격 안에 있는 셋은 동시에 존재한다. 다른 한 면으로, 그분들은 상호 내재한다. 그분들은 서로 내주하고 계시며 서로 침투되어 계신다…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예수님 안에도 계시고 동시에 보좌 위에도 계셨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기가 힘들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분은 영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하시며 시공에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 25-26쪽)

    물질적인 영역의 논리와 달리,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들에 있는 보좌에 계셨고, 또한 땅에서는 아들과 함께 계시고 아들 안에 계셨다(요 8:29; 10:38; 14:10, 20, 21; 17:23). 그분들은 확실히 구별은 되시지만 분리되실 수는 없다. 아들이 계시는 곳에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아들 안에 계신다. 이와 같이, 영은 믿는 이들 안에 거하실 때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분리되지 않고 거하신다. 이것이 위트니스 리가 인용문 3에서 강조하는 중점이다.

    이와 같은 강조는 인용문 6에도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분리된 세 위격이 아니며, 세 하나님도 아니다.” 공개 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이 이 기본적인 문제에 이의를 제기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정통성을 심각하게 의심한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분리된 위격(separate persons)이나 세 하나님이라는 관념을 옹호하기 원하는가?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독자들도 우리가 묻는 것처럼, 서명자들이 이 인용문을 왜 불쾌하게 여기는지를 물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또한 위트니스 리가 “그분들은 한 하나님, 한 실재이시다.” 라고 말한 것에 서명자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위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밝혔듯이, 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철저히 기독교적이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자 셋이시기 때문에, 한 실재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또한 철저하게 기독교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또한 셋이신 것도 확실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삼일 하나님에 관한 진리의 한 방면만을 나타낸다. 만일 우리가 강력하게 주장한 바와 같이 그분이 한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은 또한 한 실재이다.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은 아마 “그분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한 위격이시다.” 라는 위트니스리의 말에 걸렸을 것이다. 전통적인 사상은 삼일성의 비밀을 보통 “세 위격 안의 한 하나님”으로 표현해 왔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러나 앞서 제시된 그의 다른 책들을 통해 우리가 본 배경과 반대로 위트니스 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영원히 구별되시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이해될 수는 없다. 단지 위트니스 리가 인용문 6에서 셋이 하나의 위격이시라고 말했다는 것 때문에 그를 양태론적 관점 안에 두려고 하는 것은 그 인용문의 출처인 문맥에도 어긋나고, 그의 광범위한 저술에서 드러나는 강한 증거와도 반대된다. 기껏해야, 위트니스 리가 위격이라는 용어를 신격 안에 있는 구별을 묘사하기 위한 최고의 용어로는 좋아하지 않는 것을 따질 수 있을 것이고, 확실히 그러한 논쟁은 그의 글의 여러 발췌문들에 근거하여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종종 신성한 삼일성의 셋을 묘사하기 위해 위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그의 주저함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그는 자주 신학자인 그리피스 토마스(현재 회장을 포함한 4명의 서명자들이 함께 가입되어 있는 달라스 신학교의 공동 설립자 중 한 사람)가 이 단어의 사용에 대해 설명한 것을 덧붙였다.

    세 위격이라는 단어는 성경에는 없고, 성경 해석을 위해 사람이 추가한 것이다. 셋-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세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달리 무엇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세 위격’이라는 명칭이 사용되는 것이다. 사실상 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설명하기 위해 ‘세 위격’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도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다. 왜냐하면 세 위격은 실지로 세 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주석으로 유명한) 그리피스 토마스(Griffith Thomas)는 그의 책 신약의 원리에서 신격의 삼위일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혜롭게 썼다. “‘위격’ 이라는 용어도 가끔식 반대를 당한다. 인간의 모든 언어가 그렇듯이, 그것이 부적절하고, 심지어 긍정적인 오류라고 비난받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것은 확실히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삼신론에 이를 것이다. …‘실질’(substance) 또는 ‘위격’ (Person)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이 단어들을 사람의 실질이나 인격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삼위일체에 대한 진리와 체험은 신학 용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세 위격에 관해서는 이 정도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되며,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삼신론이 될 것이다. (삼일 하나님―아버지, 아들, 영―에 관하여, 10 11 W.H. 그리피스 토마스, <신학의 원칙들: 39 개의 글들에 대한 소개>에서 인용함 [6판, 그린우드, S.C. 다락방 출판사, 1978], 31)

    세 위격이라는 용어가 가진 문제점은, 일반적인 어법에서 그 단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진짜 세 인격을 가리키고, 세 명의 분리된 존재를 암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하나이시 라는 방면의 진리에 위배된다. 위트니스 리는 위격이라는 단어를 너무 많이 강조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다음의 발췌문이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편리를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하는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많은 복음 전파자들, 사역자들, 목사들, 성경 교사들은 무의식적으로 하나님께서 세 분이시라고 믿고 있다. 그들이 배운 신학에 따르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또한 세 분이시라는 사실에 당혹한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시다(마 28:19). 어떤 이들은 세 인격 안에 한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성경에서 인격(Person)이라는 단어는 삼일 하나님과 관련하여 찾아볼 수 없다. 달라스 신학교 창설자인 그리피스 토마스(W. H. Griffith Thomas)는 인격이라는 단어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면 삼신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인격이라는 단어는 신격의 셋을 묘사하기 위하여 잠시 빌어올 수는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길에 따른 교회 생활의 실행, 94쪽)

    사실, 그는 그의 사역의 책에서 세 위격이라는 용어를 빈번히 사용하는데, 특별히 이 용어의 명백한 위험을 강조하지 않을 때에 그렇다. 다음은 신격의 셋을 지칭하기 위해 그가 이 용어를 사용한 많은 예 중 하나이다.

    같은 원칙으로 우리의 유일한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라는 세 위격을 가지고 계시지만, 우리는 결코 그분들이 세 하나님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분들은 셋이지만 한 하나님이시다. 그분들이 한 하나님이지만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라는 세 위격이 있다. 이분이 바로 우리가 섬기고 경배하는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또한 이분이 우리가 믿고 흠모하는 유일한 주님이시다! 할렐루야! (삼일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영―에 관하여, 영문판 25-26쪽)

    이처럼 우리에게는 전통적인 실행을 따르면서 세 위격이신 하나님을 말하는 위트니스 리의 분명한 예들이 있다. 또 우리에게는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모아 놓은, 한 위격이신 하나님을 말하는 그의 인용문이 있다. 위격(person)이라는 용어에 대한 그의 합당한 주저함과 그 용어 사용에 대한 그의 관대함을 안다면, 독자들은 인용문 6의 내용에 있어서 위트니스 리에게 잘못이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은 위트니스리의 참된 입장을 인식하는 데 실패했거나, 나쁘게 말한다면, 무시하려고 했다.

    2.3 인용문 1, 4, 5 목차로 돌아가기

    이제 인용문 1, 4, 5로 돌아가 보자. 공개 서한에서처럼, 이 인용문들만을 놓고 보면 독자들은 위트니스 리가 그의 가르침에서 삼일성의 위격 사이의 차이점을 흐리고, 더 나쁘게는 무효화 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앞부분에서 우리가 적절하게 증명했기를 바란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가 아들을 아버지와 동일시하고 아들을 영과 동일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평이한 말로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인데, 곧 인용문 1, 4, 5에서 위트니스 리가 해설하는 다음의 세 절에서 아주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 임이라(사 9:6).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혼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5).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몇몇 신학자들이 삼일성의 위격들에 구별이 있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때로는 위격들을 잘못 분리시키는 정도에까지 이르고, 아들을 아버지와 영과 동일시하는 성경적인 동일시를 이러한 구별들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는 반면, 위트니스 리는 애초에 왜 성경에서 동일시가 이루어 지는지를 이해하고자 했다. 우리는 이러한 접근 방식이, 신성한 영감으로 된 성경 본문을 가장 중요시함으로써 성경 외의 다른 것이 진리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리지 못하게 한다고 느낀다. 우리는 이러한 동일시를 말하는 것이 다름 아닌 성경이라는 점과, 이러한 동일시의 의미도 성경에서 발견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몇몇 신학자들은 성경 밖의 신학적 체계를 적용하여, 위의 성경 구절에서 아들께서 아버지와 영과 동일시되시는 것을 부정한다. 위트니스 리는 성경에 있는 이러한 부분들과 그외의 다른 모든 부분들을 이해할 때 그러한 접근 방식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때 신학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성경 밖의 신학 체계가 신성한 진리를 측정하는 척도가 되어야 한다는 관점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신학자들이 아들과 아버지의 동일시와 아들과 영의 동일시를 부인하는 이유는,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과는 반대로, 자신들의 신학이 아들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고, 마지막 아담(그리스도)이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실 수 없고,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영이실 수 없다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 하려면 이 절들의 의미에 대한 다른 해석을 제시해야 한다. 만일 지면이 허락된다면 여기에서 그에 대한 다른 해석들이 제시되고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8 이러한 다른 해석에 대한 완전한 평가는 없지만 그것들 모두에 대한 기초는 분명하다. 이러한 해석들로 대표되는 신학은, 아들이 어떤 식으로도 아버지와 영과 동일시될 수 없기 때문에 아버지와 영과 동일시될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하는 성경 본문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며 이 절들을 달리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트니스리는 이러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은 위트니스 리의 진술이 성경 본문에 근거함을 알려주는 인용문 앞뒤 내용들은 하나도 소개하지 않았지만, 사실 위트니스 리는 인용문 1과 4에서 이사야서 9장 6절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위트니스 리는 인용된 두 부분 모두의 이전의 문맥에서 이사야9장 6절을 인용한다. 두 인용문에서 그가 강조한 것은 성경은 우리에게 주어지신 아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우리 모두가 믿어야 하는)이실 뿐 아니라, 영원한 아버지(서명자들은 우리가 믿지 않기를 희망하는)라고도 불리심을 말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각 인용문에서 위트니스 리가 의도한 것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필요했지만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생략한 인용문의 앞뒤 문맥을 아래에서 괄호로 묶어 추가로 제시한다.

    인용문 1 [문맥에서]

    [이사야서 9장 6절에 있는 대구(對句)는 이렇게 말한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그 이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할 것임이라.” 여기에 언급된 아들이 그리스도 이시라는 것은 참으로 분명하다. 그런데 그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리신다. 이 절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기록되어 있다.] 아들은 아버지라 불리시므로 그 아들은 틀림없이 아버지이시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그분께서 아버지라고 불리시기는 하지만 실지로는 아버지가 아니시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분께서 아버지라 불리시면서 아버지가 아니실 수 있겠는가?…어떤 사람도 가까이할 수 없는 위치에 계신(딤전 6:16)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 나오실 때 그분은 아들이시다. 따라서 한 아들이 주어지셨지만 그분의 이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 라고 불리신다. 우리에게 주어지신 바로 이 아들이 바로 아버지 자신이시다.(위트니스 리 전집 1965년도 제1권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의 영, 820-821쪽)

    인용문 4 [문맥에서]

    아들은 아버지이시고
    아들은 또한 영이심

    [이사야서 9장 6절은 말하기를,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그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한다. 이 절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기’와 짝을 이룬다. 그리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아들’과 짝을 이룬다. 그렇다. 그분은 아기이시다. 그런데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베들레헴의 구유에 난 아기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다. 아기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나이신 것처럼 아들과 영존하시는 아버지 또한 하나이시다. 아들은 영원한 아버지이시다. 이 문제를 완전히 설명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그의 이름은…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이신 것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아들이 아버지가 아니시라면,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라 불리시겠는가? 만약 우리가 이 절에서 말하는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이 절에서 말하는 ‘아들’이 또한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심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한 계시를 믿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있는 말씀에 따라 아기가 되신 주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깊이 믿는다.] 그리고 아들이신 주 예수님은 또한 영존하신 아버지이시다. 우리의 주님은 아들이시요 또한 아버지이시다. 할렐루야! (삼일 하나님―아버지와 아들과 영―에 관하여, 영문판 18-19쪽)

    일단 우리가 위에 제시된 위트니스 리의 말에 대한 성경 근거를 알고, 또한 그가 말한 내용들이 전적으로 성경적임을 깨닫는다면, 서명자들이 인용문 1과 4를 본문과 따로 떼어 놓음으로 얻는 극적인 효과 중 일부는 상실된다. 그의 요점은 바로 이것이다. 성경은 아들이 아버지라고 불리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아들이 어떤 방면에서 아버지라는 것은 분명히 타당한 인식이다. 그리고 아들이 어떻게 아버지이신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위트리스 리가 여러 곳에서 강하게 주장한 것처럼 우리는 아들이 아버지와 구별되신다는 동등하게 타당한 진리의 관점을 여전히 유지한다. 우리는 위트니스 리가 “이 문장은 쉽게 이해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쓰여있다.” 즉 “이 문제를 충분히 설명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러나 성경이 그렇게 말했다.” 라고 했을 때 암묵적으로 그 구별을 인지하고 있다고 믿는다. 어떤 이는 아들와 아버지의 동일시를 부정하는 해석들을 통하여 그 어려움이 제거된 설명을 하고자 했을 수 있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성경이 확고하게 지지하는, 신격 안에서의 상호 내재의 실재를 호소하는 방식으로 그 어려움을 설명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8-11).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같이 설명했다.

    이 상호내재에 관한 말씀이 요한복음 14장10절 상반절에 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여기에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내재가 있다. 요한복음 14장11절에서 주님은 계속하여,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신다고 말한다. 이 어떠한 비밀인가!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시기 때문에 아들이 말씀하실 때 아들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분의 일을 하신다. 그분들이 서로 안에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이 하시는 말씀 안에서 그분의 일을 하신다. (신약의 결론―그리스도, 32-33쪽)

    어떤 이들은 아들과 아버지가 분리되시고 아들은 단지 아버지를 대표하신다고 잘못 생각해 왔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대표의 문제가 아니라 체현의 문제이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체현되어 계신다(골 2:9). 우리는 아들을 볼 때 아버지를 본다. 왜냐하면 아들은 아버지의 체현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체현이신 아들은 아버지와 분리되실 수 없다. 그분과 아버지는 상호 내재의 방식으로 하나이다. (신약의 결론―그리스도, 34쪽)

    아들을 아버지와 동일시하거나 아들을 그 영과 동일시하는 성경의 어려운 부분을 설명할 때, 위트니스 리는 그가 느끼기에 이 성경 구절들의 밑에 깔린 상호내재의 실재를 신격 안에서의 하나에 대한 근거로 호소했다.9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시며 아버지와 아들은 영원히 상호내재하시기 때문에, 이사야 9장6절에서 볼 수 있듯이, 때때로 성경은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시되신다고 말한다. 아버지와 확실히 구별되시는 아들은 영원하신 아버지라고 불리신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거주하시고 일하시기 때문이다. 아들을 보는 것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참으로 아들이 계시고 참으로 아버지가 계신다는 사실은 그분들 사이에 구별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내주하시고 아들께서 아버지를 나타내신다는 의미에서 아들이 아버지라 불리실 수 있고 또한 아버지시라는 사실은 신격 안의 하나를 존중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명인들이 우리에게 인용문 1과 4의 출판을 중단하고 부인하라고 한 요구는 표적을 잘못 겨냥한 것이라 믿는다. 그들이 실지로 요청하고 있는 것은 영감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선지자 이사야의 선포를 전파하는 것을 중지하고 부인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기를 분명히 거절한다.

    인용문 5에서 위트니스 리는 아들을 아버지와 동일시 할 뿐 아니라 그 영과도 동일시 한다.

    인용문 5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시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분은 또한 주님이시다. 그분은 아버지, 아들, 그 영, 전능하신 하나님, 주님이시다.(삼일 하나님에 관한 성경의 명확한 계시) www.contendingforthefaith.org/the-clear-scriptural-revelation-concerning-the-triune.html)

    그러나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명확히 하지 않은 것은, 이 인용문의 본문 앞에 소개된 더 넓은 문맥에서 위트니스 리가, 참으로 주 예수님이 아버지와 그 영과 함께 하는 아들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자 주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련의 성경 구절들을 검증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 단락의 서두에서 제시한 세 절은 위트니스 리가 검증한 것 중 일부인데, 그는 이 문맥에서 좀 더 많은 내용을 제시한다.10 다시 말해서, 위트니스 리의 요점은 성경 자체가 이러한 동일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반드시 견지해야 할 구별의 관점에서 그 구절들을 설명하기 어렵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그냥 무시할 수도 없고, 잠재적인 삼신론에 따라 그것들을 해석할 수도 없다. 이사야 9장 6절에 관해 위에서 말한 것(아들을 아버지와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일시 한 것)에 더하여, 우리는 이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고 신격 안에는 오직 한 생명 주시는 영만 계신다는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을 추가해서 말해야 한다. 더 나아가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주님은 그 영”이심을 말하고, 바울 서신의 전후 문맥은 주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 영과 동일하시다는 인식은 바울 자신이 정당화 한 것이다. 최근에 출판된 가장 최근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의 학문적 연구가 반영된 영어 표준역 스터디 바이블에서 바울이 아들과 그 영을 동일시 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한 점은 매우 흥미롭다. (우리가 짐작하건대, 공개 서한에 서명한 ‘70 명 이상의 복음주의 기독교 학자들과 사역의 인도자들’은 이 성경을 중시한다.)

    이 어렵고 축약된 문장을 놓고 다양한 설명이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 영이 그리스도인의 체험 안에서 함께 기능을 발휘한다고, 즉 주님(그리스도)이 그 영의 사역을 통하여(그분들은 여전히 구별된 두 위격이시지만) 우리에게 오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ESV스터디 바이블[Wheaton, Ill.: Crossway Bibles, 2008] 고전 3:17의 각주)

    이 복음주의 학자들은 다른 가능한 해석으로 그들의 주석을 이어가고 있고 또 그것을 선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은 그분이 “그 영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시는 한(그분들은 여전히 구별된 두 위격이시지만)”그리스도를 그 영과 동일시하는 해석도 유효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시인했다. 확실히 이 해석은 위트니스 리와 같지는 않지만 매우 유사하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그 영과 동일시하는 관념을 허용한다. 위트니스 리처럼 그들도 성경이 이 구절에서 “난해한… 진술” 을 하고 있고 그러한 진술을 이해하는 한 방법은 아들과 그 영을 얼마큼은 동일시하는 것임을 깨닫고 있다. 성경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고 또한 그분을 그 영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위트니스 리의 방식은 아들과 그 영의 상호 내재, 즉 상호 내재에 의해 그 둘이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서명인들은 공개 서한에서 독자들에게 이 점을 밝히지 않았다.

    2.4 인용문 2 목차로 돌아가기

    ‘하나님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제목 아래 있는 나머지 인용은 육체 되심을 다루고 있다. 우리는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에게는 아래의 단어들이 삼일성 안에 있는 구별을 무효화 하거나 시간 안에서 하나님이 움직이실 때 삼위 각자가 가지시는 구별된 역할을 혼잡케 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들이 그 단어들을 보다 큰 맥락에서 떼어 놓았다고 추정한다. 그 단어들은 다음과 같다.

    인용문 2

    …신격 전체, 곧 삼일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the entire Godhead, the Triune God, became flesh )(하나님의 신약 경륜, 235쪽)

    우선 순전히 논리적인 관점으로만 보고, 본문에서 떼어 놓은 이 인용문의 전후 문맥에 호소 하지 않더라도 이 여덟 개의 단어들(영문 참조) 안에 들어 있는 ‘신격 전체’와 ‘삼일 하나님’ 이라는 표현 자체가 삼위일체 내의 구별을 내포한다고 우리는 말하고 싶다. 위트니스 리가 신격 전체라고 한 것은 신격이 단순하고 내적으로 평범한 실재가 아님을 그가 이해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특히 그가 삼일 하나님을 언급한 것은 한 하나님이 셋이시라는 개념을 믿고 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서명인들이 첫번째 제목 아래 있는 다른 다섯 인용문에서처럼 위트니스 리가 신격이 영원히 구별되심을 믿지 않는 양태론자임을 알리려고 이 단어들을 떼어 내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떼어 낸 인용문의 문장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 인용문 자체는 위트니스 리가 양태론자였다는 증거가 될 수 없고, 우리가 지금까지 위에서 보아온 그의 모든 사역의 책들의 내용으로 보더라도 그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아마도 서명인들이 따로 떼어낸 이 여덟 단어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경고하고자 한 것은, 자신들의 평가에 의하면 위트니스 리가 육체 되신 아들의 역할과 아버지와 그 영의 역할들의 구별을 혼동했다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따로 떼어낸 그 여덟 단어들만 가지고 위트니스 리가 삼일성 안의 구별된 역할을 혼동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은 이 단어들을 발췌한 장의 모든 지면들을 읽지 않았거나 독자들이 그것을 읽기를 원치 않았다.11 위트니스 리는 육체 되신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계시에 관련된 여러가지 요점을 완전한 문맥에서 다룬다. 우리는 우리가 인용문 2에서 말한 것의 근거를 제시하도록 필요한 요점 몇 개를 아래에서 인용하겠다.

    마태복음의 시작은 우리에게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처녀의 태 속에 성령으로 잉태 되셨는가를 말해 준다(1:18, 20).(하나님의 신약 경륜, 232쪽)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오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주 예수님은 그분이 역사하실 때 아버지가 함께 역사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셨다(요 5:17). 이것은 구속하는 역사가 또한 아버지의 역사였음을 보여 준다(같은 책, 234쪽).

    그런 다음, 인용문 2와 다음 내용이 뒤따른다.

    …신격 전체, 삼일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경륜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은 아들 안에서 육신이 되셨다. 성령으로 잉태되신 이 분은 ‘하나님-사람’으로 태어나셨다. 우리는 이 ‘하나님-사람’을 ‘아들-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 ‘하나님-사람’은 ‘삼일 하나님-사람’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온전한 하나님이시요 완전한 사람이셨다는 것을 믿는다. 그분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사람’이시다. 그분은 땅에서의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삼십 년 동안 삼일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서 사셨다. 이 삼십 년 동안에 그분은 나사렛에서 대부분 목수이셨다. 그분이 목수 일을 하시는 동안 아버지께서 그곳에 그분과 함께 계셨다 (요16:32). 또한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하시는 동안 그분은 모든 것을 영에 의해 하셨다(마 12:28). 그분은 놀라운 분이시다(같은 책, 235-236쪽).

    마지막으로 그 장의 이 부분에 있는 마지막 단락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아버지가 하신 것은 다 아들 안에서 영에 의해 하신 것이며, 아들이 하신 것은 다 아버지와 함께 영에 의해서 하신 것이며, 영이 하시는 것은 다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것임을 깨닫기 바란다. 신격 안에 있는 셋은 분리되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들은 본질적으로 하나이시다. 경륜적으로는 신격 안의 셋이 연속적이시지만, 본질적인 방면이 여전히 경륜적인 방면 안에 남아 있다. 아버지의 선택하심과 아들의 구속하심과 성령의 적용하심은 모두 경륜적이지만, 이 경륜적인 방면 안에 본질적인 삼일성의 방면이 여전히 있다. 아버지께서 선택하실 때, 본질적인 삼일성이 또한 거기에 있었다. 아들이 구속하기 위해 왔을 때, 또는 영이 적용하기 위해 올 때 본질적인 삼일성이 거기에 있다. 성경 육십육 권의 결론인 요한계시록은 삼일성의 본질적인 방면과 경륜적인 방면을 모두 포함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 계시이다. 우리는 본질적이면서도 경륜적인 놀라운 분을 보았다(같은 책, 238쪽).

    위트니스 리는 “잉태되시고,”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오셨으며,” “육체가 되신” 분이 참으로 아들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아들의 구속’이지 아버지의 구속이나 그 영의 구속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기독교가 오래동안 믿어온 것처럼, 육체 되심의 구별된 행위자(Agent)는 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장에서 그의 요점의 일부는 아들이 육신 안에서 오셨을 때, 삼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그 아들은 아버지와 그 영과 분리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격 안에 있는 셋은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들은 육신 안에서 오셨을 때, 본질적으로 “성령으로 태어나셨다.”(마 1:18,20) 그분이 무엇을 할 때마다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거하시고 그분의 하시는 일 안에서 아버지께서 일하셨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그분은 세상에서 사역하시는 동안에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일하셨고 자기 자신의 통치가 아닌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오셨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그러므로 아들이 육체가 되실 때, 그분은 신격의 셋 가운데 존재하는 상호 거함의 방식 (상호내재)과 그분들이 하나로 함께 일하심의 방식으로 아버지와 아들을 합병시키셨다. 그 후의 출판물에서, 위트니스 리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고 명료하게 밝힌다.

    신성한 삼일성의 하나님은 하나의 합병체이시다(요 14:10-11). 신성한 삼일성의 셋은 그 존재와 하시는 일에서 합병체이시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은 상호 내재하심으로 합병되셨다. 이것에 관해서 주 예수님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10절)라고 말씀하신다. 11절 상반절에서 그분은 계속해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상호 내재하심으로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신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은 하나로 일하심으로 합병체이시다. 10절과 11절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너희는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보았다. 이 일은 나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결코 스스로 어떤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아버지의 일이다. 아버지와 나는 상호적으로 함께 일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하나로 함께 일하는 것은 신성한 삼일성이 합병체임을 계시한다(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 의해 신성한 영광으로 영화롭게 되신 결과, 29-30쪽).

    위트니스 리가 “신격 전체, 즉 삼일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 (The entire Godhead, the Triune God, became flesh.)라고 여덟 개의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셨음”을 시인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 안에서 운행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다(요일 4:2). 그러나 우리는 또한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존재와 행하심에서 아버지와 그 영과 합병하셨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분은 신격 전체 즉 삼일 하나님을 그분의 존재와 행하심 안에 합병하셨다(골 2:9). 그분이 육신 되셨을 때 삼일 하나님 전체가 그분과 함께 계셨고, 그분 안에서 행하셨다. 위트리스 리도 고백한 것처럼 그분은 확실히 육체 되심의 주체이시지만, 자신의 존재와 행하심 안에서 아버지와 그 영을 합병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버지와 그 영으로부터 아들을 떼어 내는 것이고 그 셋을 별개의 인격들로 분리시키는 것이며, 세 하나님을 제안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것이 우리가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무의식적으로 행한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복음주의 학자들이나 사역의 인도자들이라는 서명인들의 지위가 어떠하든, 서명인들과 똑같은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

    2.5 인용 1부터 6까지의 본성에 관하여 목차로 돌아가기

    위에서 보았듯이 위트니스 리는 양태론과 삼신론 모두의 헛점들을 잘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믿기로 위트니스 리는 또한 자신의 가르침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길을 추구하고 또 찾아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그가 어느 쪽의 이단적인 가르침을 지지한다는 말에 설득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독자들이 위트니스리의 글에서 이 여섯 문장들을 따로 떼어 낸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보다는 좀더 공정하고 고귀하고 그리스도인답게 이해하기를 정중히 요청한다. 공개 서한이 출판되기 훨씬 전에, 위트니스 리는 자신의 저서의 일부가 어거스틴(A.D.353-430)의 글처럼 문맥을 무시한 채 잘못 인용되어 그가 양태론자나 삼신론자인 것처럼 보이게 할 것을 알고 있었다.

    여러 해에 걸쳐서 나는 삼일 하나님에 관해 많은 메시지를 전해왔다. 만일 그 메시지에 있는 어떤 문장을 문맥 밖으로 끄집어낸다면, 내가 양태론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또 어떤 문장은 문맥 밖으로 끄집어낸다면, 마치 내가 삼신론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물론 나는 양태론도, 삼신론도 가르치지 않는다.

    신성한 삼일성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선두에 있는 어거스틴 (Augustine)은 때로는 양태론적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때로는 삼신론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분리된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양태론을 가르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셋―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에 또한 삼신론을 가르친다는 비난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한 분이시라는 것, 즉 아들이 아버지라 불리신다(사9:6)는 것과 아들이 그 영이시라는 것 (고전 15:45, 고후 3:17)을 계시하는 성경 구절들을 지적할 때 우리는 양태론을 가르친다는 거짓된 비난을 받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글을 공평하고 온전하게 고찰한다면 우리가 양태론도 가르치지 않고 삼신론도 가르치지 않으며 성경에 따라 삼일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계시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자명해질 것이다.(신약의 결론―하나님, 45-46쪽)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은 자신들 이전에 살았던 다른 이들이, 어거스틴뿐 아니라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과 아타나시우스와 카파도기아 교부들 및 삼위일체에 관하여 견실한 정통 교리를 소유한 다른 교사들의 저서들을 취급할 때 범한 비슷한 잘못을 학자들로서 유의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유감스럽게도,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은 합당한 연구를 위한 기본 원칙 중 하나인, 자신들이 인용한 출처를 정확하고 완전하게 제시해야 한다는 점에서 실수했다. 우리는 독자들이 그들의 심각한 잘못을 인식하고, 부당하게 위트니스 리를 깎아내리려는 그들의 의도에 동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진심으로 믿는다. 우리는 위트니스 리에게 동의하거나 그의 사역을 받는 우리에게 동의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발표한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위트니스 리의 저서들을 부당하고 비전문적이고 비양심적으로 취급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1. J. N. D. 켈리 (Kelley), 초기 그리스도교 교리 (Early Christian Doctrines rev. ed.)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1978), 영문판 119-126쪽
    2. 다음 책자들을 참고하라.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33-34쪽, 45-47쪽, 58-61쪽, 진리의 변호와 확증 27-28쪽, 신약의 결론-하나님 35-36쪽, 신약의 결론-교회 451-453쪽,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122-124쪽, 그리스도의 탁월성 84-85쪽, 장로 훈련 제3권 이상을 실행하는 길 53쪽, 110쪽, 126쪽, 신성한 계시의 중심 노선 28-29쪽, 하나님의 경륜과 신성한 삼일성의 전달의 비밀 영문판 150쪽,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만한 지식, 영문판 71-72쪽, 성경의 기본 계시, 27쪽, 주님께 유용한 그릇, 영문판 157-158쪽, 생명 메시지 2권 127, 132-133쪽, 오늘날 주님의 회복의 주요 항목들의 중점, 23-25쪽
    3. 이어지는 논의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공개 서한에서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위트니스 리의 저술을 인용할 때 언급한 성경 구절들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분리되실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더 많은 말씀들이 인용될 수 있을 것이다.
    4. 터툴리안 (2세기 경): “이것이 내가 선언하는 믿음의 원칙임을 항상 기억해 주기 바란다. 내 믿음이 증언하는 바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서로 분리되실 수 없다는 점이다 (‘교부들의 가르침’에 있는 ‘프락세이아스를 반박하며’ 9권, [John R. Willis 편집, S.J. New York: Herder and Herder, 1966] 영문판 177쪽에서 재 인용);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4세기경): “간략히 말해서 신격은 개별적인 위격들로 분리되지 않는다.” (다섯 번째 신학 연설-성령에 대해 (The Fifth Theological Oration-On the Holy Spirit) 14 단락, 니케아 회의 및 그 후의 교부들 시리즈 2권 [NPNF2] [Philip Schaff 및 Henry Wace 편집. New York: The Christian Literature Co., 1895], VII: 영문판 318쪽에서 재 인용); 가이사랴의 바실 (4세기 경): “왜냐하면 세 위격에 대해 생각할 때 아들이 아버지와 따로 떨어져 계신 것으로 이해하거나, 성령이 아들께로부터 분리되어 계신 것으로 이해하는 등 결코 단절이나 분리의 개념을 떠올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서신들 (Letters) 38번째 서신, 앞의 John R. Willis의 책 185쪽에서 재 인용); 암브로우스 (4세기경):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사이에 구분이 있음을 견지하며 세 위격을 혼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분리됨이 없는 구분이자 복수성이 없는 구분이다.” (그라티우스에게,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대해 4:8, John R. Wills의 책 185쪽에서 재 인용); 675년 7차 톨레도 공회에서 채택된 신조: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세 위격이 서로 분리되시지는 않지만 구분되신다는 점을 선언하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규정한 대로 이 세 위격이 모두 인정되셔야 하지만 분리되셔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J. Neuner & J. Dupuis, 가톨릭 교회 교리 문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신앙 [5차 개정판, London: HarperCollisns Religious, 1991] 영문판 113-114쪽)
    5. 칼빈 외 (1559년): “세 위격은 서로 혼동되지 않고 구분되신다. 하지만 서로 분리되시지는 않으며, 같은 본질을 지니시고, 영원성과 능력에 있어서 서로 동등하시다.” (프랑스인의 신앙 고백 제6조, 기독교 신조에서 인용) [Philip Schaff 편집, David S. Schaff 개정, Harper and Row, 1931,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3], 영문판 363쪽); 마틴 루터 (1566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기로 하자. 곧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신 참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참 하나님이시지만 세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아니고 세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곧 세 사람, 세 천사, 세 아들, 세 창문이라고 할 때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식으로 하나님에 관해서도 서로 다른 세 하나님이 계신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하나님은 그 실체가 그런 식으로 분리되거나 나뉘어지시지 않는다. 오직 유일한 단 하나의 신성한 본질만 있을 뿐이다. 더 이상의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탁상 담화, William Hazlitt 번역 및 편집, [London: George Bell and Sons, 1875], 영문판 75쪽); 2차 헬베티아 고백 (1566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광대하시고 분리되실 수 없는 이 한 분 하나님께서 그 인격이 서로 분리됨 없이, 또 서로 혼동됨 없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구분되신다는 점을 믿고 가르친다.” (16세기 개혁 신앙 고백에서 인용) [Arthur C. Cochrane 편집,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6], 영문판 228쪽).
    6. 아우구스트 H. 스트롱 (August H. Strong): “성경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상호 교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 위격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고 구분해 칭하지만 그 사이에 분리가 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조직 신학 [Old Tappan, N.J.: Revell, 1960, c1907], 영문판 333쪽); H. R. 멕킨토시 (H. R. Mackintosh): “그렇다면 앞에서 주장한 것처럼, 우리가 ‘위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엄밀히 말해, 세 분이 분리된 의식 존재가 아님을 단언하면서도 서로 구분되는 실재가 있다는 점을 믿는 우리의 신앙을 드러낼 딱히 좋은 다른 용어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교리 [Edinburgh: T&T Clark, 1913], 영문판 524쪽); 루이스 벌콥(Louis Berkhof):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여러분에게 한 인격이 있을 때, 구별되는 개별적인 본질도 있다는 점이다. 모든 인격은 구분되는 별개의 개체이다. 그 안에 담긴 인간 본성은 각각 개개의 본성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경우 서로 별개로 존재하거나 분리된 세 개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속성에 있어서뿐 아니라 숫자적으로도 하나뿐인 신성한 본질 안에는 다만 위격의 구분만 있을 뿐이다.” (조직 신학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1941], 영문판 87쪽); 루이스 스페리 쉐퍼 (Lewis Sperry Chafer): “이 지점에 이르러 딱 맞는 적당한 용어를 찾을 수 없는 곤란함이 발생한다. 위격들은 서로 분리되시지 않지만 구분되시기는 한다. 삼일성은 분리되어 존재하시지 않지만 세 위격이 연합된 상태로 이루어진다. 서로 너무도 완전히 연합되어 한 하나님을 형성한다.” (조직 신학 [Dallas: Dallas Seminary Press, 1947], 영문판 276쪽): 로레인 뵈트너 (Loraine Boettner): “우리가 신격 안에 구분되는 세 위격이 계신다고 말할 때 그것은 사람이 서로 별개의 인격이듯 세 위격 각자가 서로에게서 별개로 분리되어 계신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구분되실 수 있지만 분리되시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각자가 동일한 하나의 실체 혹은 본질을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세 위격은 워싱턴과 제퍼슨과 프랭클린이 나란히 존재하듯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들은 서로 배어들고 침투해 계신다. 서로 안에 계시고 서로를 통과해 계신다.” (신학 연구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47], 영문판 109쪽). 이외에도 수많은 자료들을 볼 수 있다.
    7. 찰스 고어 (Charles Gore): “거룩한 삼일성의 위격들은 분리할 수 없는 개체들이시다. 각자가 다른 위격들을 포함한다. 한 분의 오심은 다른 분들의 오심이다. 따라서 성령의 오심은 아들의 오심을 포함했음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아들의 육체 되심 [New York: Charles Scribner & Sons, 1891] 영문판 218쪽); 제임스 데니 (James Denney) “ 여기(고후 3:17)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지적인 체험에 관한 한 그리스도의 영과 그리스도 자신 사이에는 아무런 구분이 없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영을 통해 그리스도인들 안에 거하신다(고린도후서 [London: Hodder and Stroughton, 1894] 영문 134쪽). H. B. 스위트 (Swete): “성령은 그분의 일하심에 있어서 실상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분으로 발견되신다. 그러므로 성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죽은 것이나 영은….산 것이니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내주하시는 것과 동등하게 간주된다.” [생략된 부분은 성경 본문 참조.] (신약에 있는 성령 [London: Macmillan and Company, 1910] 영문 301쪽) W. H. 그리피스 토마스 (Griffith Thomas): “조심스럽게 이 진리의 두 방면을 보존하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 그리스도와 성령은 서로 다르시지만 동일하시고, 동일하시지만 서로 다르시다.”(성령 [Grand Rapids: Kregel Publications 1986 (1913)] 영문 144쪽. 로레인 뵈트너: “우리가 기도할 때 주 기도문에서처럼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할 때 이것은 삼일성의 첫째 위격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 하나님이신 세 위격을 모두 지칭하는 것이다.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신학 연구 [Phillipsburg, NJ: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47] 영문 107쪽) F. F. 브루스 (Bruce)는 골로새서 1장 27절의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라는 구에 대해 언급하며 “바울에게 있어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와 내주하시는 성령은 실제적인 의미에서 같은 개념이었다(비교 롬 8:10-11). 물론 바울은 다른 곳에서 다가올 영광의 소망 또는 보증으로 내주하시는 성령을 제시하기는 한다.”고 말한다 (골로새서, 빌레몬서, 에베소서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4] 영문판 86쪽).
    8. 이 절들에 대한 다른 해석들을 참고하려면 ‘지방 교회들과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가르침에 관한 성명서’에 담긴 ‘신성한 삼일성에서 아들의 구별되심’을 보라 (www.lctestimony.org/StatementOfTeachings.html#divine-trinity에서 볼 수 있다). 이 글은 복음의 확증: 지방 교회들과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가르침에 관해 (DCP Press, 2009), 15-22쪽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웹상에는 concerning our teachings.pdf 에 수록되어 있다.
    9. 상호 내재의 교리는 결코 위트니스 리가 만들어낸 교리가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상호 내재는 교회가 시작된 후로 교회의 확증을 받아왔다. 아타나시우스: “결국 이 사람들은 뱀의 독이 퍼진 것처럼 여전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읽은 것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우리 주님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이라고 하신 말씀을 폄하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마치 불경건한 마음 깊은 곳에서 토해나온 것처럼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 안에 담겨 있고, 아버지가 아들 안에 담겨 있을 수 있느냐?’라고 반박하면서 말이다 (아리안주의 추종자들을 반박하며, 설교 III, NFPF2, 제 IV권 23, [필립 샤프 및 헨리 웨이스 개정. New York: The Christian Literature Co., 1895], 영문판 393쪽). 포이티어의 힐러리 (Hilary of Poitiers):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혼동을 느낀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의 이성의 능력으로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아 알 수 없기 때문이다…[이 분들은] 서로를 담고 계신다. 그 결과 한 분은 영구히 다른 한 분을 감싸고 계시고 다른 한 분은 자기가 감싸고 있는 그분께 감싸여 계신다. 이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풀 수 없는 난제이며, 아무리 연구해도 신성한 존재의 이 상태에 대한 적절한 비유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삼일성에 관해, NPNF2, 제IX권 [필립 샤프 및 헨리 웨이스 개정. New York: The Christian Literature Co., 1895, 영문판 62쪽] 어거스틴: “그러므로 세 위격에서 두 위격이 서로 안에 계시고 모두가 각각의 위격 안에 계시며, 각 위격이 모두 안에 계시고, 모두가 모두 안에 계시며, 모두가 하나이시다. 부분적으로 보는 것이든 ‘거울을 통해 보듯 희미하게 보거나 수수께끼를 풀 듯 끙끙거리며 보는 것이든’ 이것을 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기뻐할지어다. 보는 사람은 그분을 하나님으로 존중하며 감사를 드릴지어다. 보지 못하는 사람은 눈 먼 상태에서 괜히 트집 잡지 말고 경건을 통해 볼 수 있도록 노력할지어다.” (삼일성에 관해, NPNF2, 제III권 [필립 샤프 및 헨리 웨이스 개정. New York: The Christian Literature Co., 1895], 영문판 103쪽). 죠지 불 (George Bull) 주교: “위격들은 서로를 담고 있다. 그리고 스콜라 철학자가 지적했듯 셋 모두가 가늠할 수 없는 소재를 지니고 계신다. 그 결과 한 위격이 어디 계시든 그곳에는 다른 두 위격도 계신다. 다시 말해서 그분들 모두가 모든 곳에 계신다.” (니케아 공회 신조에 대한 변호 제2권 [Oxford: John Henry Parker, 1852], 영문판 652-653쪽). W. H. 그리피스 토마스: “우리가 신격 안에 있는 구분을 언급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구분이라는 말이 서로 분리된다는 뜻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구분은 극히 중요한 상호 내재나 포함을 함축한다.” (신학 원리 [New York: Longmans, Green & Co., 1930], 영문판 31쪽)
    10. 이 책자 전문은 인터넷 상에서 볼 수 있고 인용문 5에서 제시된 바 있다. 독자들은 그곳에서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길지 않은 내용이므로 독자 여러분이 전문을 읽어보기를권유한다.
    11. 이 장 전체를 http://www.ministrybooks.org: 하나님의 신약 경륜 (God’s New Testament Economy) 21장에서 읽어볼 수 있다. 1998년 4월 한국복음서원 발간.

    장 3‘사람의 본성에 관하여’ 목차로 돌아가기

    인용문 7

    그리스도는 두 가지 본성, 즉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가진 분이시다. 우리도 똑같다. 우리는 인성으로 태어났지만, 신성으로 덮이게 되었다. 그분은 ‘하나님-사람’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사람들’이다. 그분은 금으로 씌워진 나무로 된 법궤요, 우리도 금으로 씌워진 나무로 된 널판들이다. 숫자상으로는 다르지만 본성은 똑같다.(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127쪽)

    인용문 8

    하나님은 그분의 믿는 이들에게 “나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며, 그분을 믿는 이들은  “주여,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은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우리는 인성과 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다.(세 부분으로 된 사람에게 생명이 되신 하나님, 55-56쪽)

    인용문 9

    나의 부담은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이 그분 자신을 사람으로 만드시고 그분이 창조하신 존재들인 우리를 ‘하나님’으로 만드시어 그분이 ‘인화’되시고 우리가 ‘신화’되는 것임을 여러분에게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다. 마지막에 그분과 우리, 우리와 그분은 다 하나님-사람들이 된다. (신성한 분배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 72쪽)

    인용문 10

    우리 믿는 이들은 하나님에게서 났다. 사람에게서 난 것은 사람이고,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분명 하나님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났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다. (같은 책, 71-72쪽)

    인용문 11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다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이시므로, 우리는 삼일 하나님이 이제 ‘하나 안의 넷이신 하나님’이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넷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과 몸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세 분은 혼동되거나 분리될 수 없고, 하나 안의 넷도 분리되거나 혼동될 수 없다. (같은 책, 267쪽)

    3.1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본질적 교리라는 문제―그리스도안에 있는 믿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 목차로 돌아가기

    인용문 7부터11은 세 권의 책자에서 골라 내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목표, 즉 하나님께서 믿는 이들 안에서 하신 신성한 일의 온전한 결과와 관련된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라는 제목을 달아 편집한 것이다. 여기에서도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매우 주의깊게 잘라내어 함께 둔 인용문들을 통해 거짓된 인상이 재차 만들어졌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인상은 다시 한번 충격을 주고 있지만 문제시 된 교리에 대해 위트니스 리가 실지로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 사례와 관련해서 편집된 인용문들은 공개 서한의 독자들에게, 위트니스 리가 사람을 신격의 위치로 끌어 올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영원히 그분만이 소유하시는 하나님의 위치에서 끌어 내렸다는 잘못된 인상을 준다. 우리는 이것을 매우 우려한다. 그 이유는 공개 서한이 그리스도인 독자들 안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은 완전히 다르시다는 합당한 인식을 악용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전체 문맥을 무시한 채 발췌된 인용문 내용에 놀란 독자들은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독자들에게 바라던 대로, 위트니스 리가 하나님은 끌어내리고 사람은 하나님과 완전히 똑같이 끌어올린 이단이라고 주저없이 낙인 찍을 수 있다. 이것은 부당하다. 위트니스 리가 믿고 합당하게 가르쳤던 것은 사람의 신화 (deification)에 관한 진리였는데, 이것은 2 세기 이래 그리스도인 교회 안에서 많은 정통 성경 교사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에 관한 허용 가능한 이해로 간주해 온 것이다. 물론 모든 성경 교사들이 이러한 이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은 사람의 신화에 관한 합당한 이해는, 비록 그러한 견해가 폭넓게 지지되거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인 교회 내에서 정당한 지위를 가진 사상이요 가르침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공개 서한에 서명한 학자들이 역사적으로 신화에 대해 납득할 만한 이해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위트니스 리를 이단으로 소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무시한 것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신화에 대한 가르침이 2세기 경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아왔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분명하게 알려 줄 의무가 있다. 우리는 많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교사들이나 그들을 따르는 이들이 오늘날 이러한 관점을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목표로 삼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여기에서 우리의 의도는 이러한 관점이 옳다는 것을 그들이나 독자들에게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다.1 그보다 우리는 다만 이러한 관점이 수세기에 걸쳐 명망 있는 많은 정통 성경 교사들에게 수용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과,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불공정하고 전문가답지 않게 주장하려던 것처럼 이단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관하여 자신들이 가진 복음주의적 관점만이 유일한 정통 견해이고 위트니스 리는 자신들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단적이라고 강변하고 싶어한 것 같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전반에 대하여 모두 동의하지 않더라도, 어떤 사람의 주장을 그런 식으로 떼어 내어 그러한 이해를 타당한 대안이기보다는 이단적인 관점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것이다. 우리는 독자들이 이런 것이 얼마나 학자답지 못한 행동인지를 알리라고 믿는다.

    3.2 그리스도인의 사상 안에 있는 신화 목차로 돌아가기

    역대로 인정받는 교사들이 신화 교리에 대하여 상세한 내용을 담아 발표한 연구물이 많이 있다. 2그러나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그리고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스스로를 ‘복음주의 학자들과 사역의 인도자들’이라고 밝힌 사실을 감안하여, 오늘날 복음주의 신학 협회 연구 자료를 소개하는 최고의 출판물인 복음주의 신학 협회 저널에 로버트 라키스트로(Robert V. Rakestraw)가 수년 전에 발표한 신화 교리에 대한 복음주의적인 고찰을 참고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 잡지의 신조를 공감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이 잡지가 가진 명성을 잘 알고 있다. ‘복음주의적인 테오시스(신화) 교리’가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최고라고 인정하는 신학 잡지에 발표된 사실은 신화(神化)가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합당한 이해에 있어서 아주 생소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라키스트로 교수는 자신의 논문을 다음과 같은 서문으로 시작한다(각주가 포함되었고 번호는 다시 붙여진 것임).

    4 세기의 신앙의 변호자인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그의 한 서한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를 그분 안에서 신화 되게 하기 위함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3 그의 역작인 성육신에 관하여(On the Incarnation) 에서도 그는 유사하게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썼다.4 이것은 테오시스(theosis)의 교리인데, 신화 (deification), 신성화(divinization), 또는 일부가 선호하는 표현인, 하나님께 참예함 (participation in God) 으로 알려진 것이다.5

    테오시스(theosis) 개념은 니케아 시대 이전에 그 뿌리를 두지만, 이 개념은 낡은 역사적 유물이 아니다. 구속받은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인 이 신성화 개념은 비록 서방의 주류 기독교인들(심지어 대다수 신학자들)에게는 생소하지만 기독교 전체 역사에서 놀랄만한 정도로까지 발견된다. 테오시스 개념은 [동방] 정교회 신학에서는 중심이 되는 교리이다. 더 나아가 “인간의 신성화가 [동방] 정교회의 중심 주제요 주된 목표이며 기본적인 목적 또는 으뜸 되는 종교 개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니다.”6 동방 정교회와 복음주의 진영의 화해에 대한 높아져 가는 관심과 함께, 테오시스에 관한 연구는 꼭 필요한 일이다. 복음주의 진영은 그 교리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분별력 있는 수용을 통해 상당한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교회와 사회를 병들게 하는 거짓된 영성들의 범람을 반박하고 대체하는 건전하고 성경적인 그리스도인 생활에 관한 신학을 정립해야 할 긴급한 필요가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 특히 그러하다.

    라키스트로(Rakestraw)는 신화(神化)는 그리스도인 교회 내에서 오랜 기반을 가진 가르침으로써 “니케아 이전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고”(즉 주후 325년 이전), 동방 정교회에서는 아직도 구원에 관한 핵심적인 가르침으로 일반적으로 신봉되고 있다고 주석을 달고 있다.7 그는 이어서 신화에 대한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언급하는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용하는 두 절(창1:26, 벧후 1:4)을 신화에 대한 성경적인 최소한의 골격 기초로 제시한다.8 그 다음에 그는 교부들 중 일부의 저서에서 발견되는 고대 교리를 제시한다. 라키스트로가 제시한 교부들의 저작물은 간략하지만 잘 선별된 것들이다. 디오게네스에게 보낸 서한(The Epistle to Diognetes) 의 저자인 이레니우스 (Irenaeus), 포이티얼스의 힐러리(Hillary of Poitiers), 고백자 막시무스 (Maximus the Confessor),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가 참조문으로 인용된다. 이러한 인용문들만으로도 신화가 그리스도인 교회 내에서 존경받은 성경 교사들이 수용하고 가르친 것이라는 사실이 확증된다. 그러나 우리는 라키스트로가 제시한 이러한 짧막한 명단에, 신화 진리를 믿었거나 충분히 강조하지 않았다면 최소한의 이해라도 했던 저명한 성경 교사들로서 어거스틴, 그레고리 팔라마스(Gregory Palamas), 토마스 아퀴나스, 말틴 루터, 존 칼빈, 존과 찰스 웨슬리를 추가할 수 있다.9 이러한 명단은 인상적이며, 라키스트로가 신화 진리는 “낡은 역사적 유물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을 재차 확증한다. 따라서 사람이 신화된다는 가르침이 서방 기독교 사상 내에서는 강조되지 않았더라도, 그것이 공개 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이 묘사한 것처럼 기독교 사상 심지어 서방 기독교 내에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아타나시우스가 말한 것처럼 믿는 이들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be made God)고 위트니스 리가 가르친 것은, 비록 공개 서한에 서명한 70 명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에 대한 이해로 오랫동안 입지를 가진 노선에서 전혀 빗나간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공개 서한의 두 번째 단락에서 현재 논쟁 중인 것은 사실상 ‘그리스도인 신앙의 본질적인 교리들과 모순되거나 충돌하는 것으로 보이는 위트니스 리의 말’이 아니라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가진 신학적 입장을 괴롭히는 말들이다. 이것은 그들이 허용 가능한 다른 의견을 받지 못하는 문제일 뿐이다. 우리는 이것이 사실상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독자들이 잘 인식하게 되기를 참으로 소망한다.

    그러나 우리는 공개 서한의 서명자들이 소망한 것처럼 독자들이 신화 진리에 대하여 잘못된 인상을 갖기를 원치 않는다. 아타나시우스가 말했던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기 위함이다.” 라는 말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경건한 정서에 타격을 주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불행하게도 요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구원에 관해 지난 세기들에 교회가 충분히 가르친 것에 현저히 못미치는 수준에도 만족해 한다. 개탄스럽게도 요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신화를 포함한 구원의 더 깊은 관점을 비웃고 심지어 반대한다. 그러한 반대의 이유를 역설할 때 그들은 결국, 하나님이 홀로 초월해 계시고, 공유할 수 없으시며, 피조물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분’이시며, 결코 사람의 신화로 범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이것이 라케스트라우가 “하나님과 피조물의 가장 중요한 질적 차이에 대한 기독교인의 역사적인 이해”라고 부른 것이다.10 하나님은 참으로 공유할 수 없는 분이시지만, 그분이 공유할 수 없기만 하신 분도 아니다. 이것이 삼일 하나님이신 그분의 또 다른 비밀한 방면이다. 사람의 구속 즉 성육신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단계에서 그분은 그분의 존재의 또 다른 방면, 즉 그분이 인성을 가지시는 그분의 광대한 공유성도 전람하셨다. 이것은 그분이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기만 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시도록 보호해 드리고 싶어하는 동안, 하나님 자신이 참된 의미에서 사람이 되심으로 그분의 정체성에 큰 위험 부담을 안기신 것처럼 보인다. 신약은 비우심(빌2:7)인 육체 되심과 그분의 낮추심(행8:33)인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서의 죽음에 대해 말한다. 그분의 이러한 비밀한 공유성에 의해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고 사람을 그분의 어떠하심 즉 하나님으로 만드실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이 독립된 신격들(deities)이나 그분을 홀로 하나님이시게 하는 비공유적 속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음과 같은 구별은 중요하고 심오하다. 즉 그분은 그분 자신의 존재에 의해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어떠함에 의해 하나님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은 단지 사람의 고귀함이 영원한 지점까지 이르는 것이 아니라 더 의미있게는 인성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신화는 하나님의 정체성을 축소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확대한다. 따라서 사람의 신화는 하나님의 공유적인 방면이 허락하는 한, 그리고 그분의 신격의 유일함이 합당하게 존중되는 한, 하나님의 완전무결하심을 범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화는 그분이 구속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변화시키고 영광스럽게 하신 피조물 안에서, 피조물과 함께, 피조물을 통해 그분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도록 그분 자신이 선택하신 수단이다. 한 면으로, 그분의 신격 안에 있는 비공유적인 속성을 존중하고 그분을 유일한 하나님으로 경배하는 우리는 그분이 노하실까 두려워할 필요 없다. 그러나 또 다른 면으로, 그분이 구원을 위해 충분히 공급하신 것을 무시하고 그분의 공유적 속성을 극도로 누리는 데 실패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은혜와 경륜을 모욕할 위험성이 있다. 우리가 볼 때, 그분의 믿는 이들인 우리가 그분의 구원의 완전한 선물을 받는 데 실패하는 것은 그분을 크게 언짢게 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인 교회 내에서 오랫동안 견지한 신화에 대한 가르침은 하나님 안에 있는 비공유적 방면과 공유적 방면을 존중한다. 이 주제에 관해 고대의 저술가들은 하나님이 그분 자신 안에 하나님으로서 계심을 가리키는 본성에 의한 하나님과 믿는 이들이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이 되는 것을 가리키는 은혜에 의한 하나님을 구별했다. 이러한 용어들에 대한 그들의 용법은 하나님이 그분 자신 안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우리가 은혜를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인 것의 차이를 정확하게 표현한다. 그러므로 초기 교회의 가르침에서 오직 삼일 하나님 자신만이 하나님 자신의 존재에 의해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 즉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에 의해서만 하나님이다. 오늘날에도 신화에 관한 합당한 가르침에서 그런 용어가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기는 하지만, 개념상 이러한 구별은 여전히존중되어야 한다.

    3.3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은 균형잡혀 있음 목차로 돌아가기

    위트니스 리는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휘두른 것과 같은 종류의 거짓 진술의 가능성을 익히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이해한 신화(神化)의 의미가 아닌 것에 관해 분명하고 강조된 문장들로 반복해서 자신의 가르침을 제한시켰다. 우리는 이것이 그리스도 안의 믿는이들이 긍정적으로 신화되는 것에 관한 진리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가 되지 않는 것도 봄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유업에 대한 평가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한 안에 정확히 지켜져야 하기 때문이다. 즉 위트니스 리의 사역 안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만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이 무시한 이 균형은, 하나님께서 공유적 속성(예를 들어 사랑, 빛, 거룩함, 의)과 비공유적 속성(예를 들어 전지하심, 전능하심, 무소부재) 모두를 가지고 계신다는 점을 존중한다. 이러한 구별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 홀로 소유하시는 유일성과 탁월한 ‘다르심’을 유지하시면서 인성 안에서 그분 자신의 충만한 표현을 가지시려는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실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대표적인 발췌문들이 이러한 균형을 입증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신격 안에서 하나님이 된다거나 사람의 경배의 대상이 될 자격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가장 큰 신성 모독이며 철저히 이단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로 났으며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본성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한 성경적 사실이다(요1;13, 요일 5:11-12, 벧후 1:4). 우리 모두는 사람에게서 났기 때문에 사람이 된다. 개에게서 난 것은 다 개다. 우리는 사람에게서 났기 때문에 사람의 생명과 사람의 본성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났다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뜻한다. 만일 당신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하거나 하나님의 신격을 가진 경배의 대상이라고 말한다면 이단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당신의 존재 안에서 하나님과 같으며(요일3:2)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신성한 계시에 따른 진리이다.

    신약은 우리에게 주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또한 주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실 뿐 아니라 사람이시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되어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한 이들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어떤 교부들은 ‘신성화’라는 단어를 사용해 왔다. 그러나 ‘신성화 (deification)’라는 단어를, 당신 자신이 신격에 있어서 하나님이 되어 경배의 대상이 된다는 뜻으로 사용한다면 이것은 이단이다. 다른 면으로, 당신이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영접하여 지금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라면 이것은 전적으로 안전하며 성경적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났다는 놀라운 사실을 시인해야 하며 이 사실을 자랑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받았고, 지금 신성한 본성에 참여한 이들이며, 신성한 본성을 매일 누리고 있다. 우리와 우리 하나님은 한 실체로 함께 연합되었다.

    한 면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되어 하나이다. 다른 면으로 그분은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시고 우리는 경배자들이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 450쪽)

    이러한 하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되지는 않지만 그분과 명확히 구별된다. 우리는 생명과 본성과 요소와 본질과 조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하나이다. 우리는 또한 목적과 목표와 형상과 모양에 있어서 그분과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과 하나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분의 신격을 공유하지 못하며, 결코 공유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사람으로 남아 있고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남아 있다. 물론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지만, 그분은 그분의 신격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홀로 자신을 위하여 신격을 보유하고 보존하셨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는 여전히 한계가 있고, 하나님은 여전히 유일한 신격을 소유하신다. (예레미야와 예레미야 애가 라이프 스터디, 103쪽)

    비록 믿는 이들이 하나님으로 조성된다 하더라도,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는 여전히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신격을 지닌 하나님이시며, 우리 믿는 이들은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같지만, 신격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신격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하나님과 똑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분의 충만으로서 그분의 증가와 그분의 확장이 된다. (예레미야와 예레미야 라이프 스터디, 216쪽)

    사람은 신격에 있어서 하나님이 될 수 없지만, 그분의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본성과 생명에 있어서 하나님이다. 그러나 신격에 있어서, 즉 하나님의 지위나 신분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유기적인 연합, 48-49쪽)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와 하나 되시는 것이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 기독교는 대부분 표적을 놓쳤다. 그들은 구속과 거듭남은 잘 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은 이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그분 자신과 하나 되게 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신격화 되어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신격이 아닌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갖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우리가 신격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요한의 보수하는 사역, 87쪽)

    위트니스 리는 성경에 계시된 신화에 대한 제한들을 분명히 존중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이 고지식하게 신화의 진리를 평가절하하거나 단호하게 부인함으로써, 신성화 하시는 바로 그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과 누림을 갖지 못하는 데서 오는 큰 손실도 알고 있었다. 위트니스 리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신성화 하시는 구원을 믿는 이들이 완전하고 합당하게 체험하는 신화의 진리가 오늘날에도 회복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합당하게 이해된 신화의 진리는 교회들이 존재했던 처음 몇 세기 동안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로서 널리 인정되었지만, 우리 세대의 교회에서는, 일부에서 예외적으로 관심 표명이 증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널리 평가절하되고 있기 때문이다.

    3.4 초기 교부들이 합당하게 인정한 신화(神化)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 목차로 돌아가기

    신화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은 그의 관점도 아니고 그가 새롭게 도입한 사상도 아니다. 위트니스 리는 그리스도인의 신화가 초기 교회 시대에 한 때 널리 가르쳐졌고 그후로 모든 믿는 이들은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수용했었다는 것을 아마 자신을 반대하며 공개 서한에 서명한 70 명의 학자들과 사역의 인도자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잘 알고 있었기에 위트니스 리는 자신의 책에서 그것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초기의 교회의 어떤 교부들은 믿는 이들의 신화에 관해 가르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믿는 이들이 신격화 되거나 하나님으로서 경배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들이 의미한 것은 하나님께로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거듭난 사람들인 우리는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지만, 신격의 지위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같지 않다.(신약의 결론-하나님, 86쪽)

    주후 325년에 교부들의 가르침 아래 있었던 한 젊은 신학자로서 니케아 신경을 작성하는 데 조력했던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는 이같이 진술했다. 『하나님이 사람 되심은 사람이 하나님 되게 하려 하심이다.』 이 진술은 기독교에서 오랫동안 금언(金言)이 되었다. 그러나 지난 몇백 년 동안에는 기독교 문헌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53쪽)

    “하나님이 사람 되시고 사람이 하나님 됨”은 고대에서 아주 성행했던 말이다. 그러므로 325년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회의에서 “하나님이 사람 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실상 이 말은 하나님이 사람 되신 것은 그분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2세기에는 이것을 말할 수 있었지만11 나중에는 점점 감히 말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사람이지만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결국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사람을 그분의 자녀로 낳아 그분의 생명과 성품을 얻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생명과 성품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은 종류인 것이다.(이상의 최고봉과 그리스도의 몸의 실제, 54쪽)

    사실 “하나님이 사람 되심은 사람이 하나님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은 주후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가 했던 말이다. 당시 그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신학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이 한 마디는 교회 역사에 명언이 되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 후에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것을 말할 담력까지도 상실하게 되었다.(이상의 최고봉과 그리스도의 몸의 실제, 20쪽)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발췌한 ‘인용문’에 포함시키지 않고 독자들에게 숨기고 싶어했다고 우리가 결론내릴 수밖에 없던 것은 다음 항목들이다. 1)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에 있어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를 이해하는 합당한 방법이 있고, 그리스도인의 교회에서 많은 저명한 교사들이 적어도 2세기 이래로 그 방법을 견지했다는 것. 2) 위트니스 리는 이러한 기독교 사상 안에 있는 동일한 전승을 알고 존중했으며, 그것을 자신의 사역에 채택했다는 것. 3) 여러 세기 동안 믿어 온 그리스도인의 신화를 자신의 가르침의 일부로 주의깊게 채택한 위트니스 리는 신화에 대한 합당한 가르침을 위해 필요한 균형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동료 교사이자 더욱 심각하게는 그리스도 안의 동료 믿는 이인 위트니스 리를 거짓 진술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충심으로 우리의 이러한 결론이 틀렸고 그들의 거짓 진술이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것이 의도적이었다면, 서명인들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6)는 아홉 번째 계명을 범하여, 거짓 증거로 우리 구주의 죽음을 가져온 옛날의 산헤드린처럼 되고(마 26:59), 유사한 행위로 스데반의 순교를 유발한 사도 행전에 있는 시기하는 종교인들처럼 된 것이다(행 6:8-13).

    3.5 믿는 이들의 실지적인 거듭남에 근거한 신화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특별한 이해 목차로 돌아가기

    공개 서한이 포함시키기 위해 선택한 인용문들의 내용을 볼 때,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은 믿는 이들이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영접한다는 명제를 거부하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의 신화에 관한 합당한 제시들은 거의 모두가, 믿는 이들이 “신성한 본성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된다”(1:4)는 베드로의 두 번째 서신의 선언을 믿는다. 자신보다 앞서 신화를 가르친 사람들처럼, 위트니스 리 역시 이 절을 자신의 가르침의 주요 근거로 삼는다. 더욱이 위트니스 리는, 거듭남이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인간 존재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그들 자신 안으로 하나님의 생명 자체를 받아들임으로써 문자 그대로, 그리고 유기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위트니스 리에게 거듭남은,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 교사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개종을 은유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단지 양자들이라는 관념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또한 그는 대부분의 신약 번역이 헬라어 단어인 ‘휘오데시’(huiothesia)’를 ‘양자 됨 (adoption)’ 으로 표현한 것은, 다음과 같은 몇 절이 확증하는 것처럼, 믿는 이들의 신성한 출생과 그들이 신성한 생명을 소유함을 인정한 신약의 저자들의 사상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아님을 (올바르게) 인식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6-7).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생명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그러므로 위트니스 리의 사역의 책에 있는 핵심 개념이자 신화에 대한 그의 가르침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은 실지로 하나님에게서 태어나 생명과 본성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도록 신성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지 단지 명칭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피조된 인간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는가? 우리가 그분의 아들들이 되는 것은 입양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낳으심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다. 사람이 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그의 생명이 그 아이 안에 넣어져야 한다. 이렇게 넣어지는 것이 바로 우리가 ‘분배’라고 부르는 것이다.(과정을 거친 삼일성의 분배와 초월한 그리스도의 전달의 결과, 22쪽)

    비록 우리는 출생이 무엇인지 완전히 알지 못하지만 출생과 관련된 기본 원칙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다. 이 원칙은 출생이 전적으로 생명의 분배의 문제라는 것이다. 반대로 어린 아이를 입양(入養)하는 것은 생명과 관련이 없다. 그 대신 입양은 어떤 법적 요구들을 이행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러나 출생은 생명의 문제이다. 특별히 출생은 생명의 분배를 통해서 온다. 아버지의 생명이 그의 아이 안으로 분배된다. 그러므로 사람의 출생의 이야기는 생명 분배의 이야기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하심, 340쪽)

    그분의 아들의 영을 우리 안으로 나누어 주시어(갈 4:6)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의 아들의 영은 신성한 아들의 자격의 영이시다. (위트니스 리 전집, 1965년도, 제3권, 서신서들에 있는 그 영이신 그리스도, 88쪽)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은 단지 그분이 우리의 창조자 되심 이상을 포함한다. 어떻게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었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양아버지나 의붓아버지나 장인이 되실 의도가 없으시다. 반대로 그분은 우리의 친아버지이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했을 때 발생했다.(데살로니가서 라이프 스터디, 69쪽)

    비록 우리가 민족이 다르고 국적이 다르지만, 그분의 긍휼로 모두가 동일하게 된 것은 우리가 다 하나님-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사람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이다. 기독교에는 우리 믿는 이들이 출생이 아닌 입양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고 말하는 신학이 있다. 이 신학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입양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우리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은 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그분의 아들들이 된 자들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인 우리는 확실히 하나님-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를 낳은 분과 똑같다. 하나님께로서 났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므로 하나님-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요 하나님-사람들인 우리는 신성한 생명을 갖고 있다(요 3:15, 36상).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만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더욱이 그들은 신성한 생명이 무언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거듭난 사람들인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사람의 생명 외에 또 다른 생명인 신성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천연적인 생명은 우리를 천연적인 사람이 되게 하고, 신성한 생명은 우리를 신성한 사람이 되게 한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신성한 생명에서 났기 때문에 신성한 사람들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우리가 신성한 생명에서 나서 신성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확실히 우리는 신성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신성한 생명에서 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성하다. 거듭난 사람들 중 대다수가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생명 외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음을 모른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우리 자신의 생명은 사람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사람이다. 그러나 거듭남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에 더하여 또 다른 생명을 받았다. 이 생명은 거룩하고 하늘에 속할 뿐 아니라 신성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신성하게 되었다. (하나님-사람들, 9-10쪽)

    앞에 인용한 내용들에 비춰볼 때,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누구라도 인용문7부터11까지 내용에서 위트니스 리가 사람을 신격의 수준으로까지 높이려 하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간의 합당한 기능을 없애려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 반대로 다섯 개의 인용문의 내용은 모두 삼일 하나님께서 인성 안에서 그분 자신의 완전한 표현을 갖기를 갈망하신다는 것과 그러한 표현을 위하여 신성하고 인간적인 본성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3.6 인용문7 목차로 돌아가기

    인용문 7과 그 앞뒤 내용은 구약에서 언약궤로 예표된 개별적인 예수님과 언약궤가 놓였던 성막으로 예표된 단체적인 교회로 예표된,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표현을 살펴본다.

    인용문 7

    그리스도는 두 가지 본성, 즉 인성과 신성을 가진 분이다. 우리도 똑같다. 우리는 인성으로 태어났지만 신성으로 덮여지게 되었다. 그분은 하나님-사람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사람들이다. 그분은 금으로 덮인 나무로 만들어진 법궤요, 우리도 금으로 덮인 나무로 된 널판들이다. 숫자상으로는 다르지만 본성으로는 똑같다.(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127쪽)

    우리는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이라는 두 본성을 소유하신다.”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이것은 주후 451년에 칼케돈에서 있었던 제 4차 공회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합당한 이해로 확고하게 인증되었을 만큼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서명인들이 논쟁하려 하는 것은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와 우리가 본성적으로 똑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사람들이다.”라고 한 말 때문인 것 같다. 우선 이러한 것들에 있어서, 성경이 확증하고 교회가 오랬동안 믿어온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이라는 본성을 소유하신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확증하고 위트니스 리가 믿었던 것처럼, 사람들이 신성한 생명으로 거듭나서 신성한 본성에 참여한다면 무엇이 되겠는가? 그들 역시 그리스도 자신처럼 신성하고 인간적인 것이 아닌가? 또한 성경이 분명히 말하듯이(롬8:14, 히 2:10, 롬 8:29) 하나님 아버지께서 많은 아들들을 소유하시고 맏아들인 그리스도께서 많은 형제들을 소유하신다면, 아버지의 아들들과 맏아들의 형제들이 본성 안에서 즉 신성과 인성 안에서 그리스도와 동일하지 않다면 그들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이 인용문에서 참조된 언약궤와 성막의 그림(출25:10-11, 26:15-30)은 믿는 이들이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동일하다는 것을 가리키고, 이것이 인용문 7에서 위트니스 리가 말한 것의 요지이다. 개별적인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언약궤는 (인성을 상징하는) 나무에 (신성을 상징하는) 금을 입혀 만들었고, 언약궤의 확대이자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성막은 금으로 입혀진 마흔여덟 개의 널판들로 구성되었다.12 그러므로 성막은 분명 언약궤와 동일한 기능을 가졌거나 동일한 존중을 받지는 않지만 본성에 있어서 언약궤와 똑같았다. 여기에서 위트니스 리의 요점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표현(어떤 교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분의 대표가 아니다)이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 (마흔여덟 개의 세워진 널판들로 예표된13 ) 믿는 이들은 (나무와 금으로 된 언약궤로 상징된14) 그리스도와 (인성을 상징하는 나무와 신성을 상징하는 금이라는) 동일한 본성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분의 몸이기 때문이다.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무시한 인용문 7의 전체 문맥은 이것을 분명하게 한다. 공개 서한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부분을 괄호 속에 넣어본 인용문 7의 전후 문맥은 다음과 같다.

    [우리 각 사람은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적셔져서 그분 안에서 함께 지어졌다.] 그리스도는 두 가지 본성, 즉 인성과 신성을 가진 분이다. 우리도 똑같다. 우리는 인성으로 태어났지만 신성으로 덮여지게 되었다. 그분은 하나님-사람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사람들이다. 그분은 금으로 덮인 나무로 만들어진 법궤요, 우리도 금으로 덮인 나무로 된 널판들이다. 숫자상으로는 다르지만 본성으로는 똑같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타남이시고, 금 속에서 하나로 묶여진 이 모든 널판들은 그리스도의 표현이다. 이 지점에 이를 때 영광의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우리 안에 충만케 된다. 이것이 간증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타남인 그리스도를, 우리를 통해 확장되고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케 하는 그리스도만을 간증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책, 127-128쪽)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은 성경을 말 그대로 이해하는 데 반대하므로, 그리스도의 믿는 이들이 신성한 출생을 체험하고 신성한 생명을 갖고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고, 그분의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체험함으로 그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를 표현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기 떄문에, 이러한 관점들을 믿고 담대하게 가르친다는 이유로 위트니스 리를 정죄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위트니스 리는 그리스도와 “우리가 본성에서 똑같다.”라고 주장할 때 신중을 기한다. 그리고 그의 책의 문맥과 인용문 7에서도, 앞의 수식어구인 본성에 있어서 (in nature) 그 말의 나머지 부분인 똑같다(are exactly the same) 에 한정되도록 주의깊게 선택되었다. 위트니스 리가 다른 많은 곳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기에서도 언급하는 것은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와 똑같다고 말하는 데는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본성에 있어서 똑같다”고 위트니스 리는 말한다. 공개 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은 위트니스 리의 말을 따로 떼어 놓음으로써 위트니스 리가 정반대의 뜻으로 말하는 것처럼 암시했지만, 이 똑같다는 것은 경배나 존중이나 존경을 받는 인격이나 지위에 있어서 같다는 것이 아니다.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은 또한 위트니스 리가 믿는 이들을 가리킨 하나님-사람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도 반대하는 것 같다. 그들은 재차 인용문을 따로 떼어냄으로써 가능한 한 최고의 공격 효과를 주려 했다. 위트니스 리가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은 위에서 우리가 언급한 것처럼 사람이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는 것에 관한 자신의 전반적인 이해와 일치한다. 다른 곳에서 그는 하나님-사람들이라는 용어가 의미하지 않는 것에 대해 특별히 지적했다. 공개 서한의 독자들은 위트니스 리가 그 용어를 통해 의미한 것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듣지 못하여 오해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사람들이 된다. 요한복음 1장 12절과 13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라고 말한다. 사람에게서 난 이들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God)에게서 난 이들은 하나님들(gods)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의 신격을 공유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위격이 없고, 우리는 하나님으로서 경배받을 수 없다. 그러나 생명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에게 그분의 생명을 주셨다. 이것은 우리가 육신의 아버지에게서 나서 육신의 아버지와 같은 생명을 갖는 것과 같다. 우리의 아버지는 사람이다. 아버지에게서 난 우리도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버지의 위치는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과 똑같고, 그분과 우리는 다 하나님-사람들이다. (신성한 분배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 23쪽)

    그리스도인의 신화(神化)라는 말과 관련된 사례에서 늘 그래왔듯이, 하나님-사람들이라는 용어와 “하나님(God)으로 난 자들은 하나님들(gods)이다.” 라는 진술은 합당한 조건 아래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 조건이란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하는 것일 뿐 하나님의 위격과 신격이라는 비공유적 방면에는 참여할 수 없다는 제한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신화를 말한 다른 합당한 성경 교사들같이 위트니스 리도 자신의 책에서 자주 이러한 조건을 제시했지만, 공개 서한에 인용되어 제시된 내용은 독자들이 이것을 알 수 없게 했다.

    3.7 인용문8-10 목차로 돌아가기

    인용문 8

    하나님은 그분의 믿는 이들에게, “나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며, 그분을 믿는 이들은, “주여,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은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우리는 인성과 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다.(세 부분으로 된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 55-56쪽)

    인용문 9

    나의 부담은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이 그분 자신을 사람으로 만드시고 그분이 창조하신 존재들인 우리를 ‘하나님’으로 만드시어 그분이 ‘인화’되시고 우리가 ‘신화’되는 것임을 여러분에게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다. 마지막에 그분과 우리, 우리와 그분은 다 하나님-사람들이 된다. (신성한 분배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 72쪽)

    인용문 10

    우리 믿는 이들은 하나님에게서 났다. 사람에게서 난 것은 사람이고,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분명 하나님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났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다. (같은 책, 71-72쪽)

    인용문 8-10도 인용문 7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많은 말들을 제시하므로, 이에 대한 변호도 같다. 믿는 이들이 성경에 따라 실지로 신성한 출생을 하고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소유하는 한, 그들은 신성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본질상 그분 자신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에게서 난 믿는 이들은 비록 그분의 유일한 위격과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이다. 그리고 믿는 이들은 창조를 통해 인성을 소유하고 (거듭남으로 시작된) 새 창조를 통해 신성을 소유하였으므로, 그분의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이고 그들 자신 안에서나 그분과의 연합에서 분리된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이해를 전제로, 하나님-사람들이라고 불릴 수 있다. 믿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내주하시고 또한 그들 속에서 은혜 안에 운행하시므로 그분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참으로 신성하고, 참으로 하나님이며, 참으로 하나님-사람들이다. 믿는 이들이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사람들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신성한 생명과 본성의 결과이고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신성한 운행의 결과이다.

    위트니스 리는 특별히 인용문 8에서 그리스도인 교회가 오랫동안 인정해온 것, 즉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참 사람이 되셨고 그분께서 취하신 인성은 부분적이거나 환영(幻影)이 아니라는 점을 확언했다.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위트니스 리가 영원하신 하나님에게 인성이 있다고 믿은 것으로 암시하려면 인용문 직전의 내용들을 떼어내야만 했다. 우리는 무시된 그 부분을 괄호로 묶어서 이곳에 소개하겠다.

    [죽음을 통과하신 후 삼일 하나님은 부활 안에 들어가셨다. 부활 안에서 그분은 인성을 신성 안으로 이끌어서 그리스도의 믿는 이들을 하나님의 아들들과 그리스도의 지체들로 만드셨다(벧전 1:3, 요1:12, 롬12:5). 인성을 신성 안으로 이끄는 것은 사람을 하나님 안으로 이끄는 것이다. 삼일 하나님의 성육신은 하나님을 사람 안으로 가져왔으며, 그분의 부활은 사람을 하나님 안으로 이끌었다. 이런 종류의 왕래를 통하여 놀라운 연합이 발생했다. 이제 그분의 부활 안에서 하나님은 사람과 연합되시고 사람은 하나님과 연합된다. 그러므로 사람과 하나님, 하나님과 사람은 하나이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이러한 연합 안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믿는 이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었다. 이 하나님의 아들들은 인성과 신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믿는 이들에게, “나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며, 그분을 믿는 이들은, “주여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은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우리는 인성과 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다. [이것은 그분의 부활을 통하여 성취되었다.] (세 부분으로 된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 55-56쪽)

    분명히 위트니스 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 인간 생활, 죽음, 부활이라는 역사적인 사실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한 그리스도는, 우리가 이 글의 첫 부분에서 자세하게 밝힌 것처럼, 그분의 이러한 구별되는 행동에서도 삼일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신다.

    위트니스 리가 위에서 언급한 연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은 결합되어 함께 연결되지만, 이 연합은 결코 신성도 아니고 인성도 아닌 어떤 제 삼의 요소를 산출하지 않는다. 반대로 신성하고 인간적인 본성들은 결합 안에서 여전히 영원히 구별된다.15 이 연합의 결과는 그분이 그러하신 것처럼 인간적이고 신성한, 첫번째 하나님-사람의 재생산인 많은 하나님-사람들의 산출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신성화된 사람은 결코 신격을 침범하거나 하나님처럼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성화된 사람은 영원히 피조물로서, 자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즉 하나님으로서 홀로 자존하시는 분을 영원토록 의지할 것이며, 하나님이신 그분을 영원토록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모든 찬송과 영광이 그분께 돌려지며, 그분 홀로 받으실 것이다!

    우리가 위에서 본 것들에 근거하여, 인용문 9과 10은 위트니스 리의 책들의 보다 광범위한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같은 책에서 인용된,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두 인용문의 인접된 내용은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이고 여기서는 조금 길게 인용될 수 있다. 그러한 부분으로 돌아가기 전에, 우리는 인용문 10에 있는 “우리가 하나님이다”라는 선포를 특별히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런 말이 지금까지 말해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부 독자들의 귀에 거슬릴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것을 존중하며, 제한들을 더 제시하지 않은 채 이 충격적인 말을 방치하고 싶지 않다. 사실 위트니스 리도 이런 용어가 어떤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말이나 그와 유사한 표현들을 사용할 때 자신의 의도에 대하여 거듭 분명하게 기술했다. 아래에서 보겠지만, 인용문 9와 10의 전후 문맥은 그의 의도를 모호함 없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는 또한 인용문 9와 10에서처럼 여기서 위트니스 리가 특별히 사용한 ‘하나님’이라는 말은 위격이 아닌 종(種)의 의미임을 밝히고자 한다.

    그러므로 거듭남 안에서 하나님은 하나님들을 낳으신다. 사람은 사람을 낳고 염소는 염소를 낳는다. 만일 염소가 염소를 낳지 않으면 무엇을 낳는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하나님을 낳지 않는다면 무엇을 낳으시겠는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들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하나님께로서 난 우리는 모두 하나님들이다. 그러나 신학적인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신성한 종(種)에 있어서, 즉 하나님의 왕국 안에 있는 하나님-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낫다. (고봉 메시지, 제10권, 요한복음 결정 연구, 163-164쪽)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심에 더하여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 즉 공기 같으신 그리스도가 되셨다. 더욱이 부활 안에서 그분은 모든 믿는 이들을 거듭나게 하시어 하나님의 자녀들, 즉 하나님의 종류가 되게 하셨다. 성육신으로,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이 되셨으며, 부활하심으로 사람들인 그분의 믿는 이들을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였다. 그분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셨고, 이제 우리는 신격이 아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된 사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분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하나님들 (gods)이 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들이다. 그러나 신학적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신성한 종류의 하나님-사람들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 의해 신성한 영광으로 영화롭게 되심의 결과, 28쪽)

    어떤 이들은, “위트니스 리는 그런 구절이 ‘신학적 오해’를 일으킬 것을 알고 있다면, 왜 구태여 그런 표현을 쓰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위트니스 리는 이런 표현이 믿는 이들이 신성한 종(種)으로 거듭나는 진리를 정확하고도 간결하게 전달하고 있고, 그런 의미로 이해한다면 이런 표현이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처럼 우리도 확신하는 것은, 그의 그러한 합당하고 근거 있는 말을 거부하는 소수의 다루기 힘든 사람들이 늘 있으리라는 점이다. 그런 거절이 악의에서 나온 것인지 무지에서 나온 것인지는 우리의 판단 능력 밖의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짐작컨대 그러한 거절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때로는 그들이 공개 편지에서 했던 것처럼 공식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위트니스 리가 이 진리, 즉 우리가 하나님께 입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태어났고,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 (species)이고, 신격이나 위격이나 신분이나 지위에서는 아니지만, 아주 간단히 말해서, 종류에 있어서 하나님이라고 선포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아주 편안함을 느낀다. 위트니스 리는 사람인 아버지들과 그들이 낳은 자녀들 간에 구별이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동일한 제한이 있음을 밝혔다.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이신데, 아들들인 우리는 과연 무엇인가? 아들들은 반드시 생명과 본성에서 그들의 아버지와 똑같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 (요일3:1). 결국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분은 우리를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과 똑같이 만드실 것이다(2절). 그러나 우리 가운데 누구도 경배의 대상인 신격에 있어서 하나님이 될 수는 없다. 가정에서는 오직 아버지만이 부권(父權)을 갖는다. 아버지의 자녀들은 부권을 갖지 못하고 많은 아들들을 가진 한 아버지만 갖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유일한 아버지이시며, 오직 그분에게만 신성한 부권이 있다. 그러나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는 생명과 본성에서 그분의 어떠함과 똑같다(그리스도인의 생활, 189-190쪽).

    신약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며 우리가 그분의 아들들이라는 것을 계시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아들들이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기 떄문이다. 우리는 그분의 아들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마치 자녀가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을 갖고 있어도 아버지는 아닌 것처럼,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공유하지만 하나님의 신격이나 부권(父權)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성경, 특히 신약의 내재적인 계시이다.(소선지서 라이프 스터디, 467-468쪽)

    하나님의 택함받은 피조된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서 그분의 자녀들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으며, 이제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아버지의 자녀들은 생명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하나, 아버지 됨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같지 않다. 아버지만이 아버지이다. 그들은 자녀들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우리는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신격에서나 아버지 되심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이다(그리스도의 몸의 내재적인 조망, 99쪽).

    인용문 9와 10의 전후 문맥에서 위트니스 리가 주로 강조한 것은 하나님이 지금 그분의 생명을 그분의 구속된 믿는 이들 안으로 분배하시어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신성하고도 인간적인 본성을 지닌 진정한 하나님-사람들이 되게 하시어 인성 안에서 하나님을 살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공개 서한에 포함되지 않은 부분들이 포함된, 인용문 9와 10의 완전한 전후 문맥을 제시하겠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갈망은 창조된 사람 안으로 들어가셔서 사람의 생명이 되시어 사람이 그분을 얻고 그분과 연결되고 연합되어 하나님의 생활을 살게 하시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분은 먼저 사람이 되시고, 그분 자신을 “사람화” 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후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하시어 우리를 “하나님화” 하신다. 이런 방식으로, 그분과 우리는 하나 되고 한 생활을 공유한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넣으시어 그분께서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이 되시어 어느 날 우리가 그분이 될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신격의 일부가 되고 유일하신 하나님과 똑같아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태어나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고 그분의 집이 되고 그분의 가족이 되지만 그분의 주권이나 그분의 위격을 공유할 수는 없으며 하나님으로서 경배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사를 보면 성경을 해석하던 어떤 교부들은 2세기부터 신화(神化)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후에 그들은 다른 이들의 반대에 직면했고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 12절-13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라고 말한다.] 우리 믿는 이들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다. 사람에게서 난 것은 사람이고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분명 하나님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위격에 참여할 수 없고 다른 이들의 경배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하나님의 위격을 소유하시고 사람의 경배를 받으실 수 있다.

    신성한 분배가
    믿는 이들을 하나님-사람들로 만듦

    기독교에 있는 전통적인 관념은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이 선하고 영적이고 거룩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관념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육체가 되시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놀라운 하나님-사람으로서 신성과 인성을 다 가지고 계셨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갖도록 그분이 우리 안으로 나셨으므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벧후 1:4). 그러므로 하나님에게서 난 이들인 우리는 다 하나님-사람들이다.]

    나의 부담은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이 그분 자신을 사람으로 만드시고 그분이 창조하신 존재들인 우리를 ‘하나님’으로 만드시어 그분이 ‘인화’되시고 우리가 ‘신화’되는 것임을 여러분에게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다. 마지막에 그분과 우리, 우리와 그분은 다 하나님-사람들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사람들이 되거나 영적인 사람들이 되거나 거룩한 사람들이 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이 추구하시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개선하기를 기대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선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표현하고 살아 나타내는 목적을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그분의 형상을 따라 그분의 모양대로 창조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형상은 있지만 그분의 생명은 없는 사진과 같다. 우리가 거듭난 후에 이 사진은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고 그분의 존재와 같은 ‘실재적인’ 인격이 되었다. 그분은 ‘인화되신’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신화된’ 사람이다. 끝에 가서는 둘이 하나가 되어 다 하나님-사람들이 된다. 이것이 성경의 신성한 계시이다.] (신성한 분배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 71-73쪽)

    위트니스 리는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이며, 인성 안에서 하나님의 표현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화 된’ 존재들이라고 정확히 진술하고 있다. 하나님이 ‘사람화’ 되는 것에 관하여, 위트니스 리는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그 인성을 벗어버리지 않으셨으며 부활과 승천 때조차도 그 인성을 가지고 계심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인성 안에서 하나님의 표현을 산출하도록 신성이 인성과 연합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과 사람은 이제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그분의 영원한 신격 안에 계신 하나님은 이런 과정에 의해 모독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위격과 신격에서 영원히 하나님이시고, 그분 홀로 영원토록 우리의 경배를 받으실 자격이 있으시다. 독자들은 위트니스 리가 인용문 9에서 사용한 ‘하나님’과 ‘하나님화 된’ 이라는 단어에 인용부호를 붙인 것은 그러한 용어들을 표준적인 의미로 쓴 것이 아님을 가리킨다는 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16 하나님은 그분의 구원의 경륜 안에서 창조물인 우리를 하나님으로 만들고자 하시지만, 그분의 신격과 같이 만들고자 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우리는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주입받음으로 하나님이 되어 우리 존재 안에 계신 그분을 살아냄으로 하나님이신 그분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화 될 수 있지만, 이것은 오직 그분께만 해당되는 의미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하나님이라는 단어에 근거한다. 비록 공개 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은 위트니스 리를 정죄하려고 인용문 9를 따로 떼어냈지만, 우리는 위트니스 리가 인쇄 활자에서 그처럼 분명하게 표시할 정도로 이 문제에 주의를 기울인 것을 사려깊은 독자들이 알고 존중하리라 믿는다.

    3.8 인용문 11 목차로 돌아가기

    공개 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은 인용문 11을 근거로, 독자들이 위트니스 리가 신성한 삼일성에 그리스도의 몸을 추가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신격의 일부가 되게 한 것으로 믿게 하려 했다.

    인용문 11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다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이시므로, 우리는 삼일 하나님이 이제 ‘하나 안의 넷이신 하나님’이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넷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과 몸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세 분은 혼동되거나 분리될 수 없고, 하나 안의 넷도 분리되거나 혼동될 수 없다. (같은 책, 267쪽)

    이 두 번째 부분의 인용문들(7-11)을 변호함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은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구원에 의해 침범당하지 않음을 위트니스 리가 알고 존중하고 반복해서 가르쳤음을 제시해왔다. 역대로 그리스도인 교회 안에 있었던 다른 많은 이들과 동일한 맥락에서 위트니스 리가 확증한 것처럼 믿는 이가 하나님이 된다면, 그것은 오직 그들이 아버지에게서 태어남(요 1:13; 요일 3:9; 4:7; 5:1, 4, 18), 영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됨(고전 6:17; 요 15:4-5; 롬 6:5; 11:17, 19), 그 영이 내적으로 사시고 충만하심(롬8:9, 11; 엡 5:18)으로 되는 것이지, 하나님과 떨어진 그들 자신의 미덕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공개 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은 그들의 독자들이 위트니스 리가 이해한 이러한 핵심 방면들을 알기를 원치 않았고, 위트니스 리가 이단적으로 가르친다는 잘못된 인상을 주기 위해 따로 떼어낸 말만으로 그들의 진술을 구성하기 원했다. 그들이 인용문 11을 사용한 이유도 똑같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신격(Godhead)의 불가침성을 손상하지 않았고, 아래의 견본 발췌문이 증명하듯이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님의 신격을 공유한다고 이해하거나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았다.

    교회를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라고 말하는 것은 교회를 신격의 일부분이나 경배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서(요1:12-13),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요일5:11-12), 하나님의 본성을 누리는 실체라는 의미이다(벧후1:4). 교회는 거룩한 실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모양을 지니며, 하나님 자신을 표현한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으므로, 분명히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고, 그분의 본성을 소유하고 있고, 매일매일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누리고 있다(성경의 기본계시, 75쪽).

    인용문 11이 들어 있는 동일한 책에서, 위트니스 리는 아버지와 그분의 많은 자녀들의 생명 관계를 강조하고 있고, 이러한 관계를 떠나서는 교회가 될 수 없음을 아래와 같이 단언한다.

    아버지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자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은 우리가 그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우리가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기만 하고 그분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교회 안에 있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남으로 우리는 그분과 생명 관계에 들어가고 유기적인 연결에 들어간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그다음 우리를 낳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하나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와 그분의 관계는 이중 관계이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다. 그런 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없다면 교회도 없을 것이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하나님에게서 태어나기도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합당한 인간 존재들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태어났다. 이것이 교회이다. (신성한 분배에 관한 보다 깊은 연구, 266-267쪽 )

    인용문 11이 묘사하는 것에 인접한 내용의 중심은, 위트니스 리가 이 장(章)의 도입부에서 인용한 에베소서 4장 4절부터 6절이 가리키는 것처럼 삼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몸의 성경적인 관계를 아래와같이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사도 바울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몸은 삼일 하나님 전체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포함되며, 이 본문을 주의깊게 읽을 것을 주문한 위트니스 리는 삼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님이시고, 이런 의미에서, ‘하나 안의 넷이신 하나님’이심을 알았다. 아래 내용은 문맥 전체를 포함한 인용문 11이며, 공개 서한에서 포함되지 않았던 부분들은 재차 괄호로 표시되었다.

    [궁극적으로 교회는 삼일 하나님과 연합되고 삼일 하나님과 합병된 한 무리의 사람들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께서 모두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이시므로, 우리는 삼일 하나님이 이제 ‘하나 안의 넷이신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 넷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영과 그 몸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은 혼동되거나 분리될 수 없으며 또한 하나 안의 넷 역시 분리되거나 혼동될 수 없다.[이 비밀한 삼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몸의 연합과 합병은 분배를 목적으로 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본질이신 그 영은 계속해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신다. 마찬가지로, 아버지께서는 우리 위에 계시는 동안 우리를 감싸고 계시며, 우리를 통과하시는 동안 우리를 돌보고 계시며, 우리 안에 계시는 동안 우리와 함께 머물고 계시며, 계속해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삼일 하나님의 분배의 결과이다.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그분의 믿는 이들 안으로 분배하실 때 유기체인 교회가 우주 안에 산출된다. 뿐만 아니라 삼일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그분 자신을 조금씩 모든 지체들 안에 그들의 요소와 본질과 누림으로 분배하고 계신다. (같은 책, 267-268쪽)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바란 것과는 반대로, ‘하나 안의 넷이신 하나님’ 이라는 말에 붙인 인용 부호는 이 용어를 액면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표시함을 분별력 있는 독자들은 즉시 알아차릴 것이다. 기껏해야 공개 서한의 독자들은 (서명인들인 생략하여 제공되지 않은) 다른 증거를 보기 전까지만,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신격의 일부가 되었다고 이해하고 가르친 줄로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증거를 보게 된다면,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보다 고상한 독자들은 위트니스 리가 그렇게 이해하거나 가르치지 않았음을 수긍할 것이다. 아래의 인용문들이 입증하듯이 또 다른 증거가 분명히 있다.

    교회는 삼일 하나님의 산출물이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체현되셨고, 아들은 그 영으로 실재가 되셨고, 그 영은 우리와 연합되셨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장에는 아버지와 주님과 그 영과 우리, 곧 몸이 있다. 이것을 우리를 신격화하여 하나님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생명과 본성과 요소와 본질에 있어서만 신성할 뿐, 신격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신격을 지니신 하나님은 온 우주에서 오직 한 분, 삼일 하나님뿐이시다.(주님의 회복의 다섯 가지 강조점, 77쪽)

    그리스도의 몸은 먼저 구속받은 사람들로 구성되는데, 이들은 그 영으로 출생하여 아버지의 자녀가 된 이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사람들로서 그리스도의 몸, 곧 골격을 이룬다. 그들 안으로 그 영과 주님과 아버지께서 건축되셨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 모두가 구속받고 거듭난 믿는 이들 안으로 건축되었다. 그러므로 신성한 삼일성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건축물 혹은 이러한 구조물이 있다. 인성과 그 영과 주님과 아버지가 함께 건축된다. 이것은 단지 하나 안의 셋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 안의 넷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그분이 구속하신 우리가 하나님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분 안에는 신격이 있지만, 우리가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아무리 많이 소유하여 하나님과 똑같아지더라도, 우리에게는 신격이 없다.(섞임에 관한 실제적인 요점, 46-47쪽).

    공개 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은 (따로 떼어 제시한) 인용문 11에서 위트니스 리가 공격받을 여지를 남겼다고 느낄지 모르나, 위트니스 리는 이 점에 대해 다른 곳(더 많지만 이것으로 충분) 에서도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잘못인가? 위트니스 리가 인용문 11에 거론된 세 문장에 대해 자신을 충분하게 보호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의도적으로 다른 모든 내용들을 알지 못하게 하면서 이 세 문장만 악용한 것인가?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독자들의 더 큰 정의감에 호소할 뿐이다. 물론 위트니스 리가 사용한 ‘하나 안의 넷이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전후 문맥과 그의 전반적인 저술의 광범위한 문맥에서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영원하시고 침범당하실 수 없는 삼일 하나님의 신격에 이단적인 어떤 것을 추가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가 그런 용어에 특별히 인용 부호를 붙였고, 그 용어가 담긴 문장들은 원래의 문맥에서 따로 떼어낸 것이 밝혀졌는데 위트니스 리가 참으로 그런 의미로 말했는가?”라고 질문하는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하지 않은가? 우리는 위트니스 리가 그런 것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고 서명인들에게 잘못이 있음을 이제 위트니스 리의 다른 저술들을 통해 알 수 있다.

    3.9 공개 서한의 심각한 오류에 대하여 목차로 돌아가기

    우리는 위에서 인용문7번부터 11번까지를 다룸으로써 위트니스 리가 믿는이들의 신화에 관해 가졌던 합당한 개념을 논증했다고 믿는다. 이 개념은 비록 그러한 해석이 오늘날 널리 받아 들여지고 있지는 않으나 여러 세대를 걸쳐 그리스도의 교회 내에서 많은 건전한 교사들이 믿어 왔고 성경에 대한 정당한 해석으로 취급되고 있다. 또한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은 문맥과 동떨어지게 위트니스 리의 글을 인용함으로 이 문제에 대한 위트니스리의 충분하고 균형잡힌 이해를 은폐하고 결과적으로 전세계에 있는 자신들의 청중들에게 위트니스 리의 의도를 잘못 대변함으로 비전문적이고 무책임하게 행동했다는 것이 다시 한번 분명해졌다 고 우리는 믿는다. 인터넷 상에 엄선된 인용문들을 올려 놓음으로써, 공개 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은 위트니스 리의 사역물에서 잘려나간 일부를 근거로 독자들이 위트니스 리를 비난하도록 유도해 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건전한 학문의 원칙을 손상시킬 뿐 아니라 더 심각하게는 자신들은 독자들을 기만했고, 독자들이 한 동료 믿는이에 대하여 잘못된 판단을 하도록 부추겼다. 그들이 수호 하려는 진리에 반대된다고 해서 이러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그들을 우리는 과연 훌륭한 진리의 수호자들로 간주할 수 있는가? 우리는 독자들이 공개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이 가치있다고 판단하는 정통교리에 대한 신념과 평가에 대하여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분별 있게 판단하리라고 믿는다.

    1. 신화(神化)를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최종 목표라고 보는 우리의 견해를 더 자세히 살펴보려면, 확증과 비평 (Affirmation & Critique), 7:2 (2002)을 참조하라. 이 글은 http://www.affcrit.com/archives/ac_02_02.html)에서 볼 수 있다.
    2. 이에 대한 연구가 많이 행해졌다. 하지만 다음 글들이 (신성화, 테오시스 theosis 라고도 하는) 신화(神化)와 관련되어 가장 자주 인용되는 글들이다: 테오시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신화,, Stephen Finlan과 Vladimir Kharlamov 편집, Princeton Theological Monograph Series (Eugene, OR: Pickwick Publications, 2006); Jules Gross, 그리스 교부들이 본 그리스도인의 신화, Paul A. Onica 번역 (Anaheim, CA: A & C Press, 2002); Paul R. Hinlicky, ‘신학적 인류학: 테오시스 교리와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의 통합을 향해’, Journal of Ecumenical Studies 34 (1997): 영문판 38-73쪽; Tuomo Mannermaa, ‘루터교 및 동방정교의 관점에서 본 칭의와 테오시스’, ‘그리스도와의 연결에서’ (Grand Rapids: Eerdmans, 1998), 영문판 25-41쪽; Steve McCormick, ‘크리소스톰과 웨슬리가 본 테오시스: 믿음과 사랑에 대한 동방의 패러다임Wesleyan Theological Journal 26 (1991): 영문판 38-103쪽; Michael McDaniel, ‘칭의와 테오시스로서의 구원 ‘, ‘그리스도 안의 구원: 루터교 및 동방 정교회 간의 대화 , Robert Tobias와 John Meyendorrf 편집 (Minneapolis: Augusburg, 1992), 영문판 67-83쪽; John Meyendorrf, ‘동방 기독교 전통의 테오시스‘, 그리스도인 영성: 종교개혁 이후 및 근대’, Louis Dupré와 Don E. Saliers 편집 (New York: Crossroad, 1989), 영문판 470-476쪽; Frederick W. Norris, ‘신화: 합의에 도달할 수 있고 설득력도 있는’ 스코틀랜드 신학 저널 49 (1996): 영문판 411-428쪽; Norman Russel, ‘그리스 교부 전통에서 신화의 교리’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Anna Ngaire Willams, ‘연합의 근거: 아퀴나스와 팔라마스가 본 신화‘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3. 아타나시우스, 서신 (Letter) 60: 아델피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단락 4. 또한 단락 3과 8도 참조하라. NPNF2. IV 영문 575-578쪽.
    4. 아타나시우스, 성육신에 대해 (On the Incarnation) 54, NPNF2, IV, 영문판 65쪽
    5. A. M. 앨친 (Allchin)은 테오시스에 대한 자신의 책에 ‘하나님께 참여함: 영국 국교의 전통에서 잊혀진 흐름 ‘ (Wilton, CT: Morehouse-Barlow, 1988)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6. 다니엘 B. 클렌드닌 (Daniel B. Clendenin), ‘신성에 참여하는 이들: 테오시스의 정통적 교리’ 복음주의 신학협회 저널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37:3 (1994): 영문판 365-379쪽.
    7. 하지만 Rakestraw의 논문 출판이 시사하듯이, 전체적으로는 서방 기독교에서, 좀 더 좁게는 미국 복음주의 진영에서 신화에 대한 관심과 이를 합당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증가되어 왔다. 사실 14세기 그리스 신학자 그레고리 팔라마스 (Gregory Palamas)의 글 일부가 서방 영성 고전 총서 (The Classics of Western Spirituality) 에 수록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방’이라는 말을 주목하라.). 이 신학자는 신화에 대한 신학 체계를 포괄적으로 발전시킨 학자로 정평이 나 있기 때문이다. 이 저서가 총서에 포함된 것이 지니는 의미에 주의를 촉구하며 야로슬라브 펠리칸(Jaroslav Pelikan)은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하지만 이제 명백한 것은 Palamas가 서방 교회 내 점점 더 많은 지역에서 성자로 인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공식적으로 성자로 선포된 것은 아니지만 아토스 산 출신으로 그런 인물이 있었다는 정도로 여겨져 박물관 한 구석의 기록으로만 남기에는 훨씬 더 많은 주목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그레고리 팔라마스: 삼부작, John Meyendorff 편집 및 Nocholas Gendle 번역, 서방 영성 고전 총서 [Mahwah, NJ: Paulist Press, 1983] 12장에 수록).
    8. 창세기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벧후 1:4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9. 각주 22를 보라. 또 따른 예로 마틴 루터를 들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체가 되신 것처럼 육체가 말씀이 되는 것도 또한 분명 필요하다. 왜냐하면 말씀이 육체가 되신 것은 정확히 육체가 말씀이 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능력이 능력 없이 된 것은 약함이 능력 있게 되기 위함이다.” (Weimar Aufgave 1:28, 25-32); 요한 칼빈: “이 점을 강조하자. 곧 복음의 최종 목적은 결국에는 우리를 하나님과 같은 형상이 되게 하는 것이고,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곧 우리를 하나님이 되게 하는 것임을.” (사도 바울의 히브리서 주석, 존 오웬 번역 및 편집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영문판 372쪽; 찰스 웨슬리: “당신께서 자신의 인격 안에/인성과 신성을 연합시키신 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이제부터 분리될 수 없는 한 존재 되게 함 아닙니까/ 어서 빨리 당신의 본성이 알려지게 하소서/ 내 안에 계신 육체 되신 분이시여” (찰스 웨슬리, “전적으로 지혜로우시며, 선하시며, 능하신 주님 (All-wise, all-good, almighty Lord),” 요한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의 시 전집 (The Poetical Works of John and Charles Wesley) 4권 [London: Wesleyan-Methodist Conference Office, 1869] 영문판 121쪽에 수록. 원래는 우리 주님의 탄생에 대한 찬송집에 수록 편찬되었음 [London: William Strahan, 1745])
    10. Rakestraw, 영문판 266쪽
    11. 예컨대 이레니우스는 기원 후 약 180년 경에 그리스도에 대해 “그분은 측량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우리의 어떠함과 같은 분이 되셨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 자신의 어떠함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이단에 대항하여, 5, 서문)라고 썼다.
    12. 위트니스 리처럼 다른 주석가들 또한 세워진 널판이 그리스도의 몸인 믿는 이들을 예표한다고 해석하였다. 예를 들어, Joseph S. Exell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여기서 예표로 하나님의 거처로 나타난다. 교회는 땅 위에 세워졌고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셨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상과 분별된 많은 사람들로 구성되고 견고한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건축된다. 널판들이 금으로 덮여진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도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이들이 된다(벧후 1:4).”(성경 일러스트레이터, 제2권 [Grand Rapids, Michigan: Baker Book House, 1978], 영문판 488-489쪽)고 말했고, Robert T. Ketcham는 “광야의 장막이 그리스도와 믿는 이 모두를 의미하는 이중 예표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곳에서 믿는 이들을 나타내는 그림을 기대해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이 널판들에서 볼 수 있다. 널판들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은 믿는 이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예표이다…믿는 이들이 지극히 거룩한 분을 위한 그런 거처라는 사실은 에베소서 2장 21절과 22절에서 분명히 나타난다.”(신약의 진리를 나타내는 구약의 그림들 [Des Plaines, Illinois: Regular Baptist Press, 1965], 영문판 22-25쪽)라고 말한다. C. A. Coates는 “’장막에 사용된 널판들’은 휘장과 덮개를 지지할 견고한 어떤 것이 필요했음을 보여준다. 나는 이 널판들이 로마서에서 보듯 성도들을 나타낸다고 믿는다…나는 성령을 소유한 성도들에게서 나오는 하나님의 속성이 금으로 덮여진 널판들과 부합된다고 생각한다.”(출애굽기 개관 [Sussex, England: Kingston Bible Trust, n.d.], 영문판 192-197쪽)라고 말했다.
    13. 출애굽기 26:19-20, 22-23.
    14. 출애굽기 25:10-11
    15. 위트리스 리가 ‘연합 (mingl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어떤 사람들의 반대를 받아왔다. 그들은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믿는 이들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연합되었다’고 말함으로써 두 본성을 혼동시키고, 두 본성의 구별을 없애버리며, 결과적으로 인간도 아니고 신성한 존재도 아닌 제 삼의 존재를 만들어 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두 본성을 혼동시키는 것은 그리스도 교회가 확증해온 것, 특히 주후 451년 칼케돈 공회에서 확언한 것에 위배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는 여러 곳에서 이런 비판에 반박해왔고, 공개 서한이 이 점을 완전히 회피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우리의 반박이 더 주효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점과 관련해 최근 펴낸 우리의 글들은 www.lctestimony.org/StatementOfTeachings.html#two-natures에서 볼 수 있고, 책의 형태로는 복음의 확증: 지방 교회들과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가르침에 관해 (A Confirmation of the Gospel: Concerning the Teaching of the Local Churches and Living Stream Ministry) (DCP Press, 2009), 24-29쪽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웹사이트에서는 concerning our teachings.pdf. 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우리가 반박한 내용의 핵심은 간략히 다음과 같다. 영어에서 ‘연합’이라는 말은 연결된 것들이 혼합되어 각각의 독특한 정체성이 상실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전의 정의에서뿐만 아니라 일상 언어생활에서 확증되고 통용되는 용법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결합된 성분들이 결합된 상태에서도 서로 구분되게끔 함께 두거나 결합하는 것”) [‘연합’ 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Springfield, MA: Merriam-Webster, 1993)]; “함께 섞거나 결합하여 함께 둠, 일반적으로 개별적 속성을 상실하는 것은 아님 [‘연합’ 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4th ed. (Boston: Houghton Mifflin Company, 2006)]; “연합은 개별적 특징들을 상실하지 않는 상태로 결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존경하는 마음과 놀라움이 뒤섞였다 (Respect was mingled with surprise.)’’ [Sir Walter Scott]. ‘그의 동료들은 원주민들과 자유롭고 유쾌하게 섞였다 (His companions mingled freely and joyously with the natives)’ [Washington Irving].” [“mingle의 유의어는 mix이다…” 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4th ed. (Boston: Houghton Mifflin Company, 2006)]). 이런 용례를 보면 위트니스 리가 이 용어를 사용할 때 그를 폄하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것이 드러난다. 위트니스 리는 이 용어를 사용할 때 이 용어에 담긴 뜻과 다른 의미를 함축하지 않았다. 우리는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을 잘못 규정하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기 바란다.
    16. 시카고 문체 교본 (The Chicago Manual of Style) 15판 (Chicago and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3), 영문판 293쪽

    장 4복음주의 교회들과 교파들의 정당성에 대해 목차로 돌아가기

    인용문 12

    주님은 변절한 로마 천주교와 개신교 교파들로 구성된 기독교계 안에서는 교회를 건축하지 않으신다. 이 예언은 주님의 회복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는데, 참된 교회 건축은 이 회복 안에서 성취되고 있다. (신약 회복역 성경, 각주 185, 마태복음 16:18)

    인용문 13

    변절한 교회는 주님의 말씀에서 빗나가 이단이 되었다. 개혁 교회는 어느 정도 주님의 말씀으로 회복되었지만, 다른 많은 이름, 예를 들면 루터교, 감리교, 성공회, 장로교, 침례교와 같은 이름을 취하여 스스로 이름을 붙임으로써, 주님의 이름을 부인했다…주님의 말씀에서 빗나가는 것은 변절이고, 주님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영적인 음행이다. (신약 회복역 성경, 각주83, 요한계시록 3:8)

    인용문 14

    나는 여전히 우리 중 일부가 기독교계의 소극적인 영향 아래 있지 않을까 염려된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를 기독교계에서 완전히 끌어내시기 위해 전진하고 계심을 깨달아야 한다(교회와 지방교회들의 역사, 155쪽.)

    인용문 15

    로마 카톨릭을 포함한 모든 종파 속에도 참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은 주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존재하고 있는 종파들의 조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다. 종파 조직은 합당한 교회생활의 하나님의 경륜을 파괴시키고 사탄의 조직을 세우기 위해 사탄에 의해 이용되었다. (창세기 라이프 스터디 II, 501쪽)

    인용문 16

    우리는 기독교에 관심이 없고, 기독교계에 관심이 없으며, 로마 카톨릭에 관심이없고 모든 종파들도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큰 바벨론이 무너졌다고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선포이다. 기독교가 무너졌고, 기독교계도 무너졌으며, 카톨릭도 무너졌고, 모든 종파들도 무너졌다. 할렐루야!(지방교회를 위한 일곱 영들, 111쪽)

    인용문 17

    하나님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교회를 아는 것까지도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계속해서 지방적인 교회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것에 대하여 가장 새롭다면, 오늘날이 지방교회들의 시대임을 깨달을 것이다. (같은 책, 26쪽)

    4.1 논쟁 중에 있는 현재의 기독교의 특별한 방면 : 복음주의적 분파주의 목차로 돌아가기

    공개 서한은 “복음주의 교회들과 교파들의 합법성에 관하여” 라는 제목으로 제시된, 위트니스 리의 자료로부터 가져 온 인용문들의 세 번째 부분에서 주목할만한 전환을 한다.

    우리는 위트니스 리가 그러한 교회들과 사역들의 특성들을 모욕하도록 다음과 같이 지속적으로 부축이면서도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와 “지방 교회들”이 복음주의 교회들과 사역들의 연합체로부터 회원자격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모순이고 도리에 맞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한다: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은 인용문 12에서 17까지가 포함된 진술들을 우리가 “거부하고 출판을 중지하라”고 반복해서 권고하면서도, 그들은 인용문 1부터 11까지에서 논쟁했던 것처럼 인용문 12에서 17이 “그리스도인 신앙의 본질적인 교리들에 모순되거나 손상하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정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이 사례를 놓고 은근히 정죄하는 것은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와 지방 교회측 사람들이 교파 조직 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 교류를 바라면서도 위트니스 리가 기독교계 조직에 관해 부정적으로 말한 것을 선전하는 것은 위선적이라는 것이다. 공개 서한을 아래와 같이 추가하여 말하고 있다.

    만일 리빙스트림미니스트리와 “지방 교회들”의 인도자들이 복음주의 기독교와 기관들과 사역들을 정당한 기독교 단체로 간주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그들이 복음주의 교회와 사역단체들의 모든 연합회의 회원자격을 공개적으로 사임할 것을 요청한다.

    우리가 공개 서한에 대한 간략한 답변에서도 지적했듯이, 서명자들은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와 지방 교회들은 본질적으로 어떤 “복음주의적인 교회들과 사역단체들의 연합체”에도 속한 적이 없다는 것을 완전히 무시해 왔다. 지방 교회들은 복음주의적이든 그 반대이든 어떤 교파적인 “교회들”의 연합체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우리가 아래에서 보겠지만 지방 교회들의 존재 자체나 위상을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기독교 출판사로서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지방교회들은 아니고-는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 출판사 협의회(ECPA)와 기독교 신용조합(Christian credit union)과 같은 조직의 회원권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사업 상의 조직이고 교회들의 연합체가 아니며, 하나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의 출판사로서,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는 교회의 어떠함의 기초가 아니라 기독교 출판과 재정을 위한 공통체의 기초에 의해 이들 단체들과 제휴하고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도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를 “적법한 기독교 단체”(그러나 교회들로서가 아닌) 로 보아주기를 희망하는 것과 똑같이 우리는 참으로 이러한 단체들을 “적법한 기독교 단체”(그러나 교회들로서가 아닌)로 간주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적접한 기독교 단체들로 간주하기 때문에, 우리는 출판과 재정에 있어서 우리가 생각하는 통상적인 수준에서 그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우리가 앞서 답변했던 것처럼 복음주의적인 “교회들”(문자적으로, “복음주의”라는 기치아래 일컬어지는 교회들)은 신약이 묘사하는 교회와 일치되지 않는다는 우리의 확신을 무효화 하지는 않는다. 신약에 따르면, 교회는 위대한 성경교사들, 합당한 교리들, 옳은 실행들, 또는 그 밖의 기초들에 따라 불려지지 않으며,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와 지방 교회들은 그렇게 이름붙여진 교회들의 연합체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복음주의 “교회들” 안에서 모이는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의 형제와 자매로 받으며 그들과의 교제를 위한 기회들을 환영한다는 우리의 서약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한 우리의 입장과 실행에 있어서 “불일치와 도리에 맞지 않는”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참으로 우리의 실행은 교회의 합당한 성격에 관한 우리의 입장과 완전히 일치하고, 그러한 입장에 의하여 정당화될 뿐 아니라 또한 그것에 의해 심지어 더욱 중요하게 강제된다.

    우리의 관점이 비록 소수인 것은 인정하고, 그럼에도 그것이 우리의 관점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믿는 것을 이단적이고, 극단론이며, 또는 배타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이 인용문 12부터 17까지를 따로 떼어낸 것을 토대로 독자들에게 위트니스 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매우 배타적이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우리도 여전히 배타적이다 라고 믿게 하려했던 것은 아주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위트니스 리와 전혀 관계가 없고 오늘날 우리와도 무관하다. 큰 충격을 주도록 따로 떼어내어진 채 제시된 위트니스 리의 진술들이 서명자들이 자신의 독자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던 대로(그리고 이것에 대해 그들 자신이 반드시 책임져야 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의심할 여지 없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게될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가 누구이건 우리와 위트니스 리의 사역으로부터 떠나가는 것을 예상하는 것은 우리에게 고통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러한 답변이 합당하게 이해되고 또한 공정하게 받아들여 지기를 바라는 갈망이 이뤄지기를 기도한다. 보다 충분한 인용문들의 내용들과 아래에서 제시될 위트니스 리의 더 많은 사역물의 내용이 말해 주듯이, 위트니스 리의 의도는 기독교 내의 믿는이들이 아닌 기독교 조직의 어떤 방면을 반대하여 말한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구분을 이해한다고 믿는다. 또한 그들은 조직 안에 있는 사랑하는 믿는 이들은 존중하지만, 조직은 비난을 초월해 있지 않고, 특별히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를 포함한 몇 가지 점에서는 실패했다는 것에 동의하리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일 인용문 12에서 17까지의 내용이 원문으로부터 따로 떼어진 상태로 제시되지만 않았다면 기독교의 하락을 매우 타당하게 지적하고 있는 부분임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했을 것으로 믿는다. 더 나아가 인용문 12에서 17까지는 이 주제의 한 방면 즉 분열된 조직을 고발하는 것에만 초점을 두었을 뿐, 그들은 기독교 내에서 조장되는 분열들,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분열의 원칙 그 자체를 반대하는 한 간증으로서의 하나를 위한 위트니스 리의 입장을 균형있게 제공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용문12에서 17까지를 의도적으로 함께 모아 놓은 것은 위트니스 리에 대한 불완전하고, 불공정하며, 궁극적으로 부정확한 또다른 인상을 창출해 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기독교가 일부 더럽고 악한 것들이 그 안에 들어오도록 허락해 왔다는 것을 동의할 것이다. 그 결과 순수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려져야 할 교회 (고후11:2-3, 엡5:25-27)가 불순한 요소들에 의해 침해 당하고, 세상을 향해 교회가 짊어져야 할 순수하고 썩지 않은 그리스도의 증거는 약화되어 왔다. 성경은 그러한 타협에 의해 산출된 혼잡을 정죄하며(고전5:6-7), 계시록 17장 1절과 5은 그러한 혼잡의 궁극적인 산물을 “큰 창녀”와 “비밀, 큰 바빌론”로 여긴다. 특별히 배도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최소한 14세기까지 큰 바빌론으로 여겨져 왔고(소위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들의 영성을 가진 일부 중에서1), 그 무렵의 개신교 성경교사들도 동일하게 평가했다2. 그러나 큰 창녀는 혼자가 아니고 “창녀들의 어미”라고도 불리는데(창17:5), 이것은 그녀가 그 어미의 악행들을 따라하고 어미가 하는 것처럼 창녀로서 행동하는 후손들을 낳았음을 가리킨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처음 듣는다면 충격을 받고 심지어는 깊이 괴로워 할 수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개신교 전통 안에 있는 일부 조차도 기독교계 내의 많은 종파들이며, 특별히 개신교주의 내에서 그들은 창녀의 딸들로 여겨 진다 는 것은 진실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단적인 가르침들과 이방의 실행들과 비성경적인 전통들과 심지어 우상들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창녀의 어미 안에 그 근원을 가지고 있는 창녀의 딸들은 그들의 어미로부터 다양한 정도로 더러운 것들을 섭취해 왔다. 그런 점에 대해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창녀들의 어미가 변절한 교회이기 때문에, 창녀들, 곧 변절한 교회의 딸들은 변절한 로마 천주교의 가르침과 실행과 전통을 어느 정도 고수하고 있는 기독교의 여러 종파들과 단체들임에 틀림없다. 순수한 교회생활에는 변절한 교회에서 전달된 악이 전혀 없다. (회복역 신약 성경, 각주 52, 요한계시록 17:5)

    하지만 위트니스 리만이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널리 존경받았던 학자이자 복음주의 협회(The Evangelical Foundation) 창시자인 도날드 그레이 반하우스 (Donald Grey Barnhouse)(1895-1960) 또한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계시록 17장 5절에 나오는] 이 여자는 창녀들의 어미라 불린다. 어미 창녀가 있고 딸 창녀들이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이 우상숭배의 기원이 되는 조직은 많은 하부 조직들을 만들어내며 발전해가고 있다. 종교개혁 시기에 활동하던 개신교 주석가들은 언제나 이 큰 창녀가 로마 교회라고 말했다. 성경은 개신교 단체들을 창녀의 딸들에 포함시킨다… 하나님은 오늘날 모든 교파들 안에 참된 증인들을 소유하신다. 그러한 조직 안에 있는 것과 상관없이 그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이다.3

    월터 윌슨(Walter L. Wilson)(1881-1969)은 그의 저서 <윌슨의 성경 예표 사전>(Wilson’s Dictionary of Bible Types)에서 ‘창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벨론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예표이다.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많은 역사 학자들과 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했다. 많은 큰 교파들이 이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왔고 동시에 어미 교회로부터 많은 전통과 실행을 함께 가지고 나왔다. 많은 교파들이 세상의 입맛과 물질을 추구하면서 어미 교회의 실행을 따르고 있다.4

    윌슨과 같이 분명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전 달라스 신학교 교수였던 메릴 엉거(Merrill F. Unger)(1909-1980)는 아직까지 인기 있는 그의 저서인 <엉거의 성경사전>(Unger’s Bible Dictionary)에서 바벨론이 비단 로마 가톨릭 교회일 뿐아니라 모든 “변절한 기독교계” 라고 말했다.5

    그렇다면 위트니스 리가 믿는 이들의 하나를 옹호하고, 세상적이고 우상적이며 사탄적인 영향력을 갖는 것들을 버리라고 한 것이 틀렸는가? 우리는 그가 취했던 태도가 틀리지 않았다고 믿는다. 만일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이 위트니스 리가 위에서 한 말들로 인해 마음이 상했다면, 그들이 오늘날 기독교 안에 있는 잘못을 용납하거나 적어도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그렇다면 위트니스 리가 믿는 이들의 하나를 옹호하고, 세상적이고 우상적이며 사탄적인 영향력을 갖는 것들을 버리라고 한 것이 틀렸는가? 우리는 그가 취했던 태도가 틀리지 않았다고 믿는다. 만일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이 위트니스 리가 위에서 한 말들로 인해 마음이 상했다면, 그들이 오늘날 기독교 안에 있는 잘못을 용납하거나 적어도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우리는 인용문 12부터17까지를 부적절하게 잘라 낸 것이 위트니스 리가 조직의 오류를 비평할 뿐 아니라 그 조직 안에서 모이고 신앙 생활하는 동료 그리스도인들까지도 공격한다는 잘못된 인상을 줄 것을 염려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위트니스 리는 조직의 일탈은 단호하게 폭로하지만, 그의 사역의 메시지에서 발췌한 아래 글이 증명하듯이 주님 자신에 의해 정죄된 조직 자체와 영원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안의 믿는 이들은 명확히 구별했다.

    우리는 물론 어떤 분파들과도 함께 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교통을 저지시키지 못한다. 그들이 분파 안에 있든지 있지 않든지 우리는 그들이 우리의 형제들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들의 분파들과 함께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성도들은 사랑해야 하며 그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에 있는 이들이라도 사랑해야 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도 참 신자들이 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있다. 그들이 성직자의 긴옷을 입고 있더라도 우리는 구속 안에서, 생명 안에서 똑같다. (교회의 실제적인 표현, 112쪽) 6

    공개 서한은 위트니스 리가 편협하고, 차별적이며, 분파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우리가 위트니스 리는 부당하게 표적이 되어 왔다고 믿는 이유는 위에서도 언급했고 앞으로도 좀 더 명확히 보겠지만 저명한 학자들 그리고 서명자들이 소속된 기관과 교파에 속한 일부 사람도 논쟁이 된 주제들에 대하여 위트니스 리와 놀랄만큼 비슷하게 말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위트리스 리가 주장했던 것과 동일한 우려의 목소리를 낸 다른 저자들은 비판을 받지 않는가? 위트니스 리만 기독교의 오류를 비판하고 그 하락한 상태에 대해 통탄해 한다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비난 받아야 한다. 또한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 안의 동료 믿는 이들과의 접촉을 회피하고 그들을 다른 이들에게 나쁘게 말했다는 암시를 주는 것도 잘못 인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안타깝게도 공개 서한은 이러한 잘못된 인상을 전달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관심을 인용문 자체에 돌이켜서 위트니스 리가 집중했던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의 건축에만 계속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인용문 12부터 17까지에서 인용된 위트니스 리의 언급들이 그것들이 발췌되었던 문서들의 문맥 안에서, 그리고 더 넓은 범위의 그의 책들 안에서 합당하게 이해되려면, 그런 인용문들은 반드시 이러한 관점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 위트니스 리가 비판했던 기독교의 상황은 특별히 오늘날 기독교를 특징짓는 만연된 분열들이었다.7 물론 이러한 많은 분열들은 다양한 가르침과 분열된 실행과 같은 구체적인 근거들로 나눠지고 있다. 종종 이러한 가르침과 실행은 그 자체로는 합당할지 모르나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시키는 근거가 될 때는 이미 합당한 것이 아니다. 위트니스 리는 어떤 합당한 가르침에도 의의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분열을 일으키거나 실족하게 하는 원인들은 담대하고 정직하게 비난했다(롬 16:17참조). 또한 그는 기독교 내의 불순하고 더러운 요소들에 대해서도 주저하지 않고 비평했다.

    4.2 인용문 12 목차로 돌아가기

    인용문 12는 주님 자신의 말씀을 기록한 유명한 구절인 마태 복음 16장 18절인 “또 내가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각주들 중 하나에서 발췌한 것이다.

    인용문 12

    주님은 변절한 로마 천주교와 개신교 교파들로 구성된 기독교계 안에서는 교회를 건축하지 않으신다. 이 예언은 주님의 회복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는데, 참된 교회 건축은 이 회복 안에서 성취되고 있다. (회복역 성경, 각주 184, 마태복음 16:18)

    우리는 인용문 12의 내용이 위트니스 리가 기독교계 내에 있는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한 참된 교회의 지체들임을 부인한다는 인상을 주어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의도적으로 선동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상 위트니스 리는 성경에 따라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모든 믿는 이들이 교회를 구성하며, 그들은 교회의 지체들임을 매우 분명하게 선포했다. 그는 아래에서 보듯이 인용문 12를 발췌한 것과 동일한 출처인 회복역 성경에서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 책의[에베소서] 주제를 나타내는 ‘교회’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된다. ‘교회’라는 용어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이며, ‘부름받아 나온 회중’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나온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이로 이루어진다(신약성경 회복역, 에베소서 1:22 각주 3).

    하지만 위트니스 리는 인용문 12에서는 모든 진정한 믿는 이들로 구성된 교회의 존재가 아니라, 합당하고 진정한 표현 안으로 교회를 건축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인용문 12를 발췌했던 각주 이전 문장에서 교회의 건축이 “오순절날에 시작되었다(행 2:1-4, 41-42)”고 말한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주님이 예언하신 것은 “이십 세기가 지나도록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오순절날에 시작된 교회의 건축은 아직 진행 중이며 완전한 상태에 이르지 못했다. 위트니스 리는 이러한 교회 건축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교파들 안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스스로 “로마”, “루터파”, “복음주의파”와 같은 이름들로 표시되는)교단들로 특징지워지는 암시된 분열은 음부의 문들이 이기지 못하는 교회의 특징인 하나의 상태와는 반대되기 때문이다(마 16:18). 그러므로 하나 그리고 순수한 기초 또는 하나가 놓일 터로 돌아갈 매우 확실한 필요가 존재하며, 그럴 때 교회 건축이 합당하게 실현될 수 있다. 신약 성경 회복 역의 각주들을 그 확장된 주석에 포함시킨 자신의 마태 복음 라이프 스터디(Life Study)에서, 위트리스 리는 마태 복음 16장 18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분이 ‘이 반석’ 위에 그분의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반석’ 이라는 말은 다만 그리스도를 가리킬 뿐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이 계시, 즉 베드로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계시를 가리킨다. 교회는 그리스도에 관한 이 계시 위에 세워진다.

    로마 천주교는 18절에 있는 이 반석이 베드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비해 근본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반석이 그리스도를 암시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 것이지만 이러한 이해도 충분하지는 않다. 여기에 있는 반석은 다만 그리스도를 가리킬 뿐 아니라 더욱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도 가리킨다. 이 장에서 아버지는 베드로에게 하늘로부터 무언가를 보여 주셨다. 이 아버지로부터 온 하늘에 속한 계시가 반석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 둘 다 위에 세워진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교파들은 이 반석 위에 건축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남침례교파는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 위에가 아닌 수침에 관한 계시 위에 건축된다. 동일한 원칙으로 장로교파는 장로에 대한 교리 위에 건축된다. 마찬가지로 은사주의 교회들이나 무리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 위에 건축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은사주의적인 것들에 대한 지식이나 그러한 체험들 위에 세워진다. 이와 같이 오순절 교파는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 위에가 아닌 오순절의 복음에 대한 계시 위에 건축된다.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 위에 건축된 교회는 참된 교회요 분파가 아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관념과 관점에 따라 무리나 또는 소위 교회들을 구성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관념은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가 아니다. 교회는 ‘이 반석’, 즉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 위에 세워져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본다면 우리는 분열로부터 구원받을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 위에 세워진 것만이 교회이다. 교리들이나 관점들이나 실행들이나 관념들 위에 세워진 어떤 무리도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 위에 세워진 교회가 아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가 주 예수께서 그 위에 그분의 교회를 건축하고 계시는 반석이다.(마태복음 라이프 스터디, 47장, 쪽)

    위트니스 리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선호하는 교리와 관점과 실행과 관념이 분열의 요소들이 되지 않도록 하고, 또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를 건축하도록 참된 하나의 터로 회복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이것을 바라되 신앙의 본질적인 진리들 중 그 어떤 것도 어떤 식으로든지 타협되거나 간과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8 오히려 그는 본질적인 신앙과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믿는 이들 사이에 많은 분열을 가져온 비 본질적인 문제들에 관한 다수의 교리적인 불일치와의 차이를 구분했다. 그는 모든 믿는 이들이 분열을 일으키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을 것과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 같은 몇몇 사람들은 우리의 이러한 입장을 비판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다른 믿는 이들을 향해 배타적이지는 않았다. 우리는 다음의 발췌문에서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위트니스 리의 포용력과 합당한 지방적인 터 위에서 그리스도의 몸 안의 하나를 실행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그의 관점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발췌문에서 공개 서한이 인용문 일부를 비합리적으로 삭제하고 짜깁기하여 만들어 낸 거짓된 인상과는 정 반대의 인상을 받는다.

    우리의 터(ground)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의 시대의 시작으로부터, 사도들의 시대로부터 터는 그리스도의 몸의 유일한 하나이며 이것은 각 지방에서, 지방 교회 안에서 지켜지고 표현된다(계1:11). 즉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우리가 어느 지방에 있든지 그 곳의 교회가 되기 위해 함께 모인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몸의 유일한 하나 외에는 다른 터가 없다. 지방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의 표현이다. 교회는 우주적으로 하나이며 그리스도의 몸의 이 하나는 많은 지방에서 표현된다. 여러 성도들이 있는 각 지방에서 성도들은 그곳의 교회로서 함께 모여야 하며, 그리스도의 몸의 지방적인 표현으로서 모이고 있는 모든 다른 믿는 이들과 하나가 되는 것 외에 수침에 의한 침례나 방언이나 장로회나 방법이나 감독 제도 등 어떤 다른 터도 취하지 말아야 한다.

    이 유일한 하나가 우리가 건축되어 가고 있는 터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편당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배타적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포함하며, 열려져야 하며, 모든 성도들에 대하여 사랑을 가져야 한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인 한 , 그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우리 형제들이 많은 교파로 흩어져 왔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그들을 사랑한다. 우리는 싸우거나 반대하거나 따지는 태도나 그러한 영을 갖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틀린 것이다.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는 영과 자세를 항상 지녀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고 주 예수님을 믿는 한, 그들은 우리의 형제요 자매이다. 지방 교회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어떤 벽도 없다. 우리에게는 울타리가 없다. 우리는 모든 사랑스런 그리스도인들을 우리의 형제로 생각한다. (성경의 기본 계시, 80-81쪽)

    4.3 인용문 14 목차로 돌아가기

    나는 여전히 우리 중 일부가 기독교계의 소극적인 영향 아래 있지 않을까 염려된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를 기독교계에서 완전히 끌어내시기 위해 전진하고 계심을 깨달아야 한다(교회와 지방교회들의 역사, 155쪽.)

    위트니스 리가 인용문 14에서 언급하고, 우리가 믿기에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이 특별히 불쾌하게 생각했던 부분인 “기독교계의 소극적인 영향”은 분열,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한 것에 악한 것들을 섞은 것이다. 위트니스 리가 성경에 따라 솔직하게 가르쳤던 것처럼 기독교계는 이 두 가지 악한 것에 의해 피폐해졌다. 우리는 기독교계는 타협된 조직이며 그곳으로부터 나와서 회복되어야 한다는 점에 확실히 동의한다. 또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느끼는 것을 존중하며, 그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끼는 바대로 실행하는 것도 존중한다. 하지만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이 독자들에게 어떤 내용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위트니스 리가 인용문14에서 말한 것에 관하여 어떤 판단을 내리기 전에 그가 진술하는 내용을 이곳에 제대로 제시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느낀다. 위트니스 리는 이어지는 내용에서 하나의 필요성 대 분열이 가져온 손상과 주님의 간증의 순수성과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조건에 관해 다룬다(요3:29, 계 21:2, 9, 22:17). 우리는 아래에서 공개 서한이 포함하지 않았던부분은 꺽쇠로 표시하되 인용되었던 부분을 적당한 분량의 앞뒤 내용과 함께 제시하고자 한다.

    [로마서와 에베소서와 같은 책들에는 많은 가르침들이 있지만 계시록에는 단지 영, 즉 하나님의 칠 배로 강화된 영과(계1:4, 4:5, 5:6) 사람의 영이 있다(계1:10; 4:2; 17:3; 21:10). 요한은 영 안에서 금등잔대, 즉 한 도시에 한 등잔대를 보았다(1:10-12). 그는 수천의 믿는 이들을 보지 않았다. 그는 한 도시에 오직 한 등잔대를 보았다. 이것은 너무나 간단하다. 한 도시에 있는 많은 믿는 이들은 논쟁이나 의견이나 다른 관념이나 분열이 없이 한 마음 한 뜻 안에서 다만 한 등잔대로 서 있어야 한다. 주님께 감사한 것은 오늘날 여기서 우리는 하나 안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 속에서 여전히 우리 자신에 속한 것과 그리스도 외의 어떤 것을 붙잡고 있을지 모른다. 하나님이 보실 때 지방교회는 반드시 아주 단순해야 한다. 그것은 혼합이 없이 아주 단순하고, 단일하고, 순수한 정금 등잔대이어야 한다.

    계시록 2, 3장에서 주님은 일곱 교회 모두에게, “귀가 있는 사람은 그 영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2:7, 11, 17, 29; 3:6, 13, 22)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그영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신다고 아주 명료하게 말한다. 최종적으로 성경 전체는 그 영과 신부로 최종 종결될 것이다(계 22:17상).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매 시대마다 모든 성도와 그 영이 똑같은 것을 말한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의 신부이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의 신부인가?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한마음 한뜻을 손상시키는 우리 자신의 관념과 의견을 붙잡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주님의 구출과 회복이 필요한 상황에 있다.] 나는 여전히 우리 중 일부가 기독교계의 소극적인 영향아래 있지 않을가 염려된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를 기독교계에서 완전히 끌어내시기 위해 전진하고 계심을 깨달아야 한다.

    [계시록은 그 영과 신부의 책이다. 교회는 절대적으로 그 영 안의 문제이다. 우리는 우리의 사람의 영으로 돌이켜 영 안에 머물러야 한다. 영 안에서 우리는 하나이다. 신약에서 믿는 이들의 하나만큼 중요하고 전략적인 것은 없다.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되기를 기도하셨다(요 17:21). 어떤 이들은 성경적이기를 원하면서도 그 실행에 있어서는 성도들을 분열시킨다. 성도들을 분열시키는 것만큼 비성경적인 것은 없다.](교회의 역사와 지방교회들, 154-155쪽)

    ‘복음주의 크리스천 학자들과 사역의 인도자들’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이 비성경적이라고 단체로 비난하는데 열심이지만 정작 자신들은 스스로를 복음주의적인 기초 위에 견고하게 서 있다고 함으로써 분열적인 자신들의 비성경적인 성향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왔다. ‘복음주의’라는 용어로 스스로를 정의한 것도 그들이고, 심지어 하나님이 받으신 사람들(롬14: 1—15: 13 참조) 을 포함하거나 배제시키는 잣대로 이런 용어를 사용한 것도 그들이다. 위트니스 리는 인용문 14에서 이러한 분열적인 성향에 맞서서 영 안의 하나, 즉 주님 자신이 내주하시는 곳이자 그분의 살아있는 거처가 되는 거듭난 믿는 이들의 영 안에서의 하나를 강조한 것이다(고전 6:17, 딤후 4:22, 엡 2:22).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이 분열의 손상과 하나에 관한 큰 필요성을 다룬 위트니스 리의 실제 메시지를 감추어 온 것은 우리가 보기에 그들이 위트니스 리의 이런 주장이 진실함을 인정한 것이고 또한 그런 주장에 의해 그들이 정죄받은 증거이다. 다른 사람에 관해 증언할 때는 진실함이 요구된다는 그리스도인의 믿음(마 19:17-18; 막10:18-19; 눅18:19-20)을 실행하는 사람들로서 그들은 왜 공개 서한에 따로 떼어 내어 소개했던 부분에 합당한 이해를 줄 수 있는 몇 개의 문장들은 독자들에게 제공하지 않는가?

    4.4 인용문 13 목차로 돌아가기

    인용문13은 위트니스 리가 쓴 신약 성경 회복 역의 또 다른 각주에서 가져온 것이며, 주님께서 계시록 3장 18절에서 빌라델피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에 대한 주석이다.9

    인용문 13

    변절한 교회는 주님의 말씀에서 빗나가 이단이 되었다. 개혁 교회는 어느 정도 주님의 말씀으로 회복되었지만, 다른 많은 이름, 예를 들면 루터교, 감리교, 성공회, 장로교, 침례교…와 같은 이름을 취하여 스스로 이름을 붙임으로써, 주님의 이름을 부인했다. …주님의 말씀에서 빗나가는 것은 변절이고, 주님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영적인 음행이다.(신약 성경 회복 역 계3:8 각주 3).

    위트니스 리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계시록 2장과 3장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들을 1세기에 소 아시아에 있는 글자 그대로의 일곱 개의 교회들과 일곱 단계들 안에 있는 기독교의 역사 모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해 왔다. 계시록 3장 8절은 주님의 원래의 목적으로 회복된 교회인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한 주님의 칭찬이다.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하여 좋게 말씀하셨고 어떤 책망의 말도 없으셨다. 일곱 서신들의 순서를 볼 때 빌라델비아에 있는 교회에 보낸 서신은 많은 이들이 변절한 로마 가톨릭 교회를 가리킨다고 한 두아디라에 있는 교회에 보낸 서신과 또한 많은 이들이 개혁 교회를 가리킨다고 한 사데에 있는 교회에 보낸 서신 뒤에 온다. 그런데 그 두 교회들은 각각의 하락의 정도에 따라 주님께 심한 책망을 받았다.10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이 위트니스 리가 그런 식으로 개신교를 특징 지은 것에 대해 매우 불쾌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께서 그의 행위는 죽어 있고, 그 상태는 불완전하다(계3:1-2)고 선포하셨던 사데에 있는 교회를 개신교로 보았던 같은 개신교 전통 내의 사람들의 통찰을 거듭 제시하고자 한다. 서두에서 계시록 2장과 3장에 대한 “역사적인 해석에 추가하여 영적인 적용”11도 제시하고 있는, 달라스 신학교에서 오래 근무했던 드와이트 팬테코스트(J. Dwight Pentecost) 는 널리 알려진 자신의 책인 <다가올 것들>(things to come)에서 사데에 있는 교회에 대한 월터 스코트(Walter Scott)의 다음과 같은 해석을 그의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있다.

    종교개혁은 은혜와 능력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간섭하심이며 교황권을 무력화시켰고 300년동안 많게 혹은 적은 불빛으로 불타왔던 빛을 유럽에 소개했다. 개신교가 분열되고 죽어 있는 것은 개신교가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에 대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준다.–사데(3:1-6)12

    또한 무디 성경 연구소 부원장을 역임한 윌리엄 니웰(William R. Newell)은 “죽은 ‘개신교’”라는 제목아래 사데에 있는 교회에 대해 언급하면서, 스코트(Scott)보다 더 귀에 거슬리는 말투를 구사한다.

    알려진 상태 :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개신교” 를 이 보다 더 정확하게 묘사할 수는 없다! 로마 천주교의 흑암과 무지에 대항하여 넘어선, 개신교는 다음과 같은 계몽과 외적인 행위를 가지고 있다: 신조과 역사를 가진 위대한 “국가 교회” 또는 “교단”, 호화스러운 교회당과 대성당, 대학과 신학교, “위원회”, 출판국과 선전, 국내외 선교를 포함한 조직적인 활동을 수행하는 사람들, 심지어 법정에서(at court) “입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로비” 전문가들! 여러분과 나는 교회를 바울의 시대에 오순절에 주어졌던 성령 이외의 다른 모델에 감히 비교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과 비교해 볼 때 사데 교회가 이름은 가졌으나 죽었다는 것은 “성령으로 충만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는…” 상태가 아님을 말한다. “너는 죽어 있다.” 무시무시한 상태! 배교의 시대이래 하나님의 영의 가장 강력한 역사 속에서 종교개혁 당시에 진리에 대한 회복이 있었지만, 기독교계는 영적인 사망 속으로 가라앉아 왔다.13

    전국에서 시청이 가능한 라디오 프로그램인 바욜라의 시간(The Biola Hour) 진행자이자 널리 존경받는 성경 교사인 리만 스트라우스(Lehman Strauss) (1911-1997) 역시 사데가 기독교계 를 가리킨다고 말했다. 기독교계 내의 개신교에 대한 그의 다음과 같은 평가는 충격적이다.

    오늘날의 개신교는 활력을 잃고 지쳐있다. 우리 중에 가장 낙관적인 사람도 개신교는 지난 350년간 인문학과 지성주의(知性主義)에 대해서는 자신하지만 성령의 인격과 능력에 자신을 내어 맡기지는 못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탄의 영향력이 증가하는 에큐메니컬 교회에 대해 개신교가 보여 주는 광범위한 묵인은 경보를 발하고 있고, 줄잡아 말하더라도 ….

    사데에 있는 교회에게 하신 말씀은 예언적으로 기독교계에 적용된다. 교회들은 영적인 능력에서 쇠하여 가고 있고 질에 있어서 결함이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교회에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개별적인 믿는 이들에게 성령의 인격성과 그분과의 관련성이 희미하게 이해되는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14

    환영받는 복음주의 저술가인 A.W. 토우저(A. W. Tozer) (1897-1963) 는 사데에 있는 교회에 관하여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주목 할만한 소 논문인 <교회 안에서 기울어가는 그리스도의 권위>(“The Waning Authority of Christ in the Churches,”)에서 스트라우스가 비방했던 동일한 풍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내가 내 부담의 이유를 좀 말해 보겠다. 그것은 이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날 그분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임들 가운데서 거의 권위가 없으시다. 나는 로마 천주교나 자유주의자들이나 유사 크리스천 이단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일반적으로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을 의미하며, 복음주의자들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들이 우리 주님과 그분의 사도들의 영적인 후예임을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을 포함한다.15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인 평가들은 확실히 날카롭고 위트니스 리가 말한 것과도 일치하지만, 우리는 또한 인용문 13 내용 중에 특별히 어떤 부분이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이 그토록 맹렬하게 반대하게 했는지를 고려해 보아야만 한다. 서명자들을 특별히 격노케 한 내용은 아마도 위트니스 리가 교파들이 특정 이름을 갖는 실행을 교회의 남편(고후 11:2; 엡 5:23; 계 21:2)이신 주 예수님께 간음하는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인 것같다. 그러나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이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소동을 일으켰는지와 상관없이, 확고한 사실은 성경에는 어떤 교파도 없고 교파적인 이름을 붙인 교회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거주하는 지방과 일치된 지방적인 교회들만 있다(행 8:1; 13:1; 롬 16:1; 고전 1:2; 계 1:4, 11). 교파( denomination)라는 말 자체가 “하나의 이름에 의해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교파적인 단체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 어떤 이름들을 취하는가? 그런 이름들은 대개 예를 들어 루터교인과 웨슬리안처럼 자신들이 존경하는 창시자의 이름에서 유래했거나 혹은 침례교인, 감리교인, 장로교인처럼 자신들이 다른 이들과 구별될 만한 실행이나 교리에서 유래된 이름들 이다. 그러나 정결한 아내가 가져야 할 유일한 이름은 자기 남편의 이름뿐이며 다른 어떤 이름도 아니다. 그러한 교파적인 이름들 자체가 교회의 유일한 남편이신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 아니고, 그 단체들이 다른 단체와 나뉘어지는 공통된 역사, 실행 또는 교리적인 강조점과 같은 것들에 속했음을 간증한다. 이것은 위트니스 리가 말해 온 것처럼 일종의 영적 간음이다. 더 나아가 특별한 이름으로 교파를 형성하는 것은 성경의 계시와는 동떨어진 입장을 실행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을 갖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서 빗나간 것이고 사실상 배교의 한 형태이다. 인용문 12가 묘사한 내용에 바로 이어진 마태복음 16장18절에 대한 또 다른 각주에서, 위트니스 리는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을 취하는 것에 관해 다음과 같이 추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내 교회란 교회가 주님께 속한 것이지,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교회는 교파들과 같지 않은데, 왜냐하면 교파들은 어떤 사람의 이름이나 어떤 것에 따라 이름이 붙여졌기 때문이다.(신약성경 회복역, 마16:18 각주 4)

    아래 내용은 위트니스 리의 각주 전문이다. 인용문 13에서 부당하게 삭제하여 제시되지 않은 부분은 꺽쇠로 표시를 했다.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표현이고, 주님의 이름은 주님 자신이다.] 변절한 교회는 주님의 말씀에서 빗나가 이단이 되었다. 개혁 교회는 어느 정도 주님의 말씀으로 회복되었지만, 다른 많은 이름, 예를 들면 루터교, 감리교, 성공회, 장로교, 침례교와 같은 이름을 취하여 스스로 이름을 붙임으로써, 주님의 이름을 부인했다. [회복된 교회는 완전히 주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이름을 버렸다. 회복된 교회는 절대적으로 주님께 속하며, 어떠한 교파 (어떤 이름)와도 아무 상관이 없다.] 주님의 말씀에서 빗나가는 것은 변절이고, 주님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영적인 음행이다. [그리스도와 약혼한 순수한 처녀(고후11:2)인 교회는 자기 남편의 이름 외에는 어떠한 이름도 가져서는 안 된다. 다른 이름은 모두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다. 회복된 교회생활 안에는 발람의 가르침 (계2:14), 니골라당의 가르침(계2:15), 이세벨의 가르침 (계2:20), 사탄의 비밀스러운 교리가 없다(계2:24). 다만 주님의 순수한 말씀만 있을 뿐이다. 회복된 교회에는 어떠한 교파들(이름들)이 없다. 다만 유일한 이름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있다. 말씀에서 이단으로 빗나가는 것과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많은 이름을 높이는 것은 타락한 기독교의 가장 두드러진 표시이다. 모든 이단과 전통에서 순수한 말씀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다른 모든 이름을 버리고 주님의 이름만 높이는 것이 회복된 교회의 가장 고무적인 증거이다. 이것이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교회에 주님의 계시와 주님의 임재가 있고, 살아 있는 방식으로 주님이 표현되고, 빛이 충만하고, 생명의 풍성이 가득한 이유이다.]

    4.5 인용문 15와 16 목차로 돌아가기

    인용문 15

    로마 천주교를 포함한 모든 교파 속에도 참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은 주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존재하고 있는 교파의 조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다. 교파의 조직들은 합당한 교회 생활의 하나님의 경륜을 파괴시키고 사탄의 조직을 세우기 위해 사탄에 의해 이용되어왔다. 교파들 속에나 로마 천주교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은 그들이 어디에 있다 하더라도 구원은 받았으나 그 체계, 그 악한 조직은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다(창세기 라이프 스터디(보급판 II), 145쪽)

    인용문 16

    우리는 기독교에 관심이 없고, 기독교계에 관심이 없고, 로마 천주교에 관심이 없고, 모든 교파에 관심이 없다. 성경이 큰 바벨론은 무너졌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선포이다. 기독교계가 무너졌고 가톨릭교가 무너졌고 모든 교파가 무너졌다. 할렐루야! (일곱 영, 111쪽)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이 인용문 15와 16내용에서 매우 불쾌하게 여긴 것은 위트니스 리가 교파적인 조직들을 사탄과 바벨론과 연관짓고, 그러한 조직들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고 비난하고, “타락한“ 기독교에 대한 승리를 선포한 것이다. 그것은 냉정한 상황 묘사이며 교파 조직에 애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인용문 15에서는 삭제되어서 공개 서한의 독자들이 읽지 못했지만, 위트니스 리가 해당 장(章)에서 말하고자 한 요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개인적인 선호와 신학적인 관념과 의견의 차이와 관할 지역들에 의해 분열되어 왔지만,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지셨던 원래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은 하나 됨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하나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위트니스 리는 그의 사역에서 하나됨을 위해 지속적으로 분투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분열되어 왔고, 하나되어 대적에게 수치를 돌리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어야 할 교회는 분열됨으로써 교회 안에 거주하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합당하게 증거할 수 없었기에 세상을 향하여 증거를 상실해 왔다(요17:21-23). 오늘날 교회 안의 분열은 그 수를 셀수 조차 어려울 정도이고, 분열의 형태도 가지각색이지만, 그러한 거대한 찢겨짐들은 하루 밤 사이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분열은 수 세기에 걸쳐 발전되었다. 인용문 15를 발췌해 낸 동일한 장(章)에서, 위트니스 리는 창세기에 대한 다른 많은 주석가들처럼 노아의 홍수 이후에 있었던 열국들의 발전을 교회 시대에 많은 교단들이 발전할 것에 대한 전조(前照)로 해석했다. 많은 열국들이 바벨론으로 완성된 반면에, 많은 교파들은 큰 바벨론으로 귀결된다.

    열국에서 바벨이 일어났다. 이것은 교파 가운데서 바벨론이 나온 것을 상징해 준다. 모든 분열과 교파가 큰 바벨론에서 완성될 것이다. 바벨론(Babylon) 은 히브리어 바벨 (Babel) 과 같은 헬라어 단어이다. 만일 당신이 신약을 읽는다면 기독교의 분열들, 즉 모든 교파들 중에서 바벨론이 나왔음을 볼수있다. 고대에 모든 국가들은 바벨을 산출했고 기독교 안의 모든 교파들은 결국 큰 바벨론으로 완성될 것이다. 다시 한번 우리는 창세기가 씨앗의 책임을 본다. 왜냐하면 이곳 창세기 10장에 바벨론의 씨가 있고 계시록 17장, 18장에 큰 바벨론의 수확이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라이프 스터디(보급판 II), 144쪽)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그리고 독자들)이 자신들의 교파적인 연합을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보다 우위에 둔다면, 자신들이 귀히 여기는 전통들이 빛가운데서 그런 식으로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것은 이해할 만 하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만 그러한 평가를 내렸던 것은 아니다. 찰스 스코필드 (Charles I. Scofield)는 널리 유행했던 자신의 스코필드 주석성경 (The Scofield Reference Bible)에서 다음과 같이 위트니스 리가 창세기 라이프 스터디에서 바벨의 역사와 교파들의 발전 사이의 유사성에 관하여 주석을 달았던 내용과 똑같은 주석을 달았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스코필드가 죽은 후에, 나중 편집자들은 개정판에서 창세기 11장 1절에 관한 다음의 각주들을 삭제했다.

    바벨(“혼돈”)의 역사는 충격적이게도 고백된 교회(the professing Church)의 역사와 일치한다. (1) 연합(창11:1)-배교한 교회(행4:32-33), (2) 야심(창11:4), 세상적이고 영적이지 않은 수단을 사용함(창11:3), 사람이 만든 연합으로 끝남-교황 제도, (3) 언어로 인한 혼돈(창11:7)- 셀 수 없는 종파들로 이뤄진 개신교.16

    위트니스 리는 그의 저서 여러 군데에서 스코필드 주석 성경에 편집된 내용들을 높이 평가했다. 위트니스 리는 20세기 초반에 주님에 의해 일으켜졌기 때문에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성경 학자들이 쓴 서적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 성경 학자들은 혼란스럽고 분열된 기독교계의 상황에 대해 요즘의 성경 학자들보다 더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상황은 비록 종파 구분에 대한 태도에서는 이전보다 유연해지고 너그러이 수용하게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에 관해서는 지난 세기동안 나아지지 않았다.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과 공개 서한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분열된 상황 자체보다 분열에 대한 비난때문에 불쾌해 했다.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은 ‘복음주의’(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단지 믿는 이들이어야 한다는 것 대신에)라는 자신들의 입지를 보호하려고 인용문을 문맥과 다르게 인용하고 공개 서한의 독자들에게 최대한 나쁜 인상을 주도록 편집했다. 물론 우리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들은 이런 식의 학문적 접근 방식을 택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독자들이 분열되고 혼란스러운 현 기독교의 상황에 대해 안타까워하기 바라며, 오늘날 기독교계의 참된 상황을 솔직하게 묘사한 위트니스 리의 적나라한 표현에 상처받지 않기를 바란다.

    위트니스 리와 다른 이들이 했던 것처럼 기독교의 이러한 분열을 지적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 하지만, 교회의 하나를 유지하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신 본을 회복하는 것은 더욱 절박한 일이다. 이 시점에서 몇몇 독자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계는 분명히 분열되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또 다른 종파인 지방 교회들, 즉 ‘지방 교회’ 파를 만들어 혼란을 가중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런 질문은 분명히 합리적이고, 이런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위트니스 리가 15번 인용문에서 한 답변이 좋은 설명이 될 수 있다고 믿어 여기에 상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모든 교파, 모든 이름이 분열이다. 우리의 이름을 <지방 교회>라고 말하지 말라. 우리는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달(moon)에는 어떤 이름이 없다. 그것은 그저 달이다. 우리는 단지 달을 <달>이라고 불러야 한다. 어떤 이들은 미국달이 중국달보다 더 밝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달이나 중국달같은 그런 것은 없다. 당신이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것은 미국에 있는 달, 중국에 있는 달이다. 그것은 하나의 달이다. 오직 유일한 하나의 달이 있다. 이처럼 교회는 단지 교회이다. <지방 교회>라는 용어는 우리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분열적이지 않고, 소위 교회들로 나누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어떤 지방에 있는 교회이다. 그러므로 <지방 교회>라는 용어는 우리의 본성을 나타낼 뿐 우리의 이름이 아니다. <지방 교회>를 이름으로 생각지 말라. 당신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어떤 지방에 있는 교회 즉 로스엔젤리스 교회, 아나하임 교회 등과 같은 것이다….

    1930년대에 나는 이런 교파 문제에 대하여 많이 말했다. 어느날 잠시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 나의 몇몇 친구들은 나를 잘 알고 있는 나이 든 기독교 지도자들과의 연회에 나를 초대했다. 그곳에 있었을 때 서른 살이 조금 넘은 나는 모두 육십 세 이상 되는 노인들에게 둘러싸인 것을 알았다. 그들 중 한 분이 말을 시작하며 나에게, “이 선생님, 과거에 당신은 설교 중에 교파를 유죄판결했습니다. 당신이 교파를 거슬린 설교를 하여 당신 자신이 또 하나의 교파를 형성한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라고 말했다. 그들은 나를 이미 패배시켰다고 생각했다. 나는 대답했다. “여러분 모두와 이곳에 함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나로서는 모든 문제를 명확히 하게 될 최적의 시기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나는 게바에게 속했다’고 말한 것을 꾸짖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이러한 모든 분열적인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고전1:11-13). 여러분 모두는 자신이 침례교나 장로교나 중국독립 교회파 등 어느 하나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양심에서 나에게 말해 주십시오. 사도 바울이 여기에 있다면 여러분은 사도 바울에게 인정받을 것같습니까?” 그들은, “아닙니다. 물론 바울은 우리를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정직했다. 내가 그들을 이미 압도했기 때문에 그들은 정직해야만 했다. 그때 나는 계속 말했다. “ ‘나는 침례교인이다’, 아니면 ‘나는 장로교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동의하셨으면 여러분은 나를 어디에 두시겠습니까?” 그들은, “우리는 당신을 어느 곳에도 두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나를 어느 곳엔가 두셔야 합니다. 내가 어느 곳엔가 머물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자 나는 계속했다. “주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나는 분명히 그분을 사랑합니다. 내가 그분을 사랑하므로 나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나의 전파를 통해 많은 사람이 구원받았습니다. 내가 그들을 어디에 둘까요? 어느 교파로 내가 그들을 보내야 하겠습니까? 침례교입니까? 장로교입니까? 아니면 중국 독립 교회입니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말했다. “상황을 보십시오. 이제 왜 내가 분열을 거스려 전파하는지, 다른 한편으로 내가 또 하나의 분열을 형성하는 것같아 보이는지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함께 올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를 여러분과 하나되게 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분과 하나가 아닌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내일부터 여러분의 모든 간판을 내려 놓고 여러분의 모든 이름들을 잊어버리기로 약속한다면 나는 오늘 저녁 모든 형제들과 교통하여 즉시 우리 집회소 문을 닫을 것을 여러분과 약속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도시에서 한 교회로 함께 모일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지점에서 그들은, “안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결론을 맺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 않고 있으니 분열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그날 밤부터 내가 중국 대륙을 떠나던 날까지 누구도 다시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들은 하늘에 속한 법정에서의 입장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그들의 분열적이고 종파적인 이름들을 유지하기 원했다. 몇 사람은 “우리는 중국 독립 교회파입니다. 어느 것도 이것보다 좋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는 삼대째 장로교인들입니다. 어떻게 이 이름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라고 말했다. 몇몇 다른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침례교인들입니다. 침례교는 장로교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 장로교는 세례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침례를 줍니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싸움에 익숙하다. (창세기 라이프 스터디(보급판 II), 137-140쪽)

    위트니스 리가 인용문 15번 내용처럼 교파 조직들이 ‘사탄에 의해 이용당해 왔다’ 라고 말하고, 인용문 16번에서와 같이 기독교계가 ‘타락했다’ 라고 말한 것이 지나친 것인가?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은 위트니스 리가 확실히 지나쳤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각각의 주장이 담긴 내용들에서는 매우 분명했던, 위트니스 리의 주장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를 독자들에게 제시하지 않았다. 인용문 16번의 문맥은 이 점을 매우 분명히 보여준다. 위트니스 리는 이 장에서 요한계시록이 승리의 책이며, 이 책에서 보여진 모든 것은 주님께는 이미 성취된 것으로 간주된다 는 것을 지적하였다. 예를 들어, 위트니스 리는 요한계시록이 승리하신 그리스도(5:4-5)와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왕국 (11:15), 마귀의 참소를 이긴 성도와 하늘에서 쫓겨난 마귀 (12:9-11), 큰 바빌론의 타락(14:8), 큰 음녀(19:1-6), 어린 양의 결혼 만찬(19:7), 사탄, 짐승, 거짓 선지자, 죽음, 음부가 불못에 던져짐(20:10,14),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인 거룩한 성의 예비(21:2)에 관해 증거하는 책임을 지적했다. 그 장은 승리에 찬 생활 안으로 들어가려면 찬양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교통으로 결론을 맺는다. 물론 이것들 중 어떤 것도 공개 서한의 독자들에게 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위트니스 리와 다른 이들이 논쟁하는것처럼 큰 성 바벨론이 단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아니라 일반적인 기독교계를 예표하는 것이라면, 바벨론에 대한 주님의 승리는 분열적인 조직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는 것인가? 인접한 구절의 문맥에 따르면, 인용문 16번은 요한 계시록의 해당 구절들의 선포에 반향하는 감탄의 말이다. 거듭해서 우리는 공개 서한이 포함하지 않은 부분들을 괄호로 묶어 여기에 제시하고자 한다.

    [또 다른 둘째 천사가 뒤따라와서 말하였습니다. “무너졌습니다! 자신의 음행으로 말미암은 분노의 포도주를 모든 민족에게 마시게 하던 큰 성 바빌론이 무너졌습니다.”(계 14:8)] 우리는 기독교에 관심이 없고, 기독교계에 관심이 없고, 로마 카톨릭교에 관심이 없고, 모든 종파에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큰 성 바벨론은 무너졌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선포이다. 기독교가 무너졌고, 기독교계도 무너졌으며, 천주교도 무너졌고 모든 종파가 무너졌다. 할렐루야!

    [“이 일들이 있은 후에 나는 하늘에 큰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을 들었습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습니다. 왜냐하면 음행으로 땅을 부패하게 한 큰 창녀를 그분께서 심판하시어, 그 여자의 손으로 흘린 그분의 노예들의 피에 대해 복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두번째로 “할렐루야 “라고 말하니, 그 여자를 태우는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갔습니다. 또 스물네 장로와 네 생물이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며 “아멘 할렐루야”라고 말하니, 보좌에서 “하나님의 모든 노예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작고 큰 모든 사람들아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라고 하는 한 음성이 났습니다. 또 나는 큰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으며 큰 천둥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할렐루야 전능하신 분 주 우리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다스리십니다” (계19:1-6).] (일곱 영, 111-112쪽)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위트니스 리가 큰 성 바벨론과 기독교의 하락을 초래한 창녀들을 동일시했던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또한 이러한 동일시를 허용한다면, 우리는 요한 계시록 14장 8절의 예언에 따라, 기독교계의 하락한 상황이 무너질 그 날이 있게 될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 중 누구라도 이것에 대해 애통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중 누구라도 기독교계의 이러한 하락한 상황을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위트니스 리는 여기에서 기독교계와 천주교와 교파들이 타락했음을 강하게 선포했지만, 문맥을 볼 때 그는 기독교계의 부정적인 방면들을 가리킨 것이다.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인의 신앙, 그리스도의 몸과 신부인 그리스도인의 교회,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 심지어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윤리 전체가 타락했다고 선포한 것이 아니다. 위트니스 리의 사역이 이러한 적극적인 문제들에 관해 능력있고 인상적으로 변호한 것은 그 범위와 분량에 있어서 공개 서한에 서명한 모든 이들의 노력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능가한다. 대신에, 위트니스 리는 음행으로 땅을 더럽히는 기독교 분파들의 타락과 창녀의 많은 딸들로 분열되어 온 기독교계 분파들의 타락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역사 전반은 기독교계의 이러한 부정적인 방면들이 긍정적인 방면들 만큼이나 엄연한 사실임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고,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런 부정적인 방면들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 눈으로 목격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우리가 그러한 부정적인 방면들을 옹호해야 할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선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위트니스 리가 인용문 16번에서 한 것처럼 큰 성 바벨론과 창녀에 관해 예언한 승리를 주시하고 그 편에 함께 서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큰 성 바벨론에 대해 하늘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하고, 그렇게 해야 한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계18:4-5).

    4.6 인용문 17 목차로 돌아가기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교회를 아는 것 까지도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계속해서 지방적인 교회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가장 새롭다면, 우리는 오늘날이 지방 교회들의 시대임을 깨달을 것이다. (지방 교회들을 위한 일곱 영, 26쪽)

    우리는 인용문 17이 공개 서한에 포함된 이유를 추측할 뿐이지만, 적절한 문맥을 무시한 채 떼어 낸 내용이 주는 인상은 위트니스 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우주 교회보다도 지방 교회들을 더 높인다는 것이다. 인용문 17이 “복음주의 교회들 및 교파들의 적법성에 대하여” 라는 전체 제목 아래 배치된 것을 보면,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은 독자들에게 지방 교회들을 모르면 기껏해야 2류 그리스도인일 뿐이라고 위트니스 리가 가르쳤음을 확신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인상들은 심각한 오해이다. 위트니스 리는 인용문 17이 인용된 장(章)에서 성경에 나타난 네가지 주요 항목들인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교회와 지방 교회들을 강조한다. 그는 성경 안의 계시의 점진성과 요한계시록에 있는 지방 교회들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어떤 식으로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우주 교회의 중요성을 얕보거나, 지방 교회들 안에서 모이지 않는 그리스도 안의 참된 믿는 이들이 그렇게 하는 사람들보다 열등하다고 암시하지 않는다.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만 오직 소수만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겸하여 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참으로 비밀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이 되셨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셨다. 그리고 나는 그분이 이 땅 위에서 육신 안에 계셨을 때 작은 사람이었다고 믿는다. 예수님은 작은 사람이셨지만, 그 작은 사람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이 그분 안에 체현되셨다. 놀랍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하나님으로 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부터 계속 나아가서 교회를 안다는 것은 더욱더 어렵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알지만, 교회를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교회를 아는 것은 더 큰 진보이다. 우리 모두는 거듭거듭 진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첫째로 하나님을 알 필요가 있으며, 둘째로 그리스도를 알 필요가 있고, 그 다음에는 계속해서 교회를 알아야 한다. 교회 또한 하나의 비밀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며 그리스도는 오늘날 교회 안에 계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체현되시며,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서 실재화 되신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교회로부터 우리는 계속해서 교회들을 보아야 한다. 교회를 아는 것은 비교적 쉽지만 교회들을 아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는 알지만 교회들은 모른다. 그들은 교회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지만 교회들은 보지 못했다.( 같은 책, 24쪽)

    요한계시록은 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사이를 거니시며, 그분이 그들에게 일곱 서신을 쓰신(13절, 19-20절; 2—3장) 금등잔대인 지방 교회들로 시작하고 있다(1:11-12, 20). 그러므로 금등잔대로 나타난 지방 교회들은 요한계시록의 중심 항목이며, 성경의 마지막 책에 이러한 탁월한 표징을 포함시킨 것은 이 땅에 있는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는데 지방 교회들이 매우 중요함을 가리킨다. 위트니스 리는 인용문 17을 발췌한 책에서 지방 교회들을 강조했지만, 그것은 요한계시록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다. 그가 한 이러한 강조는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이 자신들의 독자들에게 믿게 하려고 했던 것처럼 비성경적인 것도 아니고 반기독교적인 것도 아니었다. 사실상 위트니스 리가 관심한 것은 비성경적인 것과 무관할 뿐 아니라 성경을 합당하고 완벽하게 해석하기 위한 것이었고 성경을 고려한 것이었다. 인용문 17을 발췌했던 전후 본문을 보면 이 점이 분명해 진다. 아래 제시된 것은 인용문 17이 담긴 전체 단락인데, 공개 서한이 포함하지 않은 부분은 이번에도 괄호로 표시했다.

    [과거에 어떤 이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고, 교회를 안다고 말했다. 그들은 에베소서로부터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 그러나 그들은 지방 교회들을 갖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많은 서신서들 특히 그들의 성경의 마지막 책은 삭제한다. 그들의 성경은 단지 오직 육십 오 권으로 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의 성경이 육십 육 권이 되려면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교회를 가질 뿐만 아니라 지방 교회들도 가져야 한다. 구약에는 우리는 하나님을 갖는다. 사복음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갖는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는 우리는 교회와 교회들을 갖는다. 그리고 계시록에서 우리는 지방적인 것으로 강조되는 교회들을 갖는다. 그러므로 교회들, 곧 지방 교회들을 안다는 것은 성경에 계시된 네 가지 주된 그림들을 아는데 있어서 가장 큰 진보 것이다.

    가장 새로와짐

    나의 부담은 우리 모두가 성경의 마지막 책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계시록은 우리에게 삼층천에 있는 한 교회가 아닌 지방 교회들에 대해 알려 준다.]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교회를 아는 것까지도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계속해서 지방적인 교회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가장 새롭다면, 오늘날이 지방 교회들의 시대임을 깨달을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마지막 시대에, 그분의 성경의 마지막 책에서 주된 것은 지방 교회들이다.] (같은 책, 25-26쪽)

    문맥을 무시한 채 떼어낸 인용문 열 일곱개 중에 맨 마지막인 이 사례가 아마도 사람들에게 위트니스 리를 반대하도록 선동하려고 위트니스 리가 의미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왜곡시킨 가장 극명한 예일 것이다. 위에 제시된 더 넓은 문맥의 도움이 없었다면, 위트니스 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지식을 폄하하고 지방 교회들을 이 모든 것들 위에 두려고 했던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더 넓은 문맥은 다섯 문장으로 된 인용문 17내용과는 확실히 다른 의미이다. 여기에 제시된 더 온전한 내용을 담은 위트니스 리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당연히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며, 또한 당연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구약과 복음서들과 사도행전과 서신서들과 계시록으로 구성된 성경 육십 육 권 전체를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성경 특별히 요한 계시록이 교회들이 지방적이어야 함을 계시하기 떄문에, “우리는 교회들이 지방적임을 아는 데까지 전진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구약의 하나님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우리는 그분을 아는 데까지 전진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복음서들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가? 성령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고 그리스도의 참된 한 몸인 그분의 영광스런 교회가 창조되었음으로 우리는 교회를 이런 식으로 아는 데까지 전진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 나타난 교회의 방면들만 아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가? 대제사장이신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방 교회들 가운데 서셔서 그들에게 사역하시고, 그들이 밝게 빛나도록(계 1:11-20) 돌보고 계시는데, 이 방면은 사도행전이나 서신서들에 나타나 있지 않으므로 “우리는 지방적인 교회들을 아는 데까지 전진해야 한다.” 우리는 물론 오늘날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지방 교회들이라는 이 문제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해한다. 많은 사람들의 귀에 이것이 얼마나 낯선지 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자체가 지방 교회들을 계시하는 데까지 전진했기 때문에, “우리는 지방적인 교회들을 아는 데까지 전진해야 한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 동의할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런 이유만으로 위트니스 리의 말의 의미를 정반대로 왜곡하지 말기를 바라며, 또한 우리는 우리의 독자들이 이 정도는 우리에게 동의해 주기를 소망한다.

    4.7 위선이라는 암시는 타당한가? 목차로 돌아가기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은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와 지방 교회들로 모이는 사람들이 “복음 주의 교회들과 사역들의 연합체”에서 회원 자격을 얻으려고 애를 쓰면서 서명자들이 복음 주의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잘못 소개해 온, 기독교의 오류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단호한 진술들을 계속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은근히 비난했다. 그런데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나 지방 교회들은 그러한 회원자격을 얻고자 한적이 없다. 이런 비난은 비통할 만큼 무지한 것이며, 더 이상 고려할 가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가 실제로는 위트니스 리의 진술들을 계속 지지하면서 지방 교회들 밖의 그리스도인들과의 연합을 도모하는 위선을 행하고 있다 라고 의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러한 정황을 알면서도 추가 답변을 하지 않음으로써 이런 비난으로 인해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게 하고 싶지 않다. 사실상 우리는 위트니스 리의 책들을 자세히 조사하고 우리와 함께 광범위한 대화에 참여한 몇몇 복음주의 단체들과의 우정으로 많은 격려를 받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우리와 갖게 된 좋은 관계때문에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왔고, 그들이 취한 입장때문에 비난과 고통을 받고 있다. 우리는 핍박을 피하려고 진리를 외면하기보다는 진리와 함께 고난받으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이 보여준 본에 의하여 상당히 고무되었다. 특히 그들의 1 차적인 관심은 신앙의 본질적인 것들에 관한 우리의 입장을 평가하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위트니스 리와 우리가 그러한 본질적인 것들에 대한 가르침에 있어서 확고하게 정통(orthodox) 이라고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동료 믿는 이들로서 우리와 하나임을 공개적으로 천명했고,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불일치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상호 조화를 깨도록 방치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크리스천 리서치연구소 (CRI) 의 대표이자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인 ‘성경 답변자’(Bible Answer Man)를 진행하는 행크 해네그래프(Hank Hanegraaff) 는 다음과 같이 썼다.

    “개인적으로 나는 대환난의 때나 천년왕국의 의미와 같은 부차적인 논점들에 있어서는 이 운동과 심한 차이가 있지만, 성경적인 정통을 정의하는 본질적인 문제들에 있어서는 지방 교회들과 어깨동무하며 함께 서 있다.” 라고 썼다. (지방 교회들 “진정한 믿는 이들이자 그리스도의 몸의 같은 지체들”, 10)

    의미심장하게도, 그는 공개 서한과 이에 대한 우리의 답변에서 큰 현안이 되고 있는 삼일성 (Trinity)의 교리를 예로 들어 추가적으로 언급한다. 우리가 밝혀왔듯이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은 위트리스 리의 책들을 철저하게 연구하지 않았지만, 행크 해네그래프는 자신이 “기본 연구계획에 착수했는데, 이것은 그들의 출판물들뿐 아니라 그들의 교회들과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에 관련된 프로그램들과 관련인들과의 상호 접촉과 대화를 포함한 것이다” (같은 책, 9쪽)라고 진술한다. 이단 변증 연구 단체인 ‘행동하는 답변들(Answers in Action)’의 창립자인 그레첸 파산티노(Gretchen Passantino)와 ‘크리스천 리서치 저널(The Christian Research Journal)’의 편집장인 엘리옷 밀러(Elliot Miller)도 그의 연구에 합류했었다. 해네그레프는 삼일성에 관한 우리의 가르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예를 들면, 삼일성(the Trinity)에 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영원히 구분되시는 세 위격 안에 계시된 한 분 하나님(one God)이 계시다는 실재 안에서 하나로 일치한다. 비록 우리는 특정한 성경 구절들을 해석하는 것에서는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앞에서 말한 전제는 손상될 수 없다. 오래 지속된 기간 동안 지방 교회들의 구성원들과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오늘날 복음주의 공동체의 대다수가 애석하게도 놓치고 있는 교리적 정확성에 대한 예리한 관심이 그들 안에 있음을 목격하게 되었다는 것은 특이할만 하다. (같은 책, 10쪽)

    그레첸 파산티노도 그녀 자신이 전문적이고 철저한 연구조사를 시행한 후에 아래와 같이 우리를 지지하는 글을 썼다:

    나는 그 운동의 모든 인쇄된 자료들과 녹음된 자료들을 아무 제한 없이 접근할 수 있었다. 또 나는 갓 믿은 초신자이든 수십 년 동안 지방 교회들에서 봉사했던 인도하는 형제들이든 상관없이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 제한 없이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수개월에 걸처 주의 깊고 철저한 연구조사를 실시하였다. 이제 나는 더 낫고 더 정확하고 더 충분한 정보 지식의 근거에 따라 이 운동은 그 가르침과 실행이 정통 기독교의 범주에 잘 드러맞는 크리스천 운동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앞의 책, 19)

    풀러 신학대학도 광범위한 연구를 시행했고, 또한 우리와 유익한 대화가운데 직접 만나는 식으로 교류했으며, 그들은 믿음 안에 있는 같은 믿는이들로 우리를 따뜻하게 환영했다. 풀러 신학 대학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풀러(Fuller) 신학 대학과 지방 교회들의 인도자들과 그 출판기관인 리빙스트림미니스트리 (LSM)는 최근에 지난 2년 동안 해온 광범위한 대화를 마쳤다. 이 기간에 풀러 신학 대학은 리빙스트림미니스트리에서 출판한 위트니스 리와 워치만 니의 저서들을 특별히 강조하는 지방 교회들의 주요 가르침들과 실행들을 철저하게 검토하고 조사해 보았다. 이러한 과정을 취한 이유는, 종종 이들 교회들에 관해 던져지는 여러 가지 많은 질문들과 비난들에 대한 답을 주고자 하는 것이었고, 또한 역사적이고 정통적인 기독교의 빛 안에서 이 두 사람이나 지방 교회들의 가르침들과 실행들의 위치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풀러 신학 대학이 내린 결론은, 지방 교회들과 그 구성원들의 가르침들과 실행들이 본질적인 모든 방면에서 진실하고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그리스도인 신앙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책, 29-30쪽)

    우리는 위트니스 리와 우리에 관한 진실을 찾아 내기 위해 상당한 시간과 자원을 투자한 이런한 크리스천들이 보여 준 자비로운 우정을 소중히 여긴다. 그들을 받음에 있어서 우리는 그들이 우리의 관점을 받아 들일 것을 요구하지 않고, 우리를 받음에 있어서 그들은 우리가 우리의 관점을 바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구주와 주님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신앙 고백과 믿음에 관한 본질적인 것들에 대한 우리의 동의를 근거로 우리를 받는다. 비록 각자가 교회의 실행에 관한 상대방의 입장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주님의 인도라고 본인들이 느끼는 바를 따라 실행하도록 상대방의 자유를 존중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에 있어서 어떤 부조화나 위선이 없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에 관한 빛 안에서 기독교의 오류를 지적한 위트니스 리의 진술을 부정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것을 출판하는 일을 멈추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주님이 주셨다고 우리가 믿는 것을 포기하는 것과 같이 때문이다. 우리는 위선이라는 비난은 “그리스도인 학자들와 사역의 인도자들”이라고 자신들의 자격을 선전하지만 본인들이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저서들을 충분히 연구하는데 실패하고, 그 결과 자신들이 의문을 불러 일으킨 위트니스 리와 우리에 관해 다른 이들을 거짓되이 판단하도록 유도한 공개 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어울린다고 믿는다.

    1. K.S. 라투릿 (K. S. Latourette), 기독교사 1권: 초기교회부터 주후 1500년까지 (A History of Christianity, Vol. I: Beginnings to A.D. 1500)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1953, 1975), 영문 436쪽
    2. 로마 가톨릭 교회를 큰 바빌론으로 본 여러 성경 해석가들 중에는 마틴 루터, 요한 칼빈, 매튜 풀리(Matthew Poole), 존 길(John Gill), 존 웨슬리, 알버트 반즈(Albert Barnes), J. D. 다비, 앤드류 밀러(Andrew Miller), 윌리엄 켈리(William Kelly), 찰스 H. 스펄젼(Charles H. Spurgeon), 찰스 호지(Charles Hodge), 존 피터 랑(John Peter Lange), 로버트 고벳(Robert Govett), C. I. 스코필드, 아르노 C. 가이벨라인(Arno C. Gaebelein), 헨리 A. 아이언사이드(H. A. Ironside), 윌리엄 R. 네웰(William R. Newell), C. A. 코우츠(C. A. Coates), 루이스 탈봇(Louis Talbot), W. A. 크리스웰(W. A. Criswell), 레만 스트라우스(Lehmann Strauss), 존 F. 왈보드(John F. Walvoord), 도널드 그레이 반하우스(Donald Grey Barnhouse) 등이 대표적이다.
    3. 도널드 그레이 반하우스, 계시록 주해 (Revelation: An Expository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1971, 1982), 영문 324쪽.
    4. 월터 루이스 윌슨 (Walter Lewis Wilson), 윌슨 성경 예표 사전 (Wilson’s Dictionary of Bible Types) (Grand Rapids: Eerdmans, 1957, 1979), 영문 241쪽.
    5. 메릴 F. 엉거 (Merrill F. Unger), 엉거의 성경 사전 (Unger’s Bible Dictionary) (Chicago: Moody Press, 1957, 1982), 영문 116쪽. 비슷한 견해로는 다음 참조: 로버트 자미슨 (Robert Jamieson)과 A. R. 파우셋 (A. R. Fausset)과 데이빗 브라운 (David Brown)의 성서 주해 3권-마태복음부터 계시록까지 (Bible Commentary, Volume 3: Matthew—Revelation)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2002), 영문 709쪽; 레만 스트라우스(Lehmann Strauss), 계시록 (The Book of the Revelation) (Neptune, NJ: Loizeaux Brothers, 1964), 영문 291쪽; 루이스 탈봇 (Louis Talbot),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 (Grand Rapids, MI: Eerdmans, 1946), 영문 199쪽, 201-202쪽, 207쪽
    6. 비슷한 단락을 보려면 다음을 참조하라. 신약 성경에 나타난 놀라우신 그리스도, 201-202쪽; 계시록 라이프-스터디, 제 54장, 630쪽; 그 영과 몸, 21쪽.
    7. 위트니스 리가 이 점과 관련해 가르친 바는 많은 방면에서 위대한 교회사가인 필립 샤프 (Philip Schaff)의 가르침을 상기시킨다. 필립 샤프는 1845년에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바울은 모든 고린도 사람들에게 같은 것을 말해야 하고, 그들 가운데 분열이 없어야 하며,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으로 완전히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면한다. 그들은 분파나 종파를 이루는 방식으로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칭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나뉘어지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또 바울이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도 아니고 아무도 바울의 이름 안으로 침례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이름 안으로 침례 받았던 것이다. 사도 바울이 교회의 본질에 대해 가진 견해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몸의 지체들 모두가 같은 피를 나눈 자요 서로를 돕도록 되어 있는 자라는 것이다. 모두가 한 부름의 소망을 갖고, 한 주님과 한 믿음과 한 침례와 한 분 하나님이신 모든 사람의 아버지를 소유한다. 모두가 화평의 매는 띠로 한 몸과 한 성령의 하나를 힘써 지킨다. 내가 말하건대 이런 견해는 단 한 번의 타격으로 종파 및 교파 조직 전체에 치명적 타격을 가한다.
      필립 샤프, 프로테스탄트 주의의 원칙 (The Principle of Protestantism), Bard Thompson and George H. Bricker 편집 (Eugene, OR: Wipf & Stock, 2004), 영문판, 152쪽
    8. 믿음의 핵심 요소에 대한 검토를 위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와 ‘지방 교회들’의 인도자들에게 보낸 공개 서한”에 대한 간략한 답변 (A Brief Response to “An Open Letter to the Leadership of Living Stream Ministry and the ‘Local Churches’)”, www.lctestimony.org/ResponseToOpenLetter.html에서 읽어볼 수 있다.
    9. “나는 너의 행위를 안다. 보아라, 내가 아무도 닫을 수 없는 열린 문을 너의 앞에 두었다. 왜냐하면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나의 말을 지켰고, 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 일곱 교회에 보낸 서신을 이렇게 예언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학자들 가운데는 존 길(John Gill),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앤드류 밀러(Andrew Miller), 로버트 고벳(Robert Govett), C. I. 스코필드(C. I. Scofield), 아르노 C. 가이벨라인(Arno C. Gaebelein), H. A. 아이언사이드(H. A. Ironside), 루이스 수페리 쉐퍼(Lewis Sperry Chafer), 윌리엄 R. 네웰(William R. Newell), 루이스 탈봇(Louis Talbot), 레만 스트라우스(Lehmann Strauss), 존 F. 월보드(John F. Walvoord), J. 드와이트 펜티코스트(J. Dwight Pentecost), J. 버논 맥기(J. Vernon McGee), 도널드 그레이 반하우스(Donald Grey Barnhouse), W. A. 크리스웰( W. A. Criswell) 등이 있다.
      2. J. 드와이트 펜티코스트, 장차 일어날 일들: 성경 종말론 연구 (Things to Come: A Study in Biblical Eschatology) (Grand Rapids: Academie Books, 1958, 1964), 영문판, 151쪽
      3. 월터 스콧 (Walter Scott),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강해 (Exposition of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London: Pickering and Inglis, 1948), 영문판, 55-56쪽. 위의 Pentecost의 책 152쪽에서 인용됨.
      4. 윌리엄 R. 네웰, 계시록 (The Book of the Revelation) (Chicago: Moody Press, 1935, 1981), 영문판, 62-63쪽
      5. 레만 스트라우스, 계시된 예언적 비밀들 (Prophetic Mysteries Revealed) (Neptune: Loizeaux Brothers, 1980), 영문 197-198쪽.
      6. A.W. 토저, “교회 안에서 기울어가는 그리스도의 권위 (The Waning Authority of Christ in the Churches)” (Harrisburg: Christian Publications, n.d.), 영문 6쪽.
      7. C.I. 스코필드, 스코필드 관주 성경 (The Scofield Reference Bibl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09), 영문판, 18쪽.

    장 5결론 목차로 돌아가기

    우리는 앞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공개 서한이 제기한 기독교 신앙에 관련된 문제들에 관해서 위트니스 리가 사실상 가르쳤던 것을 제시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했다. 우리는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이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을 우리가 완성했다고 느낀다. 그것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에 관해 어떤 결론을 내리기 전에, 그러한 문제들을 다룬 위트니스 리의 더 폭넓은 사역 자료들 그리고 인용문들을 떼어 낸 원래 본문의 전체적인 문맥을 검토하는 일이다. 우리는 거듭해서 이처럼 인용문들을 문맥을 무시한 채 떼어내 사용한 것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을 거짓되게 제시한 것임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우리의 답변이 길어진 것을 인정하며, 독자들이 이 긴 답변으로 인해 지치지 않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공개 서한에 소개된 부정확한 인용문들에 관해서 우리는 그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원래의 입장을 보여주기 위해 위트니스 리의 사역물로부터 인용된 적절하고 충분한 양의 자료들을 제공했다. 이 답변서의 길이가 바로 공개 서한이 떼어내 사용한 인용문들에서 우리가 받는 인상을 논박하는 위트니스 리의 사역물 안에 있는 자료의 풍부함을 말해 준다. 이러한 많은 자료는 풍부할 뿐 아니라 또한 인터넷과1 인쇄된 출판물로2 쉽게 이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이 이 열일곱 개의 인용문들을 문맥을 무시한 채 떼어내 위트니스 리의 실제 가르침과 다르게 일반에게 제시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이러한 행동이 그들이 어떤 종류의 학자들과 사역의 인도자들인지를 보여준다고 믿는다. 물론 훌륭한 학자들과 사역의 인도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단지 본인들이 학자들이요 사역의 인도자들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들을 그렇게 믿는다면 순진한 것이다. 훌륭한 학자는 정의를 내리자면 좋은 연구와 조사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반인들보다 더 상세하고, 더 깊고, 더 주의를 기울여 근거 자료를 검토한다. 즉 그들은 비판적인 평가 기술을 적용하지만, 객관적이고 공정하다. 그들은 단순히 편견이나 숨은 의도 뿐 아니라 문제의 모든 방면을 다룬다. 그들이 한 연구의 가치는 단지 그들의 신분 자체가 아닌 그들이 연구한 방법에 달려있다. 공개 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은 어떤 연구 자료도 제공한 적이 없고 단지 그들의 자격을 위트니스 리를 반대하는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로 내세웠다 (실제로는 그들의 주장에 동의한다고 밝히기기를 거부한 기관들이 그들과 연관이 있음을 밝혔을 뿐임). 그들은 “이 열 일곱개의 인용문들 내용 자체가 말해준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필요가 없다” 라고 반박하려고 했을 수 있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최대한의 충격을 줄 목적만을 위해 원래의 문맥을 무시한 채 떼어낸 인용문들은 그들의 그러한 주장을 입증하지도 못했고, 거짓 증인이 되고 일반인들이 학자의 신분을 신뢰하는 것을 악용한 책임에서도 그들을 면제시켜 주지도 못했다.

    우리는 이 답변과 또 다른 두 개의 답변들을 준비하는 동안 “왜 좋은 연구물을 내거나 자신들의 사역을 바르게 인도하는 것에 좌우되는 사람들이 그것과는 정반대인 문서에 서명했을까?” 라고 의아해 했었다. 그들이 위트니스 리의 글들을 제대로 조사했더라면, 서명자들이 위트니스 리가 한 말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을 정작 위트니스 리 본인은 말하지 않았음을 알았을 것이고, 위트니스 리를 거짓되게 비난하는데 동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우리는 그들이 이 문제에 대해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이 곤혹스럽다. 서명인들이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에게 뿌리 깊은 반목의 감정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서명인들은 악의적인 의도가 전혀 없었고 자신들이 신뢰했고 또 그들의 서명을 원하는 친구와 동료들을 배려해서 위트니스 리의 사역을 제대로 조사하는 것을 미루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신뢰하고 이 문제들을 더 세심하게 조사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러한 중대한 문제에 서명한 것은 무책임한 것이고, 참된 학자와 참된 사역의 인도직분에 요구되는 본래 모습에는 못미치는 것이다. 이유가 어떠하든지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은 공정한 학자요 사역의 인도자들에게 요구되는 관례들을 스스로 저버림으로써 크게 비난 받을 여지를 남겼다.

    우리는 앞에서 한 많은 말들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에 관한 기록을 바로 잡고, 그렇게 함으로써 공개 서한이 부당했고 그것에 서명한 것도 부적절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우리 중 누구도 서명인들의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알수 없으나, 우리 모두는 그들의 행동이 온당치 못했음을 쉽게 분별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서명인들의 행동으로 인해 위트니스 리의 사역과 지방 교회들의 지체들로부터 등을 돌려왔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는 마음이 아프지만, 우리는 의로운 재판관이신 주 예수님께서 이 글을 통해 많은 사람들 마음 속에서 운행하시고 사람들 마음 안에서 위트니스 리와 서명인들에 대한 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기를 기도 드린다. 우리의 상황을 주님의 은혜로 공정하고 충분하게 제시하려고 노력해왔지만, 우리는 독자들 안에서 운행하시는 주님의 영을 신뢰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통해 독자들이 위트니스 리의 사역과 이 사역을 따르는 우리들에 대해 평강을 갖게 되었으리라고 믿는다.

    지방 교회들을 대표하는 여러 형제들과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 편집부
    2010년 11월 28, 주일

    1. http://ministrybooks.org에서 읽어볼 수 있다
    2.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 출판사에서 펴낸 책들과 테이프에 대한 정보는 http://www.lsm.org/lsm-catalogs.html을 참조하라.
    범주들:
    Exclude from List (ko), Korean, 간행물, 비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