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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서한”에 대한 노먼 가이슬러와 론 로우즈의 변증과 ‘크리스천 리서치 저널’(Christian Research Journal)의 지방 교회들 재평가에 대한 그들의 비평에 답변함 [영어 사이트] 이 글을 PDF 로도 읽을 수 있음 고후3:17- 더구나 주님은 그 영이십니다. 주님이신 그 영께서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고전15:45-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산 혼이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

고린도 후서 3장 17절에 있는 “주님은 그 영이십니다”라는 말씀이 그리스도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주장의 오류

“공개서한”에 대한 노먼 가이슬러와 론 로우즈의 변증과 ‘크리스천 리서치 저널’(Christian Research Journal)의 지방 교회들 재평가에 대한 그들의 비평에 답변함 [영어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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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3:17- 더구나 주님은 그 영이십니다. 주님이신 그 영께서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고전15:45-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산 혼이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롬8:9-11- [9] 그러나 하나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여러분은 육체 안에 있지 않고 영 안에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때문에 생명입니다. [11] 또한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에도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후서 3장 17절에서 한 말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확증을 이단이라고 정죄한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주님은 그영이십니다.”1 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이 말씀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을 가진 형체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삼층천에 있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 분이시며(행2:33, 36, 5:31, 히12:2), 또한 믿는 이들이 영접할 수 있고, 믿는 이들 안에 거주하시는 그 영이심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갈 3:2, 롬8:9-11, 고후 13:5참조). 애석하게도 오류가 있는 조직신학체계에 입각한 가이슬러와 로우즈의 주장은 그들이 성경에 담겨있는 순수한 계시를 못 보게 하는 너울이 되었다. 그런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크리스천리서치인스티튜트’(CRI)가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측의 가르침을 재고한 것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아들(삼일성의 두번 째 위격)이 또한 고린도후서 3장 17절(“더구나 주님은 그 영이십니다. 주님이신 그 영께서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이 말하는 그 영(삼일성의 세 번째 위격)이시라는 주장이 참된 지지를 얻고 있는 것도 아니다. 성령을 주님이라고 하는 이 말씀에서 많은 주석가들은 여기 “주님”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야훼(Yahweh)(주 하나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출34:34를 인용한 16절 참조).

그들의 분석은 다음과 같이 여러 측면에서 결함이 있다:

고후 3장 17절 문맥 안에서의 “주님”

모든 신실한 성경 주석가들은 말씀은 합당한 문맥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문맥을 볼 때, 고린도 후서 3장 17절에 있는 “주님”은 단지 구약의 야훼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이 분명하다. 3장 3절부터 6절까지에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영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자신이 사역한 그리스도(주님)의 편지가 바로 그들이라고 말한다. 그후 바울은 의의 사역이자 영광의 사역인 신약 사역이 뛰어남을 보여줌으로써, 신 구약의 사역을 비교한다(7-11절). 이어서 그는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함으로써 그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 빛을 발하는 새언약의 사역자들에 관해 말한다(3:18).

14절부터 16절까지는 우리 마음이 돌이켜져야 할 대상이신 주님이 곧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매우 분명히 밝힌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 3장 15절에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마음에 너울이 덮여 있다고 말한다. 이 너울은 “언제든지 그들의 마음을 주님께로 돌이키기만 하면”(16절)“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다(14절). 복음의 진리에 따르면, 이것은 유대인들이 구약의 야훼께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킬 때가 아니라, 14절이 말하는 것과 같이 사람이 마음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 돌이킬 때 이루어지는 일이다. 따라서 16절에 있는 “주님”은 앞의 14절에 있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17절에 있는 “주님”이 다른 어떤 분을 가리킨다고 말하는 것은 문맥과 모순된다.2

이어지는 본문도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한다. 18절은 “우리 모두는 너울을 벗은 얼굴로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함으로써 그분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릅니다”라고 말한다. 4장은 다음과 같이 3장에서 소개된 동일한 항목들인 그리스도, 주님, 하나님의 형상, 믿지 않은 이들의 마음에 너울이 덮여 있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계속해서 언급된다:

  • 3절을 보면 복음은 이 시대의 신에 의하여 눈멀게 된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가려져 있다(4절 상). 이 너울은 앞의 3장 14-15절에서 말한 너울을 다시 말한 것이다.
  • 4장 4절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이것은 앞의 3장 18절에서 우리가 그분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된다고 말할 때의 그 형상을 가리킨.
  • 사도들이 전파했던 복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었다(4:4). 이 영광은 3장 18절에 있는 주님의 영광이며, 그것은 4장 6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같다.
  • 끝으로, 다음의 5절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님이심을 직접 언급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는 것을 전파합니다”(강조가 추가됨).

따라서 앞뒤 문맥을 통해 볼 때 고린도 전서 3장 17절(“지금 주님은 그 영이십니다.”)에서 바울이 언급한 “주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린도 후서 3장 17절에서 성령을 주님이라고 할 때 여기서 “주님”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야훼(Yahweh)(주 하나님)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우는 것이다. 마음을 돌이켜야 할 대상은 구약의 야훼라는 의미에서의 그 영이 아니라, 육체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구절들을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가이슬러와 로우즈의 주장은 신성한 삼일성을 극도로 단순화시켜 만든 자신들의 공식과 모순되는 말씀의 함의를 회피해보려는 얄팍한 술책일 뿐이다.

가이슬러와 로우즈: 주 예수님은 여호와이심

우리는 고린도 후서 3장이, 모세가 보았던 “주님”이 “야훼”로서 계시된 출애굽기 34장을 참조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고린도 후서 3장 17절이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야훼를 가리킨다는 주장은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아도 여전히 타당성이 없다. 신약의 예수님은 가이슬러 자신도 그의(Systematic Theology)에서 인정한 것처럼 구약의 야훼께서 육체가 되신 분이다. “예수님이 야훼(여호와)이시라고 주장하심” 이라는 제목의 단락에서 그는 구약의 여호와를 신약의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여러 말씀을 인용한다. 결론의 글에서 가이슬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여호와시라는 가장 강력한 주장은 요한복은 8장 58절에 있는데, 거기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나는…이다’ 입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진술은 예수님께서 다만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존재하셨다는 것만이 아니라 출애굽기 3장 14절의 “나는 …이다”와 동등한 분이시라는 뜻의 말이다. 그분 주변에 있던 유대인들은 그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했기에 참람하다는 이유로 돌을 들어 그분을 죽이려고 했다(요10:31-33 참조). 동일한 주장이 또한 마가복음 14장 62절과 요한복음 18장 5-6절에도 있다.3

로우즈 또한 예수님께서 야훼이심을 강하게 주장한다.(The Complete Book of Bible Answers: Answering the Tough Questions)이라는 책에서 그는 “예수님께서 야훼이심을 증명하는 성경 근거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변에 두 쪽을 할애한다.4 그는 수많은 성경구절들을 인용 소개한 후에, “따라서 분명히 예수님은 야훼이시다”라고 결론짓는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여호와이셨음을 보여주는 가이슬러와 로우즈의 이런 해석에 동의한다. 바로 그 때문에 고린도 후서 3장 17절의 ‘주님’이 단지 구약의 여호와만을 가리킬 뿐 신약의 주 예수님을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의 앞뒤 문맥 전체는 사도들의 신약 사역이 모세의 구약 사역보다 뛰어나다는 내용이다. 그런데도 바울이 신약의 주 예수님 대신에 구약의 여호와께로 돌이켜야 한다고 말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성경은 “주님[그리스도]은 그영이십니다”라고 말한다.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그런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는 전제를 미리 내려놓고, 그들의 관념에 들어맞게끔 설명을 짜맞추느라 애쓴다. 이것은 성경을 주석할 때의 합당한 태도가 아니며, 자신들이 신학적으로 체계화해 놓은 것을 성경의 권위보다 더 높이려는 시도일 뿐이다.

가이슬러의 논증 안에 있는 논리적인 오류들

가이슬러는 성경 연구에 있어서 형식논리를 엄격히 적용하는 것을 신봉한다고 주장한다.5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듯 그는 로널드 부룩스(Ronald Brooks)와 함께(Come, Let Us Reason)라는 책 한 권을 펴낸바 있다. 이 책에서 그는 논리적인 오류들의 예라 할 것들을 몇 가지 인용한다. 그가 이처럼 논리와 수사의 기본 원칙들을 숙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임에도 자신이 위 책에서 혹평한 바로 그 논리적인 오류를 동원하여 위트니스 리의 고린도 후서 3장 17절 해석에 비판을 가하는 것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예를 들어,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많은 주석가들”이 말한 것에 근거해 볼 때, “아들이 또한 고린도후서 3장 17절이 말하는 그 영이시라고 말하는 주장이 참된 지지를 얻고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가이슬러와 부룩스는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말한” 것에 근거하는 식의 논증을 ‘아규멘텀 포퓰럼’(argumentum ad populum)이라고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것은 대중의 견해에 따라 진리를 단정하는 오류이다. 그것은 “다수가 찬성하는 것임으로, 이것을 받아들인다” 라고 말하는 태도이다. 이런 식의 주장은 사람들의 찬동에 호소하는 것이지 진리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행을 좆는 사상을 내세워 유리하게 논쟁을 이끄려는 시도일 뿐 충분한 논증에 기초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 태도가 아니다. 이런 주장들은 “속물 근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엘리트층의 견해나 대세가 된 견해를 수용하고 거기에 편승하라는 요구이기 때문이다. 이런, 히틀러를 옹호했던 주장이 이런 게 아니었던가!6

동일하게 “많은 주석가들”이 말한 것에 호소하는 것 또한 가이슬러가 아래와 같이 묘사한 것처럼 부적절한 ‘아규맨텀 아드 베레큐디엄’(권위에 호소함)의 인상을 남긴다:

“ 몇몇 권위자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이것을 받아들인다.”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권위들”은 틀릴 수 있고, 사실 틀리는 경우가 자주 있다. 더 나아가 권위 간에 충돌도 발생한다. 이런 충돌이 있을 경우 어떤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단지 권위에 호소하는 것이 결코 증거나 훌륭한 논증을 대체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7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CRI 의 기사를 비판하며 고린도 후서 3장 17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그 영이 아니시라는 주장을 펼칠 때 증거를 거의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들은 어떤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날 요량으로 “많은 주석가들”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은연중 권위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가이슬러와 로우즈의 논증은 다음과 같은 “특별한 변론”의 정의에 부합한다:

이것은 어떤 반대되는 관점이 공평히 취급되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여기서는 하나의 관점을 지지하는 증거만이 인용될 뿐 반대되는 나머지 증거는 무시된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취사선택한 이 증거가 그것을 지지하기 때문이다.(비록 다른 증거는 무시될지라도 말이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오류가 바로 이것이다.8

한 예로,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제시한 “분석”은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라고 말하는 고린도 전서 15장 45절 하반절을 완전히 무시한다. 마지막 아담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가이슬러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9 “되셨습니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씀이 육체가 되셨습니다”라고 할 때 사용된 것과 같은 헬라어 단어이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육체가 되시어 인성 안으로 오신 것을 말한다. 고린도 전서 15장 45절은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되신 것을 말한다(요 7장 39절, 눅 24장26절 참조). 그리스도는 그러한 부활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10 엘리옷 밀러(Elliot Miller)가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의 가르침에 대한 CRI 의 재평가 작업에서 이 논점을 포함했음에도,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그것을 철저히 무시한다. 따라서 그들의 검토 작업은 활용 가능한 증거 중 일부만 선택적으로 취해 이루어진 것이며, 그것에 따라 자신들의 논증을 적당히 구성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말한 것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고린도 후서 3장 17절이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주장이 “어떤 참된 지지”를 얻는 것도 아니며, “많은 [익명의] 주석가들”은 주님이 야훼를 가리킨다는 관점을 취한다 고 말한다. 이 두 언급들은 오직 위트니스 리만이 이 구절에 있는 주님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했다는 거짓된 인상을 남긴다. 물론 “주님은 그 영이시다” 그리고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는 것을 믿는 데에 성경의 증언 외에 다른 것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또 다른 증거가 필요하다면 유력한 많은 학자들과 성경 교사들 또한 신약의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그리스도와 그 영이 동일시됨을 확증했다는 것을 보일 수 있다. 만일 그러한 확증이 양태론이라고 정죄되어야 한다면,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아래 사람들도 동일하게 양태론으로 정죄해야만 한다:

  • Athanasius
  • Marius Victorinus
  • John Albert Bengel
  • Charles Hodge
  • Robert Jamieson, A. R. Fausset and David Brown
  • Joseph Cook
  • Marvin Vincent
  • Andrew Murray
  • Hermann Gunkel
  • A. B. Simpson
  • James Denney
  • Alexander Balmain Bruce
  • David Somerville
  • John Peter Lange
  • Henry Barclay Swete
  • Adolf Deissmann
  • W. H. Griffith Thomas
  • Thomas Rees
  • Robert C. Moberly
  • Alan H. McNeile
  • Terrot R. Glover
  • R. Birch Hoyle
  • H. Wheeler Robinson
  • W. F. Lofthouse
  • R. H. Strachan
  • C. H. Dodd
  • William R. Newell
  • Lucien Cerfaux
  • William Barclay
  • Prosper Grech
  • Neill Q. Hamilton
  • Karl Barth
  • Eduard Schweizer
  • C. A. A. Scott
  • S. H. Hooke
  • Hendrikus Berkhof
  • David Hill
  • F. F. Bruce
  • G. R. Beasley-Murray
  • James D. G. Dunn
  • Walter Kasper
  • G. W. H. Lampe
  • Walter C. Wright, Jr.
  • Richard B. Gaffin, Jr.
  • Ernst Käsemann
  • Carl F. H. Henry
  • Lewis B. Smedes
  • Bruce Demarest
  • Gordon Lewis
  • Mehrdad Fatehi
  • John S. Feinberg

이 모든 주석가들은 논쟁이 되고 있는 고린도 전서 및/또는 고린도 후서의 말씀들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를 그 영과 동일시해왔다. 그들의 진술들에서 발췌한 부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 영이심을 확증하는 학자들과 성경교사들” 이라는 글 안에 포함되어 있다.

결론

고린도 후서 3장 17절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해석이 참된 지지를 얻지 못한다는 가이슬러와 로우즈의 반박성 주장 그 자체가 지지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바울의 말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문제는 권위라 할 어떤 이의 재가가 필요한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다. 위트니스 리의 해석은 고린도 후서 3장과 4장의 앞뒤 문맥에 의해, 구약의 여호와가 신약의 주 예수님과 동일시된다는 사실에 의해, 그리고 존경받는 많은 교사들의 저술들에 의해 지지된다.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이 구절에 있는 바울의 말의 분명한 의미와 취지를 간과하고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의 말씀을 무시한다. 이 구절들이 성경을 벗어나는 자신들의 신학적 구조틀에 산뜻하게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 다음에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밑받침하기 위해 다양한 논리적인 오류들을 동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좀 더 신중히 취급될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각주:

1 이 글은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소홀히 해 온 삼위일체에 관한 진리의 한 방면, 즉 그리스도와 그 영의 동일시 방면을 검토한다. 고린도 후서 3장 17절과 고린도 전서 15장 45절 그리고 신약 성경의 기타 부분에서 그것을 살펴볼 수 있다. 독자들은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의 아들과 그 영의 관계에 대한 위트니스 리 및 지방 교회측의 가르침은 이게 전부다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특별히 믿는 이들의 체험과 관련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 영의 동일시를 말하는 성경의 분명한 말씀을 단호히 확증하지만 동시에 그분들(Them)사이에 영원한 구별이 있음도 확증한다. 이에 관해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 가운데 구별은 있으나 분리는 없다. 아버지는 아들과 구별되시고, 아들은 그 영과 구별되시며, 그 영은 아들과 아버지와 구별되신다. 신격의 셋은 그 상호내재 안에서 동시에 함께 존재하시므로, 그분들은 구별은 되시지만 분리되시지는 않는다. 삼일 하나님 안에는 분리가 없고 오직 구별만 있다. 삼일 하나님은 그분의 상호내재 가운데 존재하신다. 한면으로 그 셋은 상호내재 하시지만, 다른 한면으로 그분들은 동시에 함께 존재하신다. 그러므로 그분들은 하나이시다. 그분들은 분리되시지 않는다.(사람과의 연합 안에서의 하나님의 역사(The History of God in His Union with Man) (한국복음서원 1993, 26-27 쪽).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출판물들에는 삼일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균형잡히게 제시하는 부분들이 많이 담겨 있다. 이중 1970년대 중반부터 나온 것들은 다음과 같다:

확증과 비평(Affirmation & Critique) [영어 사이트] 창간호(1996 년 1-1) [영어 사이트] 는 “삼일 하나님을 앎”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여러 편의 뛰어난 논문들을 담고 있다:

2 고린도 후서 3장에 있는 “주님”이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은 다음의 출처들에 의해 확증된다:

윌리엄 밀리건(William Milligan), (The Resurrection of Our Lord) (London: Macmillan, 1890), p. 248:

사도의 일반적인 어법은 별도로 하고, 전체 문맥과 그 장(章)의 주장을 고려할 때 우리는 “주님”이라는 단어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모세가 산 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처럼,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하늘에 속한 상태 안에 계신 “주님의 영광”이다. 그리고 우리가 증가하는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볼 때, 우리는 영광으로부터 영광에 이르도록 동일한 형상 안으로 변화할 때까지 그것을 더 잘 반사할 수 있게 된다.

피터 윤(Peter Yoon), (Our Triune God) (Wheaton, IL: BridgePoint, 1996), p. 189:

문맥을 보면, 모세가 시내 산에서 야훼께로 돌이켰던 것처럼(출34:34), 사람들이 주 예수님께로 돌이킬 때 영적인 눈멂의 너울이 그들의 눈에서 벗겨진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영이심을 확증하는 학자들과 성경교사들” 에 인용된 출처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영이시라는 성경의 계시를 더 확고하게 한다.

3 노먼 가이슬러(Systematic Theology, vol. 2: God, Creation), (Minneapolis: Bethany House, 2003), p. 280. 가이슬러는(Baker Encyclopedia of Christian Apologetics)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9) pp. 129 and 731; 와(When Skeptics Ask)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0, 1996), 105-106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해석을 반복했다.

4 Ron Rhodes, The Complete Books of Bible Answers: Answering the Tough Questions (Eugene, OR: Harvest House Publishers, 1997), pp. 115-117.

5 달라스 신학교를 세운 루이스 스페리 쉐퍼(Lewis Sperry Chafer)에 따르면, 사실상 이러한 실행은 정통 개신교 신앙과도 반대된다. 그는 이렇게 썼다:

정통 개신교의 신앙. 성경에 관하여 확실하게 잘 정의된 신조(信條)들은 정통 개신교인들에 의해 다음과 같이 신봉되어 오고 있다:

    1. 성경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2. 성경은 신앙과 실행의 유일한 규범이다.
    3. 인간 이성과 지식은 전적으로 성경에 복종되어야 한다(강조 추가됨)
    4. 성경 안에 담겨있는 것을 넘어서서는 어떤 내적인 빛이나 추가 계시가 주어진 바 없다…
    5. 진리의 형성과 관련해 신약 기자들에게 주어진 권위 외에는 어떤 권위도 교회나 사람들에게 주어진 바가 없다.

Lewis Sperry Chafer, Systematic Theology, Volume 1: Prolegmena, Bibliology, Theology Proper (Dallas, TX: Dallas Theological Seminary, 1947), p. 15.

쉐퍼(Chafer)가 인간 이성은 성경 안에 있는 계시에 복종해야 할 뿐 그것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고 말한 것은 옳은 지적이다. 인간 이성은 제한적이며 틀리기 쉽다. 이 논문이 지적하는 것은 가이슬러는 그 자신이 채택한 원칙에도 충실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는데 그런 논리적인 오류들을 활용한다는 점이다.

6 Norman Geisler and Ronald Brooks, Come: Let Us Reason: An Introduction to Logical Thinking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90), p. 97.

7 Ibid, p. 102.

8 Ibid, p. 98.

9 Norman Geisler, Baker Encyclopedia of Christian Apologetics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9), p. 487.

10 일부는 이 영이 성령이 아니라고 주장해 왔지만, “생명 주시는”이란 말에 조에(zoe)라는 헬라어 어근이 담겨 있고, 조에는 신약에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가리키는 것임을 유의하는 게 중요하겠다(엡4:18참조). 그영께서 주시는 것은 바로 이 생명이며(고후3:6),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바로 이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 <기독교 변증을 위한 베이커 백과사전>(the Baker Encyclopedia of Christian Apologetics)663쪽에 이 구절에 대한 가이슬러의 해석이 담겨 있는데 매우 불만족스런 해석이다. 그는 “생명 주는 영”(Life-giving spirit)은 부활체의 본성(nature)을 말하지 않고 부활의 신성한 기원(origin)을 말한다”고 한다. 우리는 “생명 주는 영”(life-giving Spirit)이란 용어가 부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의 본성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지적에 동의하지만, 가이슬러의 해석은 그 구절의 본문에 충실하지 못한 면이 있다. 그 구절은 부활의 기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무엇이 되셨는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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